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해, 인생은 타이밍이야
발리 동쪽 허름한 선착장에 앉아 있었어. 길리 트라왕간 섬으로 들어가는 보트를 기다리고 있었지.
몇 달째 비 한 방울 없이 푹푹 찌고 있던 발리는 유난히 더웠는데 매표소 옆 식당에는 힘없는 선풍기 한 대 뿐이었어.
함께 길리로 떠나는 일행 중 스페인에서 온 라우라는 짧은 원피스를 입고 있었는데 의자에 앉아 자세를 바꿀 때마다 안에 미리 입고 옷 화려한 수영복 팬티가 보이는 거야.
우리 어렸을 때 가장 끔찍했던 게 뭐야?
얼레리 꼴레리 팬티 보인대요, 아니었어?
근데 뭐래니, 여긴 발리라고. 팬티 좀 보이면 어때. 보이나 안 보이나 보고 있는 사람도 별로 없잖아.
어쨌든 나는 그녀의 화려한 수영복 팬티가 아주 마음에 들었어.
보트를 타려고 모여드는 여행자들도 비슷했지.
남자들은 아예 웃통을 벗었고 여자들도 윗도리 아랫도리 할 것 없이 얼마나 짧은지.
벌써 수영복을 챙겨 입은 무리와 속옷 따위 챙겨 입지 않아 가벼운 티셔츠 아래의 태연한 젖꼭지 무리로 나뉘었달까. 하긴 길리 섬이 지척이니 수영복 차림인 것도 나쁘지 않지. 바로 바다에 풍덩 뛰어들 수 있잖아.
그런데 도시 촌뜨기였던 나는, 길리섬에 어울릴 옷들을 잔뜩 싸와 놓고도 단단히 브라를 하고 아주 단단한 티셔츠를 입고 있었지 뭐야. 어찌나 땀이 나던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던 선풍기는 모여드는 여행자들로 어느새 얼굴도 보기 힘들어졌어.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길리 섬에 도착해서도 마찬가지였어.
수영복 위에 항상 뭘 걸쳤고, 해산물을 먹으러 가면서도 굳이 단정하게 챙겨 입었지.
선베드에 누워서는 수건을 덮었고, 스노클링을 하면서도 물에서 나오자마자 이미 푹 젖어버린 티셔츠를 굳이 걸쳤다니까.
그에 반해 라우라는 3일 동안 갈아입은 수영복만도 네댓 벌은 되었어.
나와는 참 다른 친구더라고. 수영복은 기능성 의류이므로 여러 벌이 필요 없고, 그것도 물에 들어가 있을 때 아니면 또 다 가리니 굳이 다양하고 예쁠 필요가 없는 거 아닌가. 물론 예쁘면 좋지만 몇 벌씩 갖출 필요는 없는 품목 아니야?
하지만 라우라는 아닌 듯했어.
진정한 해변의 여인이라면 그녀처럼 수영복 컬렉션 정도는 있어야 하는 건지도 몰라.
뭐든 쓸데없는 쇼핑을 싫어하고, 필요한 것도 딱 하나 이상 잘 사지 않는 사람인 나도 길리에서는 왠지 그녀의 쇼핑이 참 바람직하다는 생각이 들었어. 나도 마음은 해변의 여인이었지만 누가 봐도 길리 섬에 적응 못한 도시 촌뜨기였을 거야.
그렇게 길리에서 4일을 보내고 다시 배를 타고 나왔어.
여행은 이제 하루가 남았고 마지막 일정은 발리의 청담동이라고 하는 스미냑이었어.
아기자기하고 화려한 쇼핑 천국 스미냑을 걸으며 나는 <미스터 선샤인>의 김희성 도령 대사가 떠올랐어.
나는 이리 아름답고 무용한 것들을 좋아하오 달 별 꽃 바람 웃음 농담 뭐 그런 것들
그렇게 흘러가는 대로 살다 죽는 것이 나의 꿈이라면 꿈이요
그 아름답고 무용한 것들이 스미냑에 얼마나 많았는지 몰라.
이제 곧 도시로 돌아가야 하는 내게는 그야말로 무용해질 것들이었지.
아 예쁘다. 갖고 싶다. 꼭 필요한 건 아닌데, 그래도 너무 예쁘잖아! 사고 싶어!
그런 것들 있잖아. 알지?
여행이 끝나면 더 이상 입을 수 없는 시원한 옷들, 가슴만 겨우 가리는 윗도리, 실루엣이 훤히 드러나는, 어깨가 시원하게 파인, 화려한 패턴의 공주 드레스들, 예쁘지만 한두 번 신으면 망가질 게 빤한 귀여운 샌들, 어깨까지 닿는 귀걸이에 목이 꺾일까 걱정되는 치렁치렁한 목걸이, 얼기설기 만들어 놓은, 하지만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이 세상 하나뿐인 가방 같은, 뭐 그런 것들 말이야.
그 아름답고 무용한 것들을 바라보며 스미냑을 걸었어.
그리고 그 마지막 날 밤이 되어서야, 트렁크에 처박혀 있던 해변의 여인 다운 옷을 뒤늦게 꺼내 입었지 뭐야.
그래, 나도 한 벌쯤은 있었지. 처박아 놓고 안 입어서 그렇지.
등에 조금도 옷감을 사용하지 않았고 치마에도 아주 인색하게 옷감을 사용한 홀터넥 원피스였어.
당연히 브라도 하지 않았지.
마침내 시원하고 자유로웠어!
그리고 자유로운 사람들 틈에서 활기차게 걸었지.
이제 막 그렇게 입어 놓고도 몇 시간 전의 나처럼 훌훌 벗어버리지 못한 사람들을 안타깝게 바라보면서 말이야. 참내, 사람이 올챙이 적 생각을 그렇게 못한다니까.
아 진작 좀 시원하게 입을 걸. 몸도 시원했지만 사실 속이 더 시원했지.
난 도대체 여행이 끝나가는 마당까지 뭘 기다렸을까?
여행이 뭐야. 모든 짐을 내려놓고 온전한 내가 되어보려고 떠나는 거 아니야?
현실을 벗어던지고 새로운 나를 찾으려고 혹은 되찾으려고, 말이야.
그렇게 단 며칠이라도 살아보기 위해 돈과 시간을 들여 떠나는 건데!
짧은 순간에 도시인의 촌스러움과 의무를 벗어던지고 자유로운 영혼으로 변신하기에 내 도시인의 껍데기가 너무 두꺼웠나 봐. 그래서 아까운 시간 다 버리고 결국 여행 끝나가는 마당이 겨우 흉내만 냈지 뭐야.
게다가 처음도 아닌데!
내가 누구야! 발리에서 4년을 살면서 밤마다 화려한 옷을 입고 춤을 추던 여인인데!
그런 내가 도시에 몇 년 살았다고 촌스럽게, 길리에서, 스미냑에서 그렇게 꽁꽁 싸매고 다녔다니!
아유, 참 억울하고 아까워.
역시, 인생은 타이밍이야.
여행도 타이밍이고 스미냑도 타이밍이야.
조금 더 빨리 도시의 때를 벗어야 했어. 아니면 여행의 시작을 스미냑에서 해야 했는지도 몰라.
그랬다면 그 아름답고 무용한 것들의 기운으로 타인의 시선, 도시의 암묵적인 룰 같은 거 훌훌 털어버리고 조금 더 빨리 자유로운 영혼이 되었을지도 모르지. 아름답고 무용한 스미냑의 핫한 여행 템들로 무장하고 길리를 누볐겠지. 예쁜 옷 따위 처박아 놓지 않고 실컷 입으면서!
하지만 이제 하룻밤이면 도시로 돌아가는데, 이 예쁜 것들이, 이 아름답고 무용한 것들이 무슨 소용이야.
기억해, 인생은 타이밍.
도시인의 때는 제때 벗자.
스미냑도 타이밍.
스미냑은 여행의 끝이 아니라 시작으로 하자.
내일부턴 다시 도시인이 되어 도시인의 의무를 다하겠지.
브라를 챙겨 입고, 때와 장소에 따라 타투도 가려주면서 말이야.
그러다 또 그 도시인의 의무가 버거워지면,
오직 아름답고 무용해지고 싶은 순간이 오면 그때는 가장 먼저 스미냑으로 갈 거야.
브라 따위 가방에 넣지도 않고, 거기서 아름답고 무용한 것들을 잔뜩 산 다음, 그것들을 걸치고 패피가 되어 발리를, 길리를 활보할 거야.
다시는 도시 촌뜨기 같은 모습으로 해변을 거닐지 않겠어!
굿바이 길리,
굿바이 스미냑,
자유로운 영혼이 되어 see you again.
Cover Photo by Vidar Nordli-Mathisen on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