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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리 Nov 17. 2020

코로나 시대, 국경을 넘다


   

쿠르르릉.

인천발 쿠알라룸푸르행 비행기 바퀴가 활주로에 닿았습니다. 한국에서 두 달도 넘는 시간을 보내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길. 사람들이 주섬주섬 일어나 선반의 짐을 내립니다. 마음이 급한 사람은 이미 짐을 들고 문 앞에 서 있어요. 저 문이 열리면 빨리 나가 여권에 도장 찍고 가족이 기다리는 조호바루의 집으로 달려가고 싶지만, 그럴 수 없지요. 우선 쿠알라룸푸르에서 2주 동안 격리를 해야 하거든요. 코로나 검사부터 입국 승인서 확인까지 공항에서 처리해야 할 업무도 줄줄이 기다리고 있어요.     


마침내 비행기 문이 열렸고 종종걸음으로 비행기에서 빠져나왔습니다. 밤 10시쯤 쿠알라룸푸르에 도착했지만 호텔에는 몇 시쯤 도착할지 아무도 모르죠. 하라는 대로 부지런히 하는 수밖에. 가장 먼저 한국에서 미리 깔아온 자가격리 관리 앱을 열어 큐알코드를 스캔하고 정보를 입력했어요. 한 단계 패스.      


그다음은 코로나 검사 신청서 작성. 신청서를 작성해 여권 사이에 끼워 넣고 제출한 다음 의자에 앉아 기다려요. 파란 방호복을 입은 사람들을 처음 보았을 때 느꼈던 긴장감은 이렇게 오래 코로나 시대를 보내며 조금도 남아 있지 않네요. 얼마나 기다렸을까. 이름이 불렸어요. 두 번째 코로나 검사에요. 각종 검사 용품이 놓인 책상 옆 파란 플라스틱 의자, 등에 멘 가방을 풀지도 않고 엉덩이만 겨우 걸쳐 앉았습니다. 파란 방호복의 남자가 길고 무서운 것들을 꺼내 내 코와 입을 쑤실 준비를 해요.      


두 번째니 좀 괜찮겠지? 천만의 말씀. 더 힘들어요. 입을 벌리고 아 소리를 내는데 끝도 없이 목구멍을 후비는 면봉 때문에 헛구역질이 나와요. 혀가 제멋대로 움직여 면봉의 움직임을 방해하고 그럴수록 시간은 지체됩니다. 비행기에서 내리기 전에 먹은 연어 샌드위치가 속에서 탈출하려 하는데 면봉은 여전히 목구멍을 떠날 줄 몰라요. 겨우 목구멍 완료. 다음은 콧구멍 차례. 가늘고 긴 것이 코로 쑥 들어와 이마에 닿을 것 같아 나도 모르게 자꾸 고개를 뒤로 쭉 빼버렸어요. 두 번이나 실패. 아니, 내가 이런 사람이 아닌데 왜 이러지? 방호복을 입고 고글까지 쓴 의사 선생님이 버럭 화를 내기 전에 나는 지금 겨자를 삼켰다고 중얼거리며 앞에 놓인 기내용 캐리어의 손잡이를 부여잡고 등을 똑바로 세웠어요. 눈을 질끈 감고 주문을 외워요. 움직이지 마! 절대 움직이기 말고 아파도 버텨! 휴, 겨우 끝났어요. 눈물이 찔끔 나올 뻔해 괜히 크게 한숨을 내쉬었어요.     


또 종종걸음. 다음 단계는 무엇인지도 모른 채 사람들을 따라 줄줄이 걸어요. 눈치를 보니 책상 위에 놓인 바구니에 여권을 넣으면 되는 것 같아요. 이렇게 차곡차곡 아래서부터 쌓아 넣으면 가장 나중에 온 사람 여권이 맨 위인데 차례가 헷갈리는 건 아닐까, 괜한 걱정을 하며 자리에 앉아 또 기다리기 시작해요. 이번 관문은 입국 승인서. 말레이시아 이민국에서 받아 출력해 온 입국 승인서를 제출했어요. 그리고 또 하염없는 기다림. 오줌이 마렵고 바로 앞에 화장실이 있는데도 다녀오다 차례를 놓칠까 참고만 있어요. 그것 좀 늦어지면 어떻다고. 나보다 먼저 온 사람들이 아직 기다리고 있는 걸 확인하고 빨리 화장실에 다녀왔어요. 좀 낫다. 어라. 나보다 늦게 온 사람의 이름을 먼저 부르네요! 역시 바구니 안에서 순서가 뒤바뀐 것일까요! 분노의 숨을 쉭쉭 내쉬어보지만 어쩔 수 없어요. 마침내 내 이름이 불렸습니다. 미스 임 히윤 키웅!      


후다닥 일어나 여권과 입국 승인서를 다시 받아 들고, 다음에 가야 할 곳은 수납창구. 코로나 검사비와 정확히 뭔지 모르겠는 방역비 거금을 카드로 결제했어요. 역시 미리 준비해온, 2주간 격리를 성실히 이행하겠다는 서약서도 이곳에서 확인받았고요. 미리 호텔을 예약했는지도 여기서 확인. 말레이시아에 입국하는 모든 외국인은 국가 지정 호텔에서 본인 부담으로 2주간 격리를 해야 해요. 돈을 더 내면 지정된 호텔 중 원하는 곳을 미리 골라 머물 수도 있고요. 한국에서 급히 번역해야 할 책을 계약하고 온 저는 제대로 된 책상이 필요해 여러 호텔을 비교해서 가장 큰 책상이 있는 곳으로 미리 예약을 했어요. 그렇지 않은 이들은 무작위로 지정해준 호텔에서 격리를 하게 되어요. 격리 비용을 카드로 지불하느냐 현금으로 지불하느냐에 따라 처리 순서가 조금씩 뒤바뀌었어요. 줄을 잘 못 서서 살짝 뒤처졌다가 서류를 미리 작성해 온 덕분에 다시 몇 사람을 앞질렀네요.     


수납까지 마치면 이제야 여권에 입국 도장을 찍어줍니다. 거의 마지막 관문이죠. 보통은 서서 진행되는데, 특별히 의자까지 마련된 사무실 안에서 진행되네요. 이 꼬질꼬질한 의자 제공도 방역비에 포함된 것일까요. 어쨌든 또 기다림. 이유를 알 수 없는 기다림. 이렇게 오래 걸릴 일인지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기다림, 끝에 또 이름이 불렸습니다. 나보다 먼저 온 사람을 앞질러! 아, 차례와 순서 따위 의미 없네요. 인생 한 치 앞도 모를 일. 또 배우네요. 애써 종종거리며 빨리 가봤자, 서류 다 준비해 와서 일찍 끝나겠다고 좋아해 봤자 결국 도토리 키재기. 너나 나나 엎치락뒤치락. 인생지사 새옹지마. 온갖 말들이 떠오르는 와중에 ‘어머, 다 끝나셨어요?’라는 부러움 섞인 말도 들립니다. 어색하게 네, 하고 웃으며 이민국 사무실을 나섰습니다.  

   

다음은 예상치 못했던 귀여운 간식 증정! 물과 과자와 빵이 담긴 땡땡이 비닐봉지를 하나 골라 들었어요. 그리고 파란 얼룩무늬 군복을 입은 군인 아저씨를 따라 드디어 공항 밖으로 나갑니다. 아, 그전에 벌써 몇 시간째 나를 기다리고 있는 짐을 찾아야지요. 혼자 끙끙거리며 카트에 짐을 싣고 미리 예약한 호텔에서 보낸 운전기사를 만나러 가요. 드디어 공항 밖으로! 그래 봤자 아직은 주차장이지만. 문이 열리자 비에 젖어 무거워진 열대의 공기가 느리게 몸에 달라붙네요. 비가 오지 않아 종일 뜨겁게 달궈졌더라면 한 번에 훅 달라붙었을 텐데. 별것도 아닌데 조금 아쉬워요. 그렇게 뜨거운 공기가 훅 달라붙어야 집에 온 것 같거든요.


짐을 차에 싣기 전에 줄줄이 세워놓고 소독약을 뿌립니다. 축축해진 짐과 함께 드디어 나도 차에 몸을 싣고 빗방울이 희미하게 남아 있는 거리를 달리기 시작했어요. 모든 풍경이 덜 마른 수채화처럼 촉촉해요. 라디오에서 익숙한 맹글리시가 들립니다. 열두 시가 넘어 텅 빈 고속도로를 달리며 배시시 웃었어요.     


드디어 호텔에 도착합니다. 명색이 호텔인데 방호복을 입은 직원들은 내 짐에 손 하나 대지 않아요. 쳇, 소독약 다 뿌리고 왔거든요. 나 바이러스 없다고요! 혼자 낑낑대며 18층 복도 맨 끝 방에 도착했어요. 카드키도 주지 않아요. 한 번 들어가면 2주 동안 나올 수 없는 곳. 사진과 똑같아서 우선 안심이네요. 거대한 책상도 몹시 마음에 들고. 통창이 있어 볕도 잘 들고 경치도 나쁘지 않아요. 손가락 두 마디만큼 창문도 열려요! 영차영차 무거운 가방을 방 안으로 다 들이고 나자 육중한 문이 끼익, 쿵! 하고 닫혀요.      



안녕, 바깥세상.

이주 간의 자가격리가, 또 시작입니다.

아휴, 이래서 어디 한국 다니겠나요.

어쨌든 굿 럭 투 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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