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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리 Sep 22. 2019

도시 산책자, 플라뇌르가 필요하다

일주일 중 가장 좋아하는 날은 언제인가요?

토요일? 아니면 금요일 밤?

저는 일요일입니다. 특히 일요일 오전.

식구들이 다 나간 후의 고요한 일요일 오전을 사랑합니다.


느지막이 일어나 고양이 밥도 느릿느릿 주고 커피도 정성스럽게 내려 마십니다.

책도 읽고 글도 쓰고 밀린 일도 하면서 뒹굴거리다 지루해지면 집 앞 카페로 갑니다.


집에서 이미 마셨지만 그래도 따뜻한 카페라테를 시킵니다. 남이 해준 건 뭐든 더 맛있는 법이잖아요.

집에 마땅히 먹을 게 없다면 빈속으로 와서 푸짐한 음식도 시킵니다.

사실, 일요일 오전에는 가능하면 냉장고 문을 열지 않으려고 해요.

그 안에 무엇이 들어있든 내 알 바 아니다! 외치고 싶거든요.

물론 식구들이 모이는 저녁에는 열어야 하지만요.


그렇게 오늘도 단골 카페에 와서 앉았습니다.

늘 그렇듯 이곳은 북적북적합니다.

매번 같은 사람들이 모이는 이 카페에 오늘은 새로운 사람들이 많네요.

이곳 조호바루에도 외국인 비율이 꾸준히 늘고 있거든요.  

한국 사람도 많아지고 머리색도 점점 다양해집니다.

그 변화가 반갑습니다.

도시가 좀 활기차질 것 같아서요.

아니, 간절히 바라거든요.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생기는 활기가 이곳에도 생겨나길요.


하지만 바람과 다르게 이곳은 참 차분합니다. 특히 제가 사는 동네는요.

이유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여기 사람들, 걷지 않아요.



1800년대, 파리 개발 사업이 진행되면서 멋진 건물들이 들어서기 시작했습니다. 중세의 좁은 길들도 넓고 쾌적해졌죠. 덩달아 고급 카페와 술집, 레스토랑 등이 생기면서 도시는 활기에 차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새로 탄생한 도시를 활보하며 구경하는 사람들을 보들레르는 플라뇌르 Flâneur라고 칭했습니다.

도시 산책자들이죠. 도시의 활기는 그들이 만든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이곳은 그렇게 걸으며 활보할 수 있는 곳이 거의 없습니다.

 

더운 나라이기 때문일까요? 그래서 걷지 않는 걸까요?

하지만 이웃나라 싱가포르에는 그래도 '인도'가 있습니다. 걷는 사람들도 꽤 많고요.


이곳은 기본적으로 인도가 없어요.

차도가 뻥뻥 뚫려 있고, 군데군데 주택 단지나 아파트가 있고, 근방에 상가가 있다고 해 봐요.

상점들이 모여있는 구역에 일단 들어서면 그나마 걸을 수 있지만, 그래도 차를 타고 먼저 그곳까지 가야 합니다.

물론 걸어서 갈 수는 없어요. 도시 전체를 촘촘히 이어주는, 사람이 걸을 수 있는 길은 없으니까요.

그래서 무조건 차로, 혹은 오토바이로 움직이는 편입니다. 대중교통도 몹시 빈약하고요. 뚜벅이 족이 생길 수가 없어요.

걷기 자체가 목적이라면 달밤의 단지 내 산책로를 빙빙 돌아 걸을 수 있지만,

목적지를 향해 걷기, 는 불가능해요.


그래서 도시 자체가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는 것 같아요.

에어컨이 빵빵 나오는 쇼핑몰 내로 들어가면 그제야 아, 사람들은 전부 여기 모여 있었구나, 하지요.


 

도시의 활기가 그립습니다.  

20분 정도 걸리면 그냥 걸어가지 뭐.  혹은

지하철 한 정거장 정도 미리 내려서 걷자! 하면서  

가는 길에 새로 생긴 가게도 구경하고,

길거리에서 떡볶이도 사 먹고,

편의점에서 동네 엄마도 만나고,

문방구 앞에서 아이가 오락기를 쳐다보며 발걸음을 멈추기도 하는, 그런 활기가요.


사랑하는 사람과 손을 잡고 벚꽃 아래를 걷거나,

노란 낙엽이 카펫처럼 깔린 길을 아이와 함께 감탄하며 걷는, 그런 낭만도 그립고요.


걸으면서, 파리처럼 길거리에서 오래된 책을 파는 할아버지들도 만나고

시드니 서큘러키처럼 온갖 기묘한 서커스를 하는 예술가들도 만나고,

맛있어 보이는 카페나 식당도 발견하는 그런 재미가 이곳에도 필요해요.  


하지만, 전 세계에서 재미있는 사람들이 아무리 모여도,

걸을 수 없는 도시라면 그들의 활기를 받아들이는데 한계가 있을 거예요.

개개인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도시 설계의 구조적 문제겠죠.



아기자기 예쁜 가게들 촘촘한 서울의 뒷골목이,

사람들 틈에 밀려 걷던 종로가,

울창한 가로수 밑에서 아이들이 재잘대던 도서관 옆길이 유난히 그리운 날이네요.


그래도 걷고 싶으면 운동화를 신고 단지 내 산책로를 걸을 수밖에요.

북적한 인파가 주는 활기, 플라뇌르들이 주고받는 에너지는 느끼지 못하겠지만요.  


도시 산책자들의 에너지가 그리운 이곳은, 일요일 오후의 조호바루입니다.


 

낮과 밤의 단지 내 산책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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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by Robin Benzrihem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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