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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리아리아 Mar 01. 2024

당연한 소리

오랜만에 오케스트라 콘서트를 다녀와서


락 콘서트가 더운날 마시는 시원한 얼음 음료 같다면,

클래식 콘서트는 더운날 마시는 뜨끈한 국물이랄까?


락 콘서트 안에 있으면 많은 걸 잊게 되는 반면

클래식 콘서트 안에선 많은 걸 생각하게 된다.


이렇게나 다른 성향의 공연이지만

새까만색이었든 새하얀색이었든

너무 다른 장르의 음악 공연이라도

끝난 뒤 공통적으로 느껴지는 느낌이 있다.


콘서트가 끝나면 머리와 심장에 꽉차 있던 귓밥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파낸 느낌이랄까?

사우나를 받은 듯 몸 속 어딘가가 가벼워진 느낌이 든다.


나는 인간의 몸짓 중,

악기를 연주하는 인간의 몸짓이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악기를 연주하는 인간을 볼 때면, 평소엔 인간이란 생명체에게서 잘 느낄 수 없는 숭고함을 느낄 수 있다.


특히 클래식 콘서트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순간은

연주를 시작하기 전에 단원들이 악기를 조율을 할 때다.

각각 저마다의 소리를 가지고 다들 하나의 음을 향해 달리는 소리를 들을 때면

마치 ‘질서 안의 자유’의 찰나 속에 있는 느낌이랄까나?


모든 악기들이 나란히 같은 라인에 서면

봉을 든 지휘자가 등장한다.

지휘자가 바다를 향해 지휘봉을 팡하고 휘두르는 순간, 불규칙적으로 출렁이던 파도는 잔잔하고 부드럽게 넘실대기 시작한다.


엊그제 다녀온 오케스트라 공연은

동생이 단원으로 활동하는 소규모 오케스트라 단체의 정기 연주회였는데, 공연의 퀄리티가 크게 높지 않았다. 관객이 많지 않아 편안하게 감상할 수 있었으나 때문에 공연장 분위기가 좀 냉랭한 느낌이 들었다.

- 그 냉기를 데우기 위해 나는 어찌나 열심히 박수를 쳤는지 손바닥에 불이 나고 팔이 떨어져 나가는 거 같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다음부턴 앞에는 앉지 말아야지...-


그래서 동생에게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주로 취미생들이느냐 물었는데

동생은 모두가 전공생들이라고 했다.


예상과 다른 답에, 나는 조금 놀라서

지휘자의 무게감에 아쉬운 뉘앙스를 풍기며

“지휘자도?” 라고 물었다.


동생은 지휘자는

음악적 신념이 강한 속을 지녔음에도

자기 신념 보단 연주자들의 니즈를 맞춰주려는

착한 친구라고 했다.

때문에 몇몇 연주자들이 지휘자에 따르기 보다,

자신의 니즈를 앞세우는 경향이 있다며..

통솔이 어려운 연주자들에 불편한 기색을 비추었다.


그 말들으니 지휘자에 대한 아쉬운 마음이 안타까움으로 바뀌었다.


내가 그 오케스트라를 공연을 보면서

괜히 민주주의와 정치에 대한 생각이 들었던 것이 아니었구나 싶었다.


역시 어떠한 하모니를 이룬다는것은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그리고 동생은 이어 말했다.

”난 괜찮았지? 어때? 이제 내가 연주를 얼마나 잘하는지 이제 좀 알겠어? “


나는 답했다.

”그러게.. 네 연주가 유독 빛나 보이더라.. 하하

덕분에 이제껏 갔었던 오케스트라 무대들이 꽤나 수준 있었다는 걸 깨달았지 뭐야.. “

그리고 나는 이어 말했다. “아쉬운 부분이 있었긴 했지만 그래도 정말 좋았어”


모두가 실수 없이 좋은 소리를 들려주기 위해 만들어진 무대,

그런 무대 위에서 쓸모없는 소리란 없다.


내겐 툭 튀어나온 불편한 음과 삐그덕 대는 하모니조차도 중요하다.

편안한 물결의 감사함에 무뎌진 나를 탁 일깨워 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거친 물살에 탁 부딫혀야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이다.

“아, 그간 내가 파도를 타는지도 모르게 편하게 파도를 타고 있었구나..” 라고..


늘 잔잔한 물결만 있는 복지국가에서 우울증이 빈번한 이유도 이런데 있지 않을까?


“세상 아름다운 소리를 위해 고군분투하는 사람의 손짓과 악기의 소리는 모두 가치가 있다.”


그렇게 생각하며

오케스트라 콘서트의 행복한 물살을 타고 집이 가는 길..


지하철에 서 가고 있는데 어쩐지 이상한 느낌이 들어 옆을 보니

어떤 남자가 옆에 서지도, 자리에 앉지도 않고

지하철 통로 쪽에 나를 향해 서서, 초점 없는 눈빛으로 나의 하반신 어디쯤에 시선을 둔 채 계속 서 있었다. 눈도 잘 껌뻑이지 않고 구부정한 자세인것이

티비에서 본 펜타닐 중독자가 연상 됐다.


나는 신경 안 쓰는 척 태연히 자리를 지켜보려고 하였으나, 그간 경험했던 지하철에서의 불쾌한 일들이 상기 되었다. 되돌아 되돌아 봐도 저런 유형의 인간은 떠올릴 수가 없었다.

“저 사람,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거지?

저런게 폭풍전야인가.. 저러다 확 돌변하는거 아니야?“

불안감이 폭풍 엄습하며 몸이 굳어가는 것이 느껴지자,

나는 의식하지 않는 척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곧장 앞만 보며 다른 칸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좇아오지 않는 듯 했다.

자리를 옮기니 다시 금방 안정을 찾았다.

옮기길 잘했단 생각이 들었다.


전 같았으면 계속 같은 자리에서 그의 소리에 집중하며 고군분투 했겠지만

호되게 아픈 경험을 하고 깨달았다.


남들의 소리 보다 먼저 귀 기울여야 하는건 바로

내가 듣고 느낀 소리란걸..


지하철에서 내려 밖에 나가니 공기가 상쾌했다.

약간은 쌀쌀한.. 내가 딱 좋아하는 공기였다.


그렇게 상쾌한 마음으로 집에 다다랐을 무렵,

집 앞에서 옆집에 드나드는 노파와 마주쳤다.


요즘엔 전처럼 문을 두드리고 벨을 누르며 불러대진 않아도 여전히 말을 걸 듯 늘 벽을 쳐댄다.


위층 사람 말로는 전에 만났을 때도 내 얘기부터 꺼냈다고 한다.

몇 차례 내가 맞대응을 한 이후론 직접적인 방식으로 시비를 걸며 다가 오진 않지만,

여전히 나에게 관심이 많은 듯하다.


문에 비친 그 여자는 가던 발길을 멈추고 뒤돌아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는 게 아닌가?

문 앞에 비춰 한참을 내 뒷모습을 보길래 뒤돌아 보았더니

움찔하며 가는 척하더니..

뒷걸음질을 쳐, 벽 옆에 숨어 나를 본다.

참 인생 그렇게나 할 일이 없나 싶다.

나는 대체적으로 할 일 많은 이웃이 좋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듯 세상엔 아름다운 소리를 위해 고군 분투하는 인간이 있는 반면에  

존재 자체로 불쾌하고 괴로운 소리만 내는 인간들도 있다.


무대 위,

모든 소리 하나하나가 다 가치있게 느껴지는데

왜 무대 아래선 가치 없게 느껴지는 끔찍한 소리가 이토록이나 많을까?


흔히들 말한다.

모든 생명은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끔찍한 소리를 내는 빌런들의 가치를 생각해 봤다.


그래,

어쩌면 그들이 있었기에

내가 누구보다 아름다운 소리를 잘 포착하고

그것에 감사함을 알게 해주는 걸지도 모르겠다.


콘서트 가기전 낮에 라디오 라이브 방송에서 들었던 한 기타리스트의 기타 선율도,

직전에 잠시 방문했던 은행의 친절한 은행원 목소리도,

콘서트 무대에서의 틀어진 악기 연주 마다마다 하나같이 그토록 다 감동일 수 있었던 것은..


연주를 볼 때 앞 뒤 양 옆에서 매너 있게 존재하던,

또 콘서트 장을 답답하지 않게 습도와 온도를 유지하던,

콘서트 장으로 가고 오는 길에 그저 날 스쳐 지나가던..

무색 무취한 존재에 대한 감사함도 점점 커지고 있는 것은..


그래,

그것은 어쩌면 그간 당연한 게 당연하지 않던 수많은 시간들 덕일지도 모르겠다.


그간 날 거쳐간 불쾌한 소리들이

”‘세상 당연한 소리들‘은 당연하게 만들어지지 않아!“라고 말 해 주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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