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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리 Oct 19. 2019

바다 건너 책이 온다

 


책!   그놈의 책!   무거운 책!

이사를 갈 때마다 외쳤지만 책은 줄어들 줄 몰랐습니다.


아이가 돌 때부터 사들이기 시작한 책이 벽면을 가득 채웠고,

다 읽은 책들을 팔고 또 사면서 집에는 늘 책이 있었지요. 아주 많았지요.


벽면을 차지한 커다란 책꽂이 맨 위에는 결혼 전부터 갖고 있던 책,

중간에는 아이가 혼자 꺼내 가져오기 무겁지 않은 책, 가장 잘 보던 책,  

아래쪽에는 신나는 노래를 지치지도 않고 부르는 사운드 북, 분명 책인데 꺼내서 펼쳐보면 커다란 농장이 되는, 혹은 화려한 성이 되는 팝업 북, 같은 키로 나란히 선 전집, 전집임에도 제각각 크기가 다른 전집이 발랄하게 꽂혀 있었어요.


 

그 많은 책들을 껴안고 우붓로 이사를 결심했지요.

팔고, 나눠주고, 고르고 골라 가져 가려고 담은 책들이 가장 큰 우체국 박스로 (20킬로그램까지 넣을 수 있는 사이즈) 열다섯 개가 넘었어요. 대부분 아이 책이었지만 어른의 책도 신중하게 골라 넣었어요. 


배를 타고 두 달이 꼬박 걸려 받은 책들은 모서리가 찌그러진 채,

오래 상자에 담겨 퀴퀴한 냄새를 품고 열대의 나라에 도착했습니다.


그렇게 싸온 책들을 우붓에서 부지런히 읽고, 동네 아이들과 골고루 나눠 읽다가 다시 조호바루로 이사를 가게 되었어요.


어느새 아이는 자라 그렇게 많은 책은 필요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속 시원한 마음으로 책들을 분양했지요.

어른의 책도 심혈을 기울여 선별해 조호바루로 가져왔고요.  

이번에는 커다란 상자 두어 개로 끝났습니다. (상자가 좀 컸거든요.)


언제든 훨훨 떠날 수 있도록 가볍게 살자고 다른 살림은 좀처럼 늘리지 않지만,

책 욕심은, 그렇게 무거운 걸 떠메고 다니면서도

좀처럼 버려지지 않아요.




해외살이에서 가장 아쉬운 건 아무래도 책. 


늘 가던 집 근처 교보문고와 그 가운데 아늑하게 자리 잡은 일리 커피숍,

궁금했던 책을 들고 와 조심조심 넘겨보며 읽고 고를 수 있었던 시절이 그리워요.


울적할 때 서점만 거닐어도 차분해지며 금방 나아지던 그 기분.

커피를 마시며 책장을 넘기다 보면, 그래도 이만하면 괜찮다 싶은 마음이 살짝 들기 시작했고,

마음에 쏙 드는 책을 사서 나서면 그 순간만큼은 세상 부러울 게 없었거든요.


그런 낭만의 부재. 해외살이의 가장 큰 아쉬움이네요.  


이곳에도 물론 서점이 있지만, 비닐로 꽁꽁 싸여 있는 영어책, 중국어 책, 말레이어 책으로는 좀처럼 그런 낭만이 생기지 않아요.  

모국어로 쓰인 아름다운 글들이 나를 압도할 만큼 쌓여있던 한국의 서점, 이어야만 하지요.  


가끔 한국에 갔다 올 때는 가장 많은 책을 가져올 수 있는 짐 싸기 기술이 필요해요.

커다란 캐리어에도 책을 넣지만 무게 때문에 한계가 있거든요.

결국 어깨에 매는 배낭에 가장 많은 책을 넣을 수밖에 없지요.

전기밥통도, 압력솥도 가지고 다녔던 배낭이 역시 최고랍니다.

그렇게 어깨가 빠져라 배낭에 책을 집어넣고, 깃털만큼 가볍다는 자세로 무게 재기의 순간을 모면해요.

무사히 게이트 앞까지 가서야 한숨을 몰아쉬며 아픈 어깨를 주무르고 가슴을 쓸어내리지요.

그렇게 힘들게 가져온 책을 마침내 집에서 꺼내는 순간,

마지막 퍼즐을 끼워 맞춘 뿌듯한 마음이 차오릅니다.


그렇게 갈 때마다 싸매고 와도,

책은 무럭무럭 자라 버리는 아이와 같아서,

금방 새 옷이 필요해지는 아이와 같아서,

늘 새로 읽어야 할 책이 생기지 뭐예요.  


다행히 아이의 책 읽기는 양의 시기에서 질의 시기로 넘어갔습니다.

그만큼 많은 책이 필요하지 않게 되었지요.

어른의 책에 조금 더 신경을 쓸 여유가 생긴 것이고요.


아쉬운 대로 이북을 다운로드하여 읽어요. 요즘은 밀리의 서재도 이용하고요.

하지만 이북과 밀리로도 해결되지 않는 실물 책에 대한 갈증은 분명 있답니다.

때때로 한국에서 책이 날개를 달고 펄럭 펄럭 날아오는 상상을 해요.

인터넷에서 다운로드되는 책 말고, 진짜 책이 훨훨 날아온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물론 1분이면 이북을 다운로드할 수 있는 지금도 감지덕지긴 해요.

우붓에서는 이북 다운로드하기도 쉽지 않았거든요. 모래시계는 하루 종일 빙글빙글 돌다 결국 실패해요.

인터넷 환경이 그랬어요. 책 한 권 다운로드하려면 인터넷이 빠르다고 소문난 시내 카페를 찾아야 했어요. (우붓이 시골 마을이라 특히 더 그랬을 거에요. 지금은 그때보다 인터넷 환경이 많이 좋아졌다고 하고요.)  


다행히 조호바루는 우붓보다 어찌나 발전되었는지, 인터넷 속도가 만족스러워요. 1분이면 한 권이 뚝딱 다운되거든요! 그래서 게걸스레 이북에 빠져들었답니다. 밀리의 서재와 함께 말이에요.  


그래도! 종이책을 넘기는 느낌, 책마다 다른 크기와 질감과 무게. 손에 착 달라붙는 그 느낌은 아쉽고 또 아쉽기만 하지요. 정신이 피폐해지면 새 책에 코를 박고 종이 냄새를 맡고 싶어요. 연필을 들고 밑줄도 좍좍 긋고 싶어요.

그래야 헝클어진 마음이 가지런히 그어진 밑줄처럼 술술 풀리거든요.

눈이 아니라 손으로 읽고 싶어요!


그런데 조호바루에는, 주소가 있어요!  

정확해요. 우편물도 재깍재깍 도착해요!


아니, 그럼 주소가 있지, 없나고요?


우붓에는 주소가 없었거든요!

우붓은 주소가 없어서 우편물이 '어느 동네 마데네 집' 혹은 '마데네 옆집에 새로 이사 온 한국 아줌마네 집' 등으로 배달되었어요. 간혹 못 찾겠으면 아무나 붙잡고 '어느 동네 누구가 누구요?' 물어보지요. 그럼 '아 그 누구네 옆집에 사는 누구'라고 알려주고요. (지금은 나아졌을 거예요)


물론 한국에서 보내는 짐이 중간에 사라지기도 하고, 새 물건들이 많으면 세금 폭탄을 맞기도 해요.

집에 도착한 박스는 처참한 몰골이지요. 전부 풀어보고 다시 집어넣어 붙인 꼴이 선명해요.

상황이 그래서 우붓에서는 책을 배달받을 생각을 하지 못했거든요.

소중한 책이 분실되면 어떡해! 그래서 해외 배송은 꿈도 안 꿨는데!


조호바루에서는 한 번 해볼 만하다 싶었어요.

이북으로 갈증이 해소되지 않을 때, 진짜 책이 정말로 아쉬울 때,

집에 있지만 아직 읽지 않은 새 책이 아니라 갓 나온 신간이어야만 할 때!  그럴 때 말이에요.


배송비가 저렴하지 않지만 그래도!

한국만큼은 아니지만 빠르고 정확하게 배달되는 곳! 

감동이지 뭐예요. 


물론 배보다 배꼽이 더 큰 배송비 때문에 자주 하기는 힘들어요.

그래서 장바구니에 책을 쌓으며 다음 시기를 조율하고 있었는데!



친구가 놀러 오기로 했어요!

2박 3일의 짧은 일정인 만큼 짐도 없이 단출하게 올 예정인데 책을 부탁했더니,

세상에 열 권이나 가져다줄 수 있다지 뭐예요? 가만히 앉아서 책을 열 권이나 받게 되다니!

그래서 장바구니에 쌓인 책들 중 고르고 골라 (너무 무거울까 봐) 일곱 권의 제목을 설레는 마음으로 적어 보내 주었어요.



그리고 며칠 후, 친구에게 문자를 받았어요.

 


책 다 샀다.


정말 오랜만에 어른 책을 고르는 것이


눈물 나게 감동이었어.



아! 그랬구나! 그 마음 너무 잘 알죠.


우붓으로, 조호바루로 이사를 다니면서도 무조건 아이 책이 우선이라 눈물을 머금고 내 책들을 보내봤으니까요. 오래간만에 한국에 나가도 아이가 지금 읽어야 할 책, 아이가 곧 읽어야 할 책, 아이가 나중에 읽어야 할 책 등으로 가방을 먼저 채우면서 내가 읽고 싶은 책들은 외면하고 포기했으니까요.


나는 이제 그림책, 팝업책, 소리 나는 책들을 졸업하고 과감하게 내 책만 주문해도 되는 시절을 맞았는데!

너는 여덟 살, 네 살 공주님들과 지금 그 시절을 겪고 있구나!


친구는 내가 부탁한 책의 목록을 들고,

내가 그리워하는 서점에 가서,

유아 아동 코너 대신 인문 예술 에세이 코너를 천천히 거닐며 

내가 적어준 책들을 찾아 쓰다듬고 계산했겠지요.

그리고 무겁게 들고 오겠지요.



책을 받을 생각에 심장이 쿵쿵대는데,

선물을 받기도 전에 주는 사람이 감동부터 해버린,

참 이상한 일이네요.



책이 옵니다. 멀리 바다 건너 어른의 책이 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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