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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liss May 29. 2020

물처럼,

광고회사에서 일을 배울 때 고 장진영 배우가 연보라색 민소매 원피스를 입고 찍었던 비너스 광고,

아마도 이 회사 모델로 찍었던 마지막 광고의 촬영장에 갔었다.

AE업무의 인턴이었던 나는 광고가 기획되는 과정을 옆에서 지켜보며 배우다가 처음으로 동행하였던 광고 촬영이었다. 촬영중에는 어느 잡음도 섞이면 안되기 때문에 에어컨 바람 없이 컨테이너 통 속에서 찜통같은 더위를 견디며 하루 종일 숨을 죽이고 지켜보았다.

대기실에 있던 모델이 나오는데 그 모습이 마냥 천사처럼 예뻤다기보다, 아우라라고 하지, 그 강단 있는 아름다움이 온 공간을 감싸는데 내 눈 앞의 공간은 다른 세계마냥 느껴졌고 현실인데 영화처럼 보였다. 맥락은 좀 다르지만 '미드나잇 인 파리'의 그런 느낌.


촬영이 끝나고 나와 디자이너분의 좁은 스포츠카에 나까지 다섯명이 꾸겨 타고 회사로 돌아와서는 다시 디자이너는 슬리퍼를 갈아신고 등을 북북 긁으며 밤샘 작업을 시작하고, 부장님은 광고주와의 미팅을 위해 한껏 긴장하며 영어 PT를 준비하고, 차장님은 변호사와의 소개팅으로 일찍 퇴근하려고 나한테 허드렛일을 막 시키기 시작하고, 대리님은 내 뒤에서 여전히 장난을 걸고, 나는 경쟁사들의 동향을 보고하기 위해 신문을 오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모여 컵라면을 먹고, 아이스크림 내기를 하고, 점심엔 자장면을 먹으며 꼭 고량주 한잔씩을 곁들이고, 회의하다 서로 언성을 높이다 또 어떤 날은 광고주를 밤샘 대접하느라 사우나에서 씻고 출근을 하는 날이 여전히 이어졌다.


회사를 더 이상 나가게 되지 않았을때, 나같은 인턴 조무라기를 엄청 예뻐해주고 기억에 남는 환영과 배웅으로 감동을 주었던 상사들을 삼성역에서 우연히 만났다. 나는 대학원에서 석사 논문 준비로 교수한테 매일 까이던 때였는데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고, 그들은 여전히 치열하고 바쁜 하루를 보내는 듯 했다. 

몇년 뒤 장진영 배우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기사들이 나왔고 나는 광고와 전혀 다른 분야의 공부를 하느라 여전히 허덕이고 있었다.


사는 거 뭘까, 요즘들어 자꾸 생각한다. 의지대로 시간이 흘러갈거라 생각했는데 물처럼 흐르는 시간을 두고 손도 발도 넣어보지 못한채 지켜보기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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