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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liss Sep 02. 2017

마음의 허기

홍로와 해물파전, 그리고 氣液

홍로의 계절이 왔다.

아무래도 다음 계절을 가장 먼저 느낄 수 있는 것은 

지하철 속 사람들의 출근 복장과 

시장이다. 


누군가 어떤 음식을 제일 좋아하냐고 물을 때 

나는 한참을 생각하는데 언젠가 '술'이라고 얘기했더니 그건 음식이 아니라며 음식 중에 고르라는 말을 들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음식은 '술'을 먼저 고르고 나서 적당히 어울리는 것을 이후에 선택하면 될 일이었다. 


아빠가 퇴근 후에 반주로 곁들이시던 맥주잔 위의 흰 거품을 날름 받아먹을 때 

나는 그것이 구름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별 맛이 나지 않는 그 구름을 한 입 가득 물고 나서 사라지게 내는 그 순간, 아빠처럼 다정한 어른과 이 유리잔 한 잔을 공유한다는 사실에 으쓱해졌다. 그리고 나는 엑기스이자 아빠의 것인 노란 물을 굳이 탐내지 않았다. 

한 달에 한 번, 친가쪽 가족 모임을 할때 큰 아빠들은 왕관이라는 이름의 병맥주로 상을 시작하여 과일, 땅콩, 진미오징어, 김 묻은 기다란 과자 등을 앞에 두고 투명의 액체를 찰랑찰랑 나누기 시작했다. 목이 말라 벌컥 들이켰던 그 액체는 참으로 쇼킹했다. 25도의 취기가 올라오기도 전에 어른들에게 들키기라도 할까 그 두려움과 내가 어른의 음료를 탐했다는 놀라움이 정신의 문고리를 꽉 잡아 내었다. 간혹 어떤 관계인지 관심도 없는, 더 먼 친척이 방문할 때 다들 우르르 현관으로 마중이라도 나갈치면 나는 유리잔에 담긴 그 투명 액체를 물인척 하고 한 모금씩 마셔버렸다. 나는 대담해졌고 둘째 큰아빠처럼 얼굴이 벌개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두세번 더 확인하였다.


대학생이 되었다. 엄마는 대학생이 되면 아가씨들처럼 날씬해진다고 누누이 얘기해줬지만 그런 일은 고대해도 생기지 않았다. 마침 통이 넓은 면바지와 끈 묶인 단정한 구두, 말이나 자전거 탄 사람을 왼쪽 가슴에 달고 다니는 패션이 유행인지라 내 허벅지 두께와 뱃살의 혁대 탈출 정도는 보이기에 중요하지 않았다. 하루 세끼, 간식, 술과 안주를 먹는 생활이 이어지는데 불편함이 없었다. 

떼로 고모집, 이모집 간판을 단 가게들을 전전하며 한잔 한잔 기울이고 더 기울이는 날들이 3월, 9월 반짝하였다. 운동을 하는 친구들도 있었고 여자를 기대 이상으로 좋아하는 친구들도 있었다. 나는 한 병 기울이고 나서 세네발자국 멀리에서 흘러오는 담배 연기 속에 밤하늘 보는 것을 즐겨하였다. 

사랑도 일도 돈도 꿈꿨다. 그 액체는 나를 참 용기나게 했다.


돈을 벌게 되었다. 처음 출근을 하고 퇴근을 하던 그 날, 자면서 온 몸에 쥐가 나는 것을 경험하였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보이지 않는 손들이 줄다리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머리는 안간힘을 쓰며 깨려고 하고 몸은 안간힘을 쓰며 버티려는 가운데에서 나는 베베 꼬인 두툼한 밧줄처럼 팽팽하기만 하였다. 내 몸인데 손을 댈 수 없을 만큼 무기력함이 활기찼다. 

이 후 나는 맥주 한 모금과 소주 한 잔으로 '퇴근 의식'을 하게 되었다. 그 첫 잔은 '甲의 내'가 아니라 '나의 나'를 다시 만나도록 하였으며 그 뒤로 나는 다음날 아침까지 정신이 자유로운 인간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일터가 바뀌고 생각보다 많은 짐을 지게 되었다. 터덜터덜 구겨진 걸레처럼 돌아와 우리는 氣液이라며 에너지를 주는 액체를 더 많이 나눴다. 하지만 그 에너지는 다음날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더 자주 걸레처럼 구겨지게 되었다.     


마음의 허기가 질 때 빈 곳을 채워야했던 것을, 비어있지 않은 곳을 채우느라 

양쪽 다 탈이 났다. 빈 곳은 허기짐에 체념을 한 듯 기운이 없고, 차고 또 찼던 곳은 심술보가 되었다. 

위산은 자꾸 나와 속이 쓰리고 구역질이 났다. 


부추를 다듬고 쪽파를 씻는 일은 마음 속 허기를 조금 달래는데 도움이 되었다.

아린 향으로 눈을 맵게 하고, 씁쓸한 촉감으로 식욕을 달랜다.  

한 가닥 한 가닥 씻고 다듬다보면 이 음식의 귀함에 새삼 놀란다.

조갯살과 오징어가 꽤 비싸다는 것도, 

부침 튀김가루가 재료를 감싸지 않고 단순히 붙여놓는 역할을 하기까지 정성이 꽤 많이 들어간다는 것도 알게된다. 기름이 넉넉해야 맛있고 막걸리가 단짝이라는 것은 다시 안다. 

 


홍로와 해물파전, 氣液으로 가을을 맞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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