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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liss Mar 15. 2020

달팽이 껍데기


바이러스 사태로 30년 넘게 발이 되었던 지하철과 버스를 잠시 멀리하게 되었다.

운전면허를 딴지 15년째이고, 작은 차를 산지 3년째인데 운전면허증은 신분증 대용으로 쓰이고 차는 너무나 가만히 서 있다 움직이는 법을 잃어 출장 배터리만 부른 게 두 번이다. 

막상 운전대를 잡으면 조심조심, 어떻게든 가게 되나 그 운전대를 잡기 전의 불안과 긴장감이 너무 부담스러워 차는 타다 말다, 주된 운송수단이 아니었다. 특히 일터가 있는 곳은 서울에서 가장 움직이는 차가 많은 곳이고 비싸고 고급진 차가 사방으로 에워싸는 동네다. 비가 오면 주차장을 바라볼 뿐, 날이 너무 더우면 마을버스를 기다리며 연신 부채질을 했을 뿐 차로 출근을 하는 일은 엄두 내지 못하였다. 

지난주 일터가 있는 곳의 지하철역에 바이러스 확진자가 다녀갔다는 문자를 받고 망설이다 그래, 이럴 때 타고 다니라고 있는 차지. 하며 운전석에 앉아 안전벨트를 맸다. 운전 초행길이 어긋나기라도 할까 봐 내비게이션 말에 충성을 다하며 조심조심 차를 몰았다. 일단 구르기 시작한 바퀴는 목적지를 향해 후진 없이 속도를 내었고, 비록 한강 다리를 건너면서도 하늘과 강물에 눈길을 주지 못한 채 일터에 무사히 도착하였다. 

지하철에서 보았던 출근길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좀 빠른 달팽이들처럼 차들은 각자의 공간을 짊어진 채 때로는 여유롭게, 때로는 서두르며 달리다 서다를 반복했다. 

퇴근길은 또 다른 분위기였다. 바쁘고 힘차게 서두르던 차들은 각자 내는 불빛에 스며들었다 빠져나왔다를 반복하며 지체 속에 조금 덜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여전히 내비게이션 안내에 집중하면서 아침 출근길에는 없었던 라디오 소리를 위안삼아 달팽이 껍데기 속에서 애쓰고 상처 받은 나를 위로하였다. 

다음날은 노래를 따라 부르게 되었고, 내비게이션과는 다른 의견을 내며 주체적으로 달리다 경로를 이탈하였다는 소리를 여러 번 들었다. 당황하는 일도 확연히 줄었지만 이럴 때일수록 더 조심해야 한다는 주위의 조언을 새기며 차들의 흐름에 벗어나지 않도록 끼기도 하고 공간을 내어주기도 하였다. 

이 날 퇴근길에는 굵은 빗줄기도 만났다. 후드득 창문과 윗면에 빗방울이 내는 마찰음이 전혀 거슬리지 않았다. 명상 앱을 켜놓은 것처럼 밤의 공기와 빗방울 소리가 사방에 존재하였으나, 차는 온도와 습도와 조도가 야기하는 불편으로부터 나를 지켜내었다. 물론 그만큼의 위험을 감수하는 것은 운전하는 나의 몫이었다.

운전을 하니 기온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추운 것보다는 더운 게 낫지, 라는 생각으로 매일 껴입었던 패딩 대신 조금 얇은 핸드메이드 코트로 멋을 낼 수 있었고 운전할 때 갈아 신는 운동화를 구비하니 똑똑 어른 소리 내는 구두도 언제든 신을 수 있었다. 혹시나 일하다 필요할 수 있는 짐들을 선별하지 않고 다 싣고 다닐 수 있게 되었다. 아이패드와 빌 브라이슨의 '바디'책은 보고 읽을 시간이 없어도 조수석에 앉아 함께 오갔다. 하루 종일 처음 보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설명을 해야 하는 일터에서 벗어나 움직이는 작은 공간 속에 나를 혼자 둘 때에는 고독보다 안심이 더 컸다. 예의 없이 운전하여 화를 부르는 차를 만나기도 했지만, 지하철에서 진상짓을 하는 인간들을 경계하던 피로감보다 분노가 더 큰 적은 아직 없었다. 

다만 움직임은 확연히 줄었다. 바이러스로 가뜩이나 야외활동을 못하는 와중에 차와 일터에서 앉아만 있다 보니 몸이 부대끼기 시작했다. 아랫배에 가스가 차고 배와 엉덩이살은 몸의 지분을 점점 많이 차지했다. 지하철에서 읽었던 책의 분량은 줄고 생각 대신 신경을 더 곤두세웠다. 하체는 움직일 기회를 놓치고 몸의 상부는 과도하게 업무를 수행했다. 잠을 더 설치게 되었고 새벽에 자주 깨게 되었다. 기름 칸은 왜 이리 수시로 내려가는지, 카드를 더 자주 더 많이 긁었다.

편안함은 홀로 오지 않았다. 제로섬 게임처럼 마이너스의 패를 동시에 내었다. 바이러스도 마찬가지였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일상은 너무나 소중한 것이 되었고, 부득이하게 시작했던 운전은 노을 녘 한강 다리를 건너보자는 바람을 얼떨결에 이뤄주었다. 삶은 제로섬 게임과 같을까. 손득(損得)의 아슬한 힘겨루기를 나는 매번 이후의 시간에 깨닫는다. 지금은 손(損)만 있다고 안타까워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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