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리 Jul 09. 2020

조호바루, 도시가 깨어나고 있다

 

1945년 6월, 뉴욕


유럽에서 출발한 퀸 메리 호가 만사천 명의 군인을 태우고 뉴욕항에 입항합니다.

2차 대전을 치르고 돌아온 군인들입니다. 어퍼 웨스트사이드의 90번 부두에서 환영인파가 그들을 맞이합니다.  ‘고향에 돌아온 걸 환영해요!’라는 피켓도 들고 있네요.


육해군 병사들과 간호사들이 기쁨에 겨워 손을 흔들며 부두로 내려옵니다. 사람들이 열렬히 환호하고 피켓을 흔들며 소리를 지릅니다. 밴드가 그해 가장 유명했던 노래들을 크게 연주합니다.


화창한 초여름 오후였지요.

완벽하게 푸르고 아름다운 하늘, 부드럽고 따뜻한 날씨,

도시 전체가 나를 사랑해서 내 행복만 바라는 것 같은 그런 날이었습니다.


빼빼 마르고 졸려 보이는 해군 한 명이 걷다가 잠시 멈춰 우리의 주인공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미소를 지으며 시원한 남부 억양으로 말하죠.


“어이, 예쁜 아가씨. 여기가 어디야?”


우리의 주인공이 웃으며 대답합니다. 


“여긴 뉴욕이에요, 군인 아저씨!”


그러자 그가 부두 반대편에서 공사 중인 크레인을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저것만 끝나면 아주 괜찮은 곳 같은데?”

 

그리고 우리의 주인공에게 다가와 키스를 합니다!

일본 전승 기념일 날 타임스퀘어에서 찍힌 그 유명한 사진 속 장면에서처럼 말입니다.



photo by Alfred Eisenstaedt, 1945



그렇게 '거의' 다 이긴 2차 대전을 축하하며 기쁨을 나눕니다.


1945년 6월이었으니, 독일은 이미 항복했지만,

일본은 그로부터 석 달을 더 버티다 항복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주인공은 이렇게 생각하죠.


하지만 내 마음속에서, 희미하게 달떴던 그 여름날의 기억 속에서, 전쟁은 그 키스와 함께 끝났다.      





얼마 전 번역을 마친 소설의 일부입니다.

마침 그 부분을 카페에서 작업하고 있었어요.

제가 사는 곳, 조호바루의 어느 카페에서 말입니다.

 

조호바루는 코로나를 맞아 지난 3월 18일부터 MCO(Movement Control Order)를 시행했습니다.

식료품점을 제외한 모든 가게의 문을 닫고, 오직 장을 보러 가기 위해 가구당 1인만 차를 타고 이동할 수 있었습니다. 마스크 착용은 기본이고요.


그렇게 집에 갇혀 몰래몰래 (죄짓는 것도 아닌데 왠지 몰래 움직여야 할 것 같은 느낌이었지요!) 장만 보며 살다가, 이 주 후, MCO는 연장됩니다. 그리고 이 주 더, 계속 연장되었습니다.


그러다가 CMCO(Conditional Movement Control Order)로 변환됩니다.

문을 열 수 있는 가게들이 점점 늘어납니다.


길었던 MCO와 CMCO덕분에 확진자 수가 점점 줄어 말레이시아의 코로나는 안정권에 접어드는 듯 보였습니다. 이제 곧 끝나겠구나! 기대를 품었지만, 마지막 한 방을 크게 먹었네요. RMCO(Recovery Movement Control Order) 심지어 8월 31일까지!!!


물론 '회복' 기간이기 때문에 거의 대부분의 가게는 문을 열고,

드디어! 7월 중으로 아이들도 온라인 수업을 멈추고 학교에 가게 됩니다!

식당들도 활기를 되찾았고요.

다만 마스크 착용은 기본이며, 어딜 가든 체온을 재고, 큐알코드를 찍거나 이름과 전화번호를 남겨야 합니다.

귀찮긴 하지만 그래도 돌아다닐 수 있으니 숨통이 조금 트이네요.




물론 저는 그렇게 많이 답답하지 않았습니다.

원래 혼자 일하는 데다가 자주 돌아다니는 스타일도 아니었으니까요.

다만 종종 카페에서 작업하던 즐거움을 누리지 못했지요. 오직 집에서만 작업해야 했으니까요.


안 그래도 집에서는 집중이 잘 안 되는데, 세상에, 식구들까지 집에 다 있어요.

두 끼 밥을 꼬박꼬박 차리며 때마다 모여 밥을 먹었죠. 덕분에 매일 얼굴을 보면서요.

그만큼 단순했던 시절은, 아마 살면서 다시 오지 않을 것 같아요.

일어나서 운동하고, 일하고, 밥해먹고, 다시 일하다가, 또 밥해먹고, 뒹굴거리다 자는 삶.


온 도시가 멈춘 것 같았지만,

사실 아이는 온라인 수업을,

남편도 온라인으로 일을,

저도 늘 그렇듯 번역을 했습니다.

수면에 떠 있는 백조처럼, 나름대로 열심히 각자의 자리에서 발을 굴리고 있었죠.



그렇게 지겹도록 집에서 일만 하던 저는,

배달만 가능하던 카페에 자리 잡고 앉아 커피를 마실 수 있게 되자마자!

식구들을 피해 작업을 하러 갔습니다. 아! 제대로 내린 커피가 얼마나 맛있던지요!

역시 집중도 잘 됩니다! 이제야 일 좀 하는 것 같고요.

오래 앉아 일했지만 손님은 저 혼자였어요. 직원들만 일없이 수다를 떨거나 괜히 서성였고요.



며칠 후,

또 같은 카페를 찾았습니다.

그날은 유난히 카페가 북적였어요.  

커다란 테이블에 대가족이 모여 경쾌하게 웃고 있었고,

한쪽 테이블에서는 익숙한 모국어도 들렸습니다.

아이를 데리고 온 엄마는 야외 테이블에 앉았네요. 엄마는 커피를 마시고 아이는 스티커를 붙입니다.

늘 마시던 커피를 시키고 노트북을 켜느라 부산한데, 저 멀리서 한 무리 사람들이 빵! 하고 큰 웃음을 터트립니다.


그런데 갑자기 마음 한쪽이 찡해졌습니다.


그래 그런 거였지.

저게 바로 일상이었지.

싶어서요.  


코로나 시대에 유독 귀해진 만남과 웃음과 맨얼굴, 그런 것들로 이루어진 일상이 다시 돌아온 것 같아서요.


어차피 혼자 일하니 MCO 든 RMCO 든 달라진 게 없다고 생각했는데,

카페에 와서 그 웃음소리를 들으니 알겠어요.

그들의 다정한 모습도 내 일상의 일부였다는 걸.

사람들의 수다와 웃음소리, 사부작사부작 발걸음 소리, 커피콩 가는 소리, 옆 테이블의 포크와 나이프 소리, 그 모든 소리가 내 일상의 일부였고, 내 작업의 배경이었다는 걸 말이에요.


아무도 없는 카페 역시 고요하고 좋았지만,

이렇게 시끌벅적한 카페가 더 반갑고 귀합니다.

일상이 돌아온 것 같아, 좋았습니다.




자, 다시 위의 책으로 돌아옵니다.

우리의 주인공은 그 키스와 함께 2차 대전이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그 웃음소리를 들으며 생각했습니다.


드디어 (우리 동네의) 코로나도 끝났(으면 좋겠)다!!




(물론 세계 곳곳에서 아직 많은 사람들이 코로나와 싸우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압니다.

저도 끝났다고 생각하지 않고 개인위생을 철저히 지킬 거고요)  


조호바루에 이렇게 평화로운 일상이 조금이라도 돌아온 것에 감사하며,

전 세계에 이와 같은 평화가 깃들길 기원합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바다 건너 책이 온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