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편)_ 북촌의 골목, 향기
가끔은 내가 뭘 좋아하는 지도 모르겠어
목요일 아침 눈을 떴는데 새벽 3시에 잠이 들어서 그런지 늦잠을 자버렸어요.
요즘 정말 수면 루틴이 다 깨져버렸어요. 사실 엉뚱한 생각이지만 저는 왜 9시~10시에 자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그 시간에 잠이 오는 건 아니잖아요.
우울증이 있었던 시기가 있었어요.
그땐 몰랐는데 지나고 보니 잠이 오질 않고 하루 종일 뜬눈으로 해가 뜨는 걸 지켜보며 출근했던 그 시기가
돌이켜보면 우울증이었던 것 같아요.
회원들이 “잠이 안 와요. 불면증이 있어서요…”라고 고민을 이야기하면 그 시기를 지나온 제 모습이 생각나면서 “억지로 자려고 하지 마세요. 그냥 시간을 자연스럽게 보내세요. 자려고 애쓰면 그게 더 괴로워져요.”라고 답했었어요. 그게 정답인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그당시 자려고 애쓰면서 너무 힘들었었거든요.
‘자야 내일 출근하지…’
우울증인데 또 그 생각까지 하니까, 더 힘들었던 것 같아요.
하여튼 무기력해지지 않기 위해 달력에 꼭꼭 일정을 적고 생활하고 있는데
“향기 체험 가기”가 그날의 과제였어요.
저는 향수를 정말 좋아하는 사람인데, 40이 되고는 즐거운 게 하나도 없어지면서 모든 게 좋아지지 않았어요. 예전만큼 향수구경이 행복하지 않았어요.
갈까 말까 정말 많이 고민을 했습니다.
그래도 해보자. 그냥 나가자. 그럼 뭐든 지금보단 낫겠지..
최대한 재미 요소가 많은 데를 가보자.
그래서 결정한 곳은 ‘르 라보’ 브랜드 향수를 구경 가기로 했어요.
르 라보 향수는 써본 적이 없는데, 그래서도 있고
북촌에 한옥집 콘셉트로 매장이 자리 잡았다는 기사를 보고
그래, 경복궁 주변 가서 걷기도 하고 한옥도 보고 향수도 고르고 오면 좀 더 흥이 나지 않겠냐 싶었죠.
북촌은 삼청동 근처이기도 하고 청와대도 있고 이래저래 관광객으로 인해 정말 차로는 지옥이었습니다.
평일인데도 주차할 곳도 없고 ;
괜히 차를 가져가서 경복궁 근처에 차를 대고 택시를 타고 다시 그 매장으로 가야 했습니다.
날은 또 왜 그렇게 더운지…
이때 ‘… 아냐. 잘 나온거야. 즐겁게 생각해’ 라고 마음을 다잡고
내리고 북촌 골목을 살짝 걷는데…
이상하게 슬슬 기분이 좋았어요.
사람도 점심 이후가 되니 빠지기 시작했고 골목이 여유가 생기기도 했구요
조금씩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잘… 온 건가…’
저는 공간에 영향을 많이 받아요.
사적인 이야기지만, 업무적으로도 센터나 스튜디오에 이력서를 낼 때
그 공간에서 일하고 싶은지 인테리어를 많이 봅니다.
그냥 좋아하는 일을 할 때, 그 공간이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어요.
그래야 일이 더 사랑스러워지더라고요.
한옥과 향수의 만남.
착 붙는 느낌이라기보단, 두 가지 감성을 주어서 좋았어요.
두 가지 이상의 감각을 주는 공간이나 환경이 매력적으로 다가와요.
콜라보, 이질적인 소재의 믹스, 반전의 조화, 촉각+청각의 융합 같은 감각공간
사실 향기에 예민해서 바로 구매는 하지 않았지만, 디스커버리 키트를 구매해보았습니다.
느낌이 좋았던 향 2개 + 한 가지는 그 두 가지 느낌과는 아예 다른 향.
(키트는 9천얼마에요.)
그리고 몸에 뿌리고,
어렵게 다시 차에 가서 귀가하는 길에
차 안에서 내 몸에 남은 향을 맡아보면서 돌아왔습니다.
이상하게 매장에서는 크게 좋게 와닿지 않았던 향기가 더 좋게 느껴졌어요.
향수라는 게 탑,미들,베이스 노트로 나뉘는데
탑 노트를 많이 느끼면 잔향(베이스 노트)이 다르게 느껴지는 향도 있어서
향수를 고르러 갈 때는 테스터를 들고 많이 돌아다닙니다.
그리고 다시 가서 구매하곤 했어요.
그래서 향이라는 게 사람같이 느껴져요.
나는 어떤 순간에 향으로 기억에 남는 사람일까
마주치면 좋은 사람일까, 시간을 보낼 때 좋은 사람일까
잔잔하게 잔향이 좋은 사람일까..
집에 와서 ‘잘 다녀왔다. 정말, 잘 다녀왔다.’라고 생각했어요.
예전만큼 신나거나 예전만큼 설레거나 하지 않아도
내가 예전에 행복해했던 느낌은 지워지지 않는구나.
찾으면 또 만날 수 있구나…
잔잔하게 다가오게 할 수 있구나…
내가 찾아서 하면 나를 기분 좋게 느끼게 할 수 있구나.
예전만큼의 흥분, 행복감을 주지 않으면 실망과 허무함으로 다가오던 시기에
무기력이 왔던 것 같아요
더 큰 행복, 새로움을 주지 않는 것은 ‘의미 없음’으로 간주하고
무언가를 찾고 또 찾고… 마약 같은 즐거움을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어요.
이젠 잔잔하게
시간을 내서 내가 좋아했던 것들을 느끼게, 나를 돌보려 해요.
예전만큼의 강렬한 행복을 위해서가 아니고
가끔은 좀 더 살아있는 느낌을 갖게 해주고 싶었어요.
나를 돌보는 7월이 되고, 그게 8월, 9월이 되고 하면
살아가도 나쁘지 않다는 삶의 흐름을 만들 수 있게요.
제가 고른 디스커버리 3종이에요.
* LE LABO
르라보의 숫자는 향의 재료들의 가짓수라고 해요
가장 많은 재료수를 가진 향수는
55번 이라고 해요.
9월쯤 한정으로 매장에 들어온다고 합니다.
[ 광고아니고, 저처럼 향수에 관심있으신 분들 참고하시라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