뚜르 드 몽블랑 12박 13일 출발!
나의 긴 여행 역사 중 가장 힘들었던 날을 꼽으라면 단연코 바로 뚜르 드 몽블랑을 떠나는 첫 날이다.
육체적으로 힘든 것은 아니었다.
내가 내 도전을 지키기 위해, 그리고 내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내려야 하는 결정들의 무게가 엄청나게 컸다. 이번에는 동행이 없어서 정말로 오롯이 나 혼자만을 생각하고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평소의 나는 무엇이든지 결정이 빠른 편이다. 결정을 한 후 항상 뒤돌아보고 곱씹으며 후회하기도 하지만, 일단 결정은 빠르다.
몇 번이고 풀렀다 싼 배낭을 침대 옆에 놓고, 아침에 입을 옷과 양말, 그리고 신발을 가지런히 두었다. 아무 사고 없이 뚜르 드 몽블랑을 완주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기도를 오래 했다. 정말 오래간만에 느껴보는 소풍 전 날의 설렘을 안고 깊은 잠에 빠졌다.
새벽 세 시 정도였을까? 덧문을 닫지 않은 창 밖이 대낮같이 밝아졌다. 그리고 잠시 뒤 우르르쾅콩
자다가 깨는 날은 일 년 중 손에 꼽을 정도인데 이 날이 바로 그 날이었다. 폭우도 폭우지만 어찌나 번개나 환하고 밝은지....걱정이 앞섰지만 아직 시간이 있으니 아침에는 괜찮아질거야..라는 초초긍정의 생각을 가지고 다시 잠이 들었다.
그날 샤모니의 아침 6시는 정말 우충충했다. 비는 계속 내리고 하늘은 더할나위없이 어두웠다.
이를 어쩐다....난 오늘 뚜르 드 몽블랑을 갈 수 있는 걸까.
옷을 입고 준비를 마치는데는 20분이 채 안걸렸다. 일단 밥을 먹고 생각해보자.
이 호스텔의 아침 식사는 정말 맘에 들었다. 바케트가 구워지는 향긋하게 이를 데 없는 냄새가 식당을 가득 채웠고 그 틈새를 노려 커피향이 코 끝을 짜릿하게 파고 들었다. 쟁반을 들고 요거트, 시리얼, 버터, 치즈와 꿀, 오렌지 주스, 그리고 커피를 가득 담는다. 바게트와 페이스츄리를 담아 토스트기에 밀어 넣고는 오렌지나 사과 등 과일을 챙기는 것이 아침식사 루틴이다. 정말 성의없이 뚝뚝 끊어낸 바게트가 이렇게도 맛날 수가....바게트에 버트를 듬뿍, 꿀을 살짝 발라 입 안에 넣으면 그저 행복하다. 커피는 또 어떤가. 에스프레소 기계에서 인심좋게 쏟아져 나오는 커피 맛이 일품이었다. 아마도 여기가 샤모니라서 그런 걸까. 뚜르 드 몽블랑을 출발하느냐, 하지 못하느냐..하는 기로에 섰는데 아침식사는 달리 어쩔 도리가 없이 맛있기만 했다.
아침을 먹으며 사람들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고 창 밖으로 펼쳐진 초록 잔디와 그 너머에 있는 높은 산들, 보송 빙하 등을 즐기는 눈 호강도 참 좋다. 일단 체크아웃 시간인 아침 10시까지 숙소에서 기다려보기로 했다. 이런 결정을 내리는데는 프랑스인 가이드가 한 몫을 했다. 그는 같은 숙소에 묵고 있는 중국인들의 가이드인데 이런 날씨에는 출발을 미루고 날씨를 지켜봐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자신의 감이지만 오늘 출발은 힘들거라는 진단을 조심스럽게 내렸다. 더군다나 내가 가려는 미아주 고개는 안된다고 했다. 그나마 희망적인 말은 이곳의 날씨는 급변하니 날씨가 개일 수도 있다고 하는데...예보상으로는 아픙로 2-3일간 폭우란다....ㅜㅜ
아침 10시가 되었다. 난 이미 결단을 내린 상태다. 어차피 오늘 저녁 이곳에 머물 수는 없으니 일단 출발하기로 한 것이다. 원래 맡겨야만 했던 캐리어를 호스텔 락커에 집어 넣고 열쇠를 챙겼다. 그리고 1번 버스 타는 곳으로 출발한다. 비는 이제 부슬부슬 상태로 바뀌었지만 하늘은 온통 흐리기만 하다. 하지만 이런 날씨속에서도 샤모니는 너무 이뻤다. 에휴....
나의 계획은 이러했다. 뚜르 드 몽블랑의 출발점인 레우슈까지 버스로 가서 날씨가 혹시 기적적으로 개면 트레킹을 시작하고(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비가 내리면 인근 숙소에서 하루 묵어가기로 한것이다. 오늘 꼭 미아주 산장을 가야겠다는 생각을 버리는 것이 내 계획의 핵심이라면 핵심이다.
만약 호텔이나 숙소에 방이 없으면 비오나세이 인근에 있는 산장의 도미토리를 알아볼 것이다. 이렇게 비가 오니 아마도 출발을 취소한 트레커가 적어도 한 사람은 있지 않을까..싶었다. 그마저도 없다면...레꽁타민 몽주에까지 버스로 가서 텐트를 구입해서라도 치고 잔다는 비장한 각오를 하니 두려울 것이 없었다. ㅋㅋ
이 모든 것이 혼자라서 가능했던 결정이었고. 그 보다 더, 내가 이렇게 나이를 먹으니 가능한 결정이었다.
나이를 먹으면 두려움이 상당 부분 사라지고 대범해지는 것이 사실이다. 물론 내 경우이긴 하지만.
결론을 말하자면 이 날 그렇게 힘들게 내렸던 내 결정은 정말 잘한 결정이었다.
어차피 샤모니에 예약된 숙소도 없으니 굳이 거기에 머물 필요가 없었던 것이고, 예약할때는 만석이었지만 산장에는 간간히 빈 침대가 발견되기도 하였고, 생각보다 버스로 이동할 수 있는 곳도 꽤 있었다.
어렵게 한 발 내디디니 다음 발자국에는 더 많은 길이 생기는 것이다.
레우슈로 향하는 1번 버스가 도착을 했고,
드디어 내 뚜르 드 몽블랑은 비와 함께 어렵사리 시작되었다. 두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