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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리 Sep 18. 2019

달은 차고 나는 걷는다

 

다시, 운동화 끈을 매었습니다.

달밤의 집 앞 산책로를 걷기 위해서지요. 상태가 좋을 때는 10킬로미터도 거뜬히 달리던 길이었는데

며칠의 게으름이 한 달이 되고 두 달이 되어 버려, 어느새 몇 분도 달리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한동안 쉬었던 길을 다시 걷기 시작했습니다.  

욕심을 버리고, 다시 걷기부터요.

 

새까만 열대의 밤하늘에 손톱 모양 초승달이 걸려 있었습니다.

귀뚜라미는 뚜루루루 울고, 나뭇잎은 발아래서 바스락바스락 깨어납니다.

순찰하는 경비 아저씨의 오토바이가 잊을만하면 한 번씩 털털털 지나갑니다.


열대의 뜨거운 낮이 가고 서늘한 밤바람이 붑니다.

스쳐 지나가는 바람처럼, 머릿속에서 생각도 부지런히 왔다 갑니다.

오면 오는 대로, 가면 가는 대로 두서없이 둘 밖에요.


바람도 왔다 가고, 생각도 왔다 가는데, 변하지 않는 것은 부지런히 땅을 딛는 두 발뿐입니다.

아, 하늘에 걸린 초승달도 그대로군요.

적어도 오늘 밤은, 지금 걷고 있는 한 시간은 그대로일 것입니다.


꾸준히 걷고 싶었으나,

기대했던 일이 수포로 돌아가고 나니 바로 일상부터 무너지더군요.

무너져버린 일상이 어느새 두 달이 되어버렸습니다.

운동화는 내팽개치고 밤마다 맥주캔만 붙들었습니다.


그렇게 두 달을 무기력하게 보내고, 맞는 바지가 겨우 하나 남았을 때,

다시 운동화를 신었습니다.


후후 후후, 걷기만 하는데도 숨이 차더군요.  어떻게 달렸는지 모를 정도로 말입니다.

안 쓰던 근육들이 다시금 존재를 알립니다. 반갑게 인사했습니다.


그렇게 한 발 한 발 걷다 보면 드나들던 생각도 어느새 달아납니다.

아무 생각 없이 걷게 됩니다. 미련도 괜한 희망도 어느새 사라지고 없습니다.

절로 명상이 됩니다.   


그렇게 며칠 째 걷다가,

어느 순간, 깨달았습니다.

아, 내가 다시 바닥을 차고 올라오고 있구나.


다시 몸을 움직여서일까요.

그저 시간이 지나서 일까요.

아니면 내가 받았던 상처가 옅어져서,

혹은 처음부터 별일이 아니었던 거라서 그랬을까요.

어쩌면 전부 다 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이제 더 이상 내려갈 바닥은 없다, 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제 다시 올라가기만 하면 된다, 고 말이죠. 

천천히 살을 찌울 저 예쁜 초승달처럼.


달이 차고 기울듯, 내 인생도 잠시 초승달처럼 홀쭉해졌던 것뿐이라고, 그렇게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매일 걷다 보니, 달은 어느새 딱 자른 반달이 되어 있었습니다.

새까만 하늘에 새하얀 반달이 둥실, 무척 아름다웠습니다.

그 아름다움이 탐이나, 고개가 아프게 반달을 눈에 담았습니다.  


저 달이 보름달이 될 때쯤, 나한테도 보름달만큼 좋은 일이 생기지 않을까.

네, 잠깐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지만 압니다. 좋은 일은 생기지 않을 겁니다.

보름달이 뜰 때마다 좋은 일이 생긴다면 참 행복한 인생이겠지요.

헛된 소망은 집어치우고, 저 달이 보름달이 되는 그날도, 그저 열심히 걷고 있길 바랬습니다.


차고 또 기우는 달처럼 내 삶 역시 기복을 겪지만,

늘 그 자리에 있는 달처럼, 나 역시 매일 그 달빛 아래를 걸을 수 있길 바랬습니다.

달이 차올랐다 다시 기울어질 때에도, 그때도 그 달빛 아래를 걷고 있길 바랬습니다.

다시 초승달을 만날 때까지, 다시 또 반달을, 보름달을 만나는 그 시간 동안 쭉.  


그렇게 부지런히 걸으면 결국 좋은 일이? 네, 압니다. 걷는다고 좋은 일 같은 건 안 생겨요. 그렇죠?

이제 김칫국쯤은 조용히 내려놓아지잖아요. 그렇죠? 심지어 살도 빠지지 않는다죠.



하지만, 적어도 매일 밤 달빛을 받으며 걷는 사람은 되어 있겠지요.

어쩌면 다시 조금 달릴 수 있는 사람이 되어 있을지도 모르고요.

그래요, 우선 단단히 걷는 사람이 되어보려고요. 그거라도 되어보려고요. 




당신 역시 매일 당신이 있어야 할 자리에 단단히, 그렇게 있길 바랍니다.

아, 있어야 할 자리도 좋지만, 있고 싶은 자리라면 더 좋겠습니다.

그런 당신의 달밤을 응원합니다.  


나의 달밤은 지금, 조호바루입니다








Photo by Mitchell Bowser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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