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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liss Nov 08. 2021

중완(中脘)

혈자리를 공부하던 스터디 시간, 가슴선과 배꼽 사이 가운데 부위에 선배가 침을 놓았다.

평소 체기나 변비, 설사 등 소화기에 불편한 점이 많지 않던 터라 배우는 기분으로 침을 맞고 스터디를 잘 마친 후 집에 돌아오던 중이었다.

'오늘 공부한 자리는 상완, 중완, 하완, 신궐, 관원, 중극...'

버스 안에서 중얼거리며 오늘 실습한 자리들을 다시 한번 되새겨보았다.

목적지에 내려 길을 걷는데 명치부터 무언가 쑥 내려간 느낌이 들더니 내 체간 가운데 부위에 얹혀 있던 것들이 미끄러지듯 쑥 내려가 버리는 느낌이 들었다. 난생처음 느껴보는 기분이었다.

마치 막힌 변기를 뚫어내는 느낌처럼,  막힌 하수구관이  하고 길을 내는 것처럼 궁극의 시원함이 온몸에 퍼졌다. 나도 모르게 쌓인 것들이 많았는지 몸에 미안하기까지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로 치면 20년을 훌쩍 넘긴 시간을 살아오면서 과식은 습관처럼, 때로는 속식과 거식, 과음, 자극적인 음식들을 향한 무분별한 환영 등이 거행된 장소가 바로 이 가운데, 복부 아니겠는가 싶었다. 위로는 맛의 향연을 느끼며 축배를 들고 아래로는 시원하게 배출하여 해방감을 만끽하는데 가운데서 들어오면 들어오는 대로 나가면 나가는 대로 죽어라 일하다가, 주인 마음이 편치 않으면 같이 시무룩하다가, 주인이 기쁘면 과하게 입장하는 것들을 잘개 쪼개야 하니. 그곳은 도대체 자유의지라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 노동자의 터전이었다.  

어쩌면 그날 그 하나의 가는 침은 코어의 노동자들에게 한 줄기 빛처럼 희망을 밝히고, 자동화 기기처럼 짐을 덜어준 이정표이자 조력인이 아니었다 싶다. 마치 무망지인(毋望之人) 같은 그 혈자리에 침을 놓을 때면 지금도 숨을 살짝 들이마신 후 침이 쑤욱 들어가는 그 정법을 따라 온 신경을 집중한다. 안에 쌓이고 고였던 것들이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 길을 트고 날 섰던 긴장감을 해방시켜주길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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