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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liss Sep 11. 2017

말 잘 듣는 사람의 최후


어스름이 져 깜깜함 속에 녹아내리는 시간, 그 공간에 비가 온다면

우리는 길을 걷다가 우연히 가로등 불빛이 비추는 빗줄기를 볼 수 있다.

나는 그 순간을 사랑한다. 


빗방울 속에 애써 핸드폰을 보호하며 찍어온 사진들은 

그 순간을 담아내지 못해 아쉬우나 

다음 비가 온다면 그리고 내가 그 순간 길을 걷고 있다면 우연찮게 또 가로등 불빛 아래 빗줄기를 볼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고 있다.


어제 이 순간을 볼 수 있었던 계기는

오후내 일을 보다가 서점에 들려야겠다고 생각한 덕분이다. 저녁을 넉넉히 먹어 아랫배에 약간의 불편함을 느끼고 있으니 서점에 들려 책을 한권 사고 집까지 걸어온다면 몸이 좀 가벼워지겠다 생각한 덕분이었다. 출발할 때부터 한 방울씩 떨어지던 비는 쉽사리 기세를 늘리지 않을 것 같았고 우산이 없는 나는 계획대로 하자고 움직였다. 


서점에는 일요일 저녁인데도 적지 않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닫혀있고 특히 지하에다가 사람들이 많아 산소가 부족한 공간에 들어서면 간혹 폐로부터 비강 후방으로 이어지는 곳의 기관들이 조여지는 느낌이 든다. 누군가 내 양쪽 측두근을 잡아당기는 느낌이 들기도 하고 맥박수가 빨라지는 걸 체험하기도 하며 덩달아 숨이 가빠지고 쉬어도 편안하지 않다. 누런코가 가득 차 있을때의 느낌이기도 하고 너무 놀라 심장이 멎는 것 같을 때의 느낌이기도 하다. 


서둘러 그 공간을 빠져나와 점점 굵고 빨리 내려오는 빗방울과 일요일 밤을 함께 하였다. 이삼십분동안 발길을 재촉하는 사람들을 구경했고 건물 여러개를 지나쳤으며 버스를 탈까 고민을 하기도 했다. 내일 아침엔 남겨두었던 오렌지 바닐라 케이크와 커피를 마셔야지 생각했고, 오늘 밤 수면제를 먹지 않아도 잠이 좀처럼 오기를 바란다고 속으로 되내이기도 했다. 


신호등의 초록불을 기다리는 동안 몇몇 사람들은 손바닥으로 가려도 어차피 맞을 비를 천사 링처럼 막아내며 횡단을 했고 그것을 보며 아주 약간 갈등을 하다가 이래 저래 맞는 비는 같다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다 말을 너무 잘 듣는 자신에 화가 나기 시작했다. 선생이건 부모건 남의 말을 너무 잘 듣는 아이었던 나는 숙제를 비롯해 그들이 말한 것들을 흘려듣지 않았고 뭐 하나 틈을 허용하지 않았는데, 이제 어른이 되어야 할 나이에 이르러 결정 하나 성취 하나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어른아이가 되어 있었다.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말해주는 사람이 없다. 이제는.


인생이 시험으로 점쳐지는 시간을 살아낸 인간으로서, 언제부턴가 정답이 있는 일들에 환멸을 느끼기 시작했다. 버튼 한두개만 누르면 정보가 난무한 시대에 그 정보를 최대한 배제하고 머리와 마음에서 나오는 미숙한 글을 자꾸만 쓰려는 것은, 사소하게 내놓는 결과물들이 비평의 대상은 될 수 있으나 정답이 있어 맞고 틀림이 갈라지지는 않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말해주는 인간이 있어도 이제는 싫다. 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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