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나와 비슷한 삶을 살고 있을지도 모르는 또 다른 우주
2017년 겨울, 베를린.
열두 살 아이와 짧은 유럽 여행 중이었다.
이른 새벽, 베를린의 게스트하우스에서 눈을 떴다.
밤새 라디에이터가 내뿜은 열기에 방 안 공기가 바짝 말라 있었다.
창밖은 아직 어두웠다.
슬그머니 일어나 창문을 열자 찬바람이 훅 밀려들었다.
창틀에 말려놓은 양말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아직 자고 있는 아이에게 찬바람이 날아갈까 온몸으로 막고 섰다.
창밖 맞은편, 게스트하우스 건물보다 한두 층 낮은 아파트가 한 채 서 있다.
꼭대기 층 맨 오른쪽 집에 불이 딸깍 켜졌다.
잠이 깜빡 달아났다.
시커먼 실루엣이 움직이기 시작했고 곧 그 집 창문도 활짝 열렸다.
누군가의 우주가 잠에서 깼다.
그의 담배에 불이 붙었다.
빨간빛이 그의 손에 매달려 일렁였다.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실루엣은 미동도 없이 담뱃불만 이리저리 움직였다.
나는 그를 보고 있는데 그는 무엇을 보고 있을까.
멀어져 가는 담배 연기를 보았을까. 지루했던 지난밤을 복기하고 있을까. 오늘 펼쳐질 그의 하루를 보았을까.
허공에 반짝이던 담뱃불이 점멸하고 그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른 새벽, 출근을 준비하는 시간은 길지 않았다.
마침내 문을 열고 어두운 복도로 나섰다.
그의 움직임에 맞춰 꼭대기 층 복도의 불이 딸깍 켜졌다.
그리고 한 층 아래, 또 아래, 그의 발걸음에 맞춰 계단도 잠에서 깨 새벽을 맞았다.
그렇게 그와 계단의 하루가 시작되었고, 덩달아 잠자던 나의 우주도 오랜 잠에서 깨어났다.
2002년 겨울, 시드니.
북반구가 눈에 덮일 때 한여름 시드니의 해는 서둘러 하루를 시작했다.
나도 덩덜아 새벽부터 일어나 눈곱만 떼고 옷을 입었다.
버스 정류장까지는 꽤 긴 블록을 걸어야 했다.
졸린 듯 경쾌한 듯 새벽을 걷는 내 모습을 누군가 한 명쯤은 보고 있었겠지. 지금의 나처럼.
새벽 공기를 헤치고 도착한 버스에는 부지런히 하루를 시작한 사람들이 이미 가득했다.
버스의 목적지는 매주 토요일 열리는 벼룩시장이었다.
온갖 골동품과 잡동사니를 팔고, 낡은 옷과 책들을 파는 곳에서
나는 존 아저씨와 함께 베이컨 앤 에그롤, 소시지 롤을 팔았다.
점심때가 되면 팔던 빵을 하나 들고 구석에 앉아 배를 채웠다.
바로 옆에는 이탈리아에서 온 니노라는 아저씨의 아이스크림 트럭이 있었다.
내가 점심을 먹고 나면 니노 아저씨는 초콜릿 시럽에 풍덩 담갔다 꺼낸 아이스크림을 건네주었다.
그때마다 나는 여섯 살 아이처럼 설렜다.
갓 눈을 떠 기지개를 켜는 새벽처럼, 그때 나의 우주는 젊고 싱그러웠다.
다시, 베를린.
건물 1층의 계단까지 불이 차례로 켜졌다가 꺼졌다.
입구가 반대편이라 그가 건물을 나서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건물은 다시 어둠에 잠겼고 나는 내 머릿속 싱그러운 우주에 괜히 새벽부터 아련했다.
그때 건물 왼편 끝에서 자전거 한 대가 어둠을 헤치고 나타났다.
잠자던 나의 우주를 뒤흔들어 깨워놓은 그는 자전거를 타고 우주를 유영하듯, 차들에 섞여 차갑게 사라졌다.
덩치 큰 차들이 자전거에 질세라 어둠을 밝히며 꽁무니를 쫓았다.
찬바람이 오싹했다.
오줌을 싸고 난 후처럼 몸을 부르르 떨며 바스락거리는 방 안 공기를 흔들어 보았다.
이불을 돌돌 말고 자는 아이에게 고개를 돌렸다.
아이 머리맡에 푸른빛이 잠시 스쳤다 지나간 것도 같았다.
잠시 그녀의 우주가 느리게 눈을 깜빡였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그려갈 우주를 잠시 엿보아도 좋다고, 내가 언젠가 거닐게 될 우주를 잠시 보여주겠다고.
기숙사에서 핸드폰 불빛에 의지해 조심조심 일어나 앉는 날도,
두꺼운 전공 책을 들고 새벽부터 허둥지둥 달려 나가는 새벽도,
숙취에 쓰린 속을 달래며 머리를 쥐어뜯는 아침도, 그 우주에 존재할 것이다.
나의 우주가 그랬던 것처럼.
바닷가에서 쏟아지는 별과 함께 눈을 뜨는 날도,
이른 아침 산에 올라 불타는 해를 보는 날도 존재할 것이다.
나의 우주가 그랬던 것처럼.
내가 이미 지나온 것 같지만 실제로 닿을 수 없는,
아이가 나 없이 그려갈 어느 평행우주의 새벽을 그렇게 잠시 엿보았다.
아이는 제 우주에서, 어느 날 문득 낯선 이의 등에서, 잠시 들어와 앉아 있던 나의 우주를 떠올리기도 할 것이다. 오늘의 베를린을 떠올릴지도 모를 일이다.
아이의 우주를 응원하는 말을 손에 담아, 자는 아이 이마에 놓아주었다.
아이가 몸을 웅크리며 이불을 당겼다.
나도 다시 침대로 파고들어 아이 곁에 누웠다.
아직 내게서 분리되지 못한 작은 우주를 껴안았다.
아침을 먹고 베를린의 찬바람을 맞으러 나갔다. 그날, 아이의 우주가 내 머릿속에서 자꾸 팽창했다.
그날, 아이는 유난히 반짝였고 나는 그 옆모습과 뒷모습을 더 자주, 내 우주의 가장 깊은 곳에 담았다.
추위에 언 손을 더 잡았고, 빨개진 귀를 더 감싸주었다.
춥다며 내 코트 주머니를 파고드는 작은 손처럼 아이의 작은 우주가 아직은 내 우주에 안겨 있었다.
그렇게 작은 우주를 담고, 잠깐 엿본 평행우주를 유영하듯 베를린의 겨울을 걸었다.
Photo by Jeremy Thomas on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