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리 Aug 14. 2020

수영장에서 별 생각을 다하지



 

15년 전, 호주 동해안, 스노클의 성지로 유명한 그레이프 베리어 리프.      


“자 여기서 뛰어내리시면 됩니다!”     


‘뭐라고? 여기서 뛰어내려? 이 사람들이 미쳤나?’      


내가 깜짝 놀라 들이마신 숨을 내뱉기도 전에, 앞에 있던 사람들은 풍덩풍덩 깊은 바다로 뛰어들기 시작했다. 튜브도, 구명조끼도 없이, 스노클 장비만 대충 걸치고! 나는 더 깜짝 놀라 내뱉던 숨을 다시 들이마셨다.   

  

‘어머, 미쳤어, 미쳤어! 어떻게 여기서 뛰어들어!’     


하지만 배 위에 있던 모든 사람이 순식간에 바다로 사라졌고, 거대한 구명조끼를 입고 뒤뚱거리는 나 혼자 남았다. 하얀 피부에 주근깨, 금빛과 붉은빛이 자연스럽게 섞인 머리칼의 청년이 뱃머리에 앉아 나를 보고 있었다.      

“저, 혹시, 계단 같은 건 없나요?”     


그러자 그가 웃으며 반대편을 가리켰다. 슬금슬금 가보니 아니나 다를까 그쪽에는 바다로 이어지는 계단이 있었다.      


‘뭐야! 걸어서 내려갈 수도 있잖아! 괜히 겁먹었네!’     


계단을 한 칸 한 칸 내려간다. 가슴까지 물에 잠겼다. 계속 내려갈 순 없으니 그쯤에서 계단에서 발을 떼고 어느 쪽으로든 방향을 잡아 나가야 했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바닷물에 잠긴 계단에서 발을 뗐다. 긴장한 몸이 무거워 바닷속으로 꼬르륵 가라앉았다. 머리까지 잠겼다가 천천히 올라온다. 그 짧은 순간, 다행히 주마등처럼 지금까지의 삶이 머릿속에 쫙 펼쳐지지는 않았다. 여기가 내 삶이 끝은 아닌가 보다. 꼬르륵 잠겼던 몸이 생각만큼 많이 떠오르지 않아 불안하다.      


‘걱정하지 마. 가라앉지 않아. 조끼도 입었잖아. 이제 제대로 장비를 착용하고 물 위에 엎드리기만 하면 돼.’    

  

일단 마스크를 썼다. 시야가 약간 흐려졌다. 그리고 나의 숨구멍, 스노클 끝에 매달린 피스를 입에 물었다. 수많은 이들이 남겨놓은 역한 냄새에 구역질이 올라왔다. 동시에 온몸에 힘이 들어가면서 다시 꼬르륵 가라앉았다가 떠올랐다. 다시 한번 심호흡을 하고 얼굴까지 올라온 조끼를 허리춤으로 바짝 당기며 천천히 고개를 물속에 담갔다. 다리를 뒤로 쭉 뻗어 수면 위에 엎드렸다.      


처음 보는 세상이 거기 있었다. 세상에! 너무 놀란 나머지 또 호흡이 흔들렸다. 스노클이 물에 잠겼는지 입속으로 짠 물이 왈칵 들어왔다. 다시 발버둥을 치며 물을 뱉어내고 허둥거렸다. 다시 호흡을 가다듬고 피스를 입에 물었다. 적어도 물속에 뭐가 있는지는 확인했으니, 그러니까 죠스나 거대 문어 같은 건 없다는 걸 확인했으니 아까보다는 두렵지 않았다. 다시 고개를 박고 두 발을 찰방찰방 쳐보았다.     


‘그래 자유형은 배웠잖아. 할 수 있어. 천천히 천천히.’    

  

신비한 세계가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알록달록 물고기들이 무지갯빛 산호 사이를 보란 듯이 헤엄치고 있었다.      

‘이런 거구나. 바닷속 세상이 이렇게 아름답구나!’      


조금씩 전진해보았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하지만 조금도 전진하지 못했다. 고개를 들어보니 사람들은 이미 바다 한가운데 외딴섬 가까이 다가가 있다. 나도 따라잡으려고 부지런히 발을 찼다. 힘이 빠질 때까지 발을 차다가 고개를 들었는데 나는 아직도 그 자리다. 사람들은 이미 섬에 올라섰다.      


‘뭐지? 왜 앞으로 안 나가는 거지?’      


배에서도 제법 멀어져 있다. 와락 겁이 난다. 섬으로 가다가 힘이 빠져버리면, 살려달라고 외쳐도 아무도 듣지 못하면, 혼자 물속으로 꼬르륵...  주근깨 청년은 너무 멀어 나를 보지 못하고...     


‘안 되겠다. 아무래도 섬까지 가는 건 무리야. 다시 안전하게 배로 돌아가자.’     

 

배로 돌아가는데 힘이 쭉쭉 빠진다. 조금씩 몸이 가라앉는 것 같다. 이대로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극에 달했을 때, 드디어 배에 연결된 밧줄에 닿을 수 있었다. 밧줄을 잡고 천천히 계단을 향해 다가갔다. 차가운 계단이 발에 닿는 순간, 이제 살았구나 싶었다. 간신히 배 위로 올라왔다. 구명조끼를 벗어던지고 털썩 앉아 저 멀리 평화로운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저 깊은 바다에서 구명조끼도 없이 태평한 표정으로 둥둥 떠 있다. 신비로웠다. 저들은 인어인가 사람인가. 분명 지느러미가 아니라 두 발이 달려 있었는데!      


이렇게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십오 년 전 그레이트 배리어 리프였다.      


그렇게 물이 무서웠던 건 다 이유가 있었다. 18개월쯤 꼬꼬마였을 때 물을 가득 담아 놓은 빨간 대야에 빠져 죽을 뻔했다고 엄마와 할머니가 종종 이야기했다. 머리는 기억을 못 하지만, 몸은 그 공포를 기억했다. 그래서 물에만 들어가면 온몸이 그렇게 긴장을 했다.         


 


지금 나는 열대의 나라에 산다. 한국에서 인도네시아 발리로, 다시 말레이시아 조호바루로 터를 옮겨 살고 있다. 처음 열대의 나라에 살기 시작했을 때, 몹시 흔하지만 내게 쓸모없는 것은 바로 수영장이었다. 시커먼 바다는 물론 발이 닿지 않는 깊은 수영장도 내 심장을 쪼그라트렸다.


하지만 자꾸 눈에 보이면 친해지는 법. 나도 수영장에 조금씩 익숙해졌다. 조금씩 물에 들어가 봤고, 들어가 보니 익숙해졌고, 수영장 가장자리에 매달려 물장구를 치다가 예전에 배웠던 자유형을 흉내 내 보기도 했다. 여차하면 벽에 달라붙으려고 아주 가장자리로만. 한 번도 배워본 적 없는 평형은 친구들한테 물어 익혔고 모르는 사람들을 힐끗거리며 관찰했다. 물안경을 쓰고 잠수해서 그들의 손과 발이 어떤 각도로 어떻게 움직이는지 훔쳐보며 연습했다.


연습이 쌓이니 평형이 슬슬 몸에 익었다. 물론 발이 닿는 수영장에서만. 키가 훌쩍 넘는 수영장에서는 여전히 몸이 경계태세에 바짝 돌입했다. 힘을 빼라는데 몸은 전혀 말을 들을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괜찮다. 나는 안 죽는다. 안 가라앉는다.’ 주문을 외우며 힘 빼기 연습을 하다 보니 결국, 내 키가 훨씬 넘는 깊은 수영장에서도 평형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여전히 머리를 내놓고 우아하게 헤엄치지는 못 한다. 머리를 풍덩 담갔다 빼며 어푸어푸 요란하게 물살을 가른다.      


중요한 건 기술도 영법도 아니었다. 공포심을 조절하는 마음가짐. 물속에서의 호흡은 오로지 마음가짐에 달려 있었다. 가부좌 틀고 명상하듯 물속에서 온 정신을 집중해 흠 하 흠 하 해야 한다. 그 흐름이 깨지면 호흡도 곧장 흐트러졌다. 숨을 조금만 길게 참으면 몸이 이렇게 외쳤다.      


‘뭐 하는 짓이야! 정신 차리고 어서 물에서 나가! 이러다 죽을지도 몰라!’     


그럴 땐 얼른 벽으로 어푸어푸 헤엄쳐가야 한다. 우아하게 물살을 가르는 평형 따위 내팽개치고, 개구리헤엄이든 개헤엄이든 상관없이 발버둥 치며 최대한 빨리. 그렇게 벽에 매달려 마음을 가라앉혀야 한다.      



새로 이사 온 집에 거대한 공용 수영장이 있다. 인터넷으로 수영복을 두 벌이나 주문했다. 매일 수영을 하려면 수영복이 몇 벌 더 필요할 테니.      


'훗, 이제 나는 발이 닿지 않는 거대한 수영장에서 두려움 없이 헤엄칠 수 있는 여자니까.'

'나는 파란 타일이 촘촘히 박힌 수영장을 보면 기분이 좋아지는 사람이니까.'


수영장에 가득 담긴 엄청난 양의 물을 볼 때마다 나는 바다에 빠져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그 날의 그 느낌을 복기한다. 그리고 빨간 고무 대야도 아닌 거대한 수영장에서 자유롭게 놀 수 있게 된 나를 보며, 물에 빠져 죽을 뻔했다가 이만하면 잘 컸다고, 크느라 애썼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첨벙!

뛰어들고 싶지만, 아무리 수영장이라도 뛰어드는 건 여전히 무섭다. 그저 계단으로 한 칸 한 칸 천천히 몸을 담근다. 담그면서 혼자 묻고 답한다.      


‘한 번 뛰어봐! 다시 그레이트 배리어 리프 가면 또 혼자 엉거주춤 계단으로 내려갈 셈이야? 아니지?’     


‘아우, 그런데 이젠 안 가! 바다는 무서운 곳이야! 이번 생은 수영장으로 만족할래!’      


그리고 시원하게 물살을 가른다.


'쳇, 저 머나먼 바다 따위, 내 집 앞 수영장이 최고지!'


      




Main Photo by Marek Okon on Unsplash

매거진의 이전글 조호바루, 도시가 깨어나고 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