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호바루에서 아침 일찍 비행기를 타고 쿠알라룸푸르에 왔습니다.
오전에 볼일을 후루룩 마치고, 조호바루(=시골)에는 없는 맛있는 초밥으로 배를 채우고, 역시 조호바루(=시골)에는 없는 자라ZARA에 가서 정신없이 옷을 입어보고, 하필 집에서도 맨날 가는 스타벅스에 앉았어요. 몸이 노곤 노곤한 게 카페인이 들어가도 영 효과가 없군요. 멍하니 창밖을 보며, 몇 년 전 나를 보러 여기까지 왔던 친구를 생각합니다.
조호바루에서 출발한 내가 먼저 도착해 숙소에 체크인을 하고 인천에서 출발해 그날 밤에 도착하는 친구를 만났지요.
어서 와! 반가워! 그런데 짐이, 이게 다야?
가볍게 올 거라고 생각은 했는데, 국제선 비행기를 타면서 세상에 에코백 하나 달랑 메고 올 줄이야.
심지어 내가 주문한 책만 일곱 권인데! 너도 참 대단하다! 우선 밥부터 먹자! (=빨리 술이나 마시자!)
한국에서 온 친구에게는 미안하지만, 소주를 마셔야 하니 할 수 없이 한국 식당으로 갔어요. 테이블 위에 반찬이 깔리기도 전에 시원한 소주를 따 우선 들이부었죠. 허겁지겁 목을 축이며 그동안 못다 한 이야기를 와다다다 털어놓았습니다. 배는 찼고 소주는 비어갔어요. 젓가락 속도는 늦어지는데 밤은 걸음을 재촉합니다. 그 자리에서 밤새라도 이야기할 수 있었지만 하는 수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 편의점에 가서 맥주를 사고 (그녀에게) 이국적인 과자도 사고, 식당에서 못했던 카랑카랑 추임새를 한 옥타브 높여 넣으며 못다 한 대화를 이어나갔습니다.
어머나!
세상에!
나쁜 X!
이런 ***!
그렇게 밤을 가르며, 우리가 술을 먹는지, 술이 우리를 먹는지.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니 방안에 술냄새와 탄 냄새가 진동해요.
지난밤, 컵라면을 끓인다고 전기 주전자에 물을 넣고 그걸 인덕션 위에서 끓인 거에요. 전기 주전자 밑바닥이 쭈굴탱탱 오그라드는 것도 모르고 술잔만 부딪치고 있었어요. 그러다 화들짝 놀라 환기를 시킨다고 시켰는데 여전히 탄내가 가득한 거지요. (그거 물어주느라 거금 깨졌어요. ㅜ)
눈을 비비고 밖으로 나가 국물 요리를 찾아서 대충 해장을 했어요. 달아난 정신을 되찾기 위해 안 마시던 아아를 마시는데 카페인도 납덩이같은 피로 앞에서 맥을 못 추네요. 발을 질질 끌며 숙소로 돌아가 동시에 쓰러지듯 잠이 들었어요.
점심때쯤 되었을까. 다시 일어나 이번에는 쇼핑센터로 향했죠. 친구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알록달록 예쁜 쓰레기들을 한 아름 사서 에코백에 넣었고, 나를 늘 ‘베로니카야’라고 부르시는 엄마 드린다고 샤넬 립스틱도 하나 샀어요. 그리고 또 뭘 샀게요?
팬티를 샀어요. 내 책은 사 오면서 지 팬티는 안 가져왔다지 뭐에요. 그런데 팬티가 1+1도 아니고, 2+1도 아니고, 2+3이 아니겠어요? 그래서 똑같은 팬티 다섯 장을 받은 그녀가 이렇게 말했죠. ‘두 개는 너 입어라.’
해가 지면서 뜨거운 공기에 힘이 빠졌어요. 열대의 나라에서도 오들오들 떨게 만드는 지나친 에어컨을 피해 나와 힘 빠진 거리를 조금 걸었어요. 그렇게 걷다 보니 바깥에서 맥주 마시기 좋은 펍이 줄줄이 있는 곳으로, 발은 어떻게 알고 가는 걸까요? 쿠알라룸푸르 지리는 1도 모르는데? 어쨌든 우리는 횡재했다며 어제 술 안 마신 사람들처럼 또, 맥주부터 시작했어요.
어젯밤 침대에 누워 잠이 드는 순간까지, 그리고 오늘 낮에 팬티를 사면서도 쉬지 않고 나눈 이야기들은 점점 깊어지고 넓어졌어요. 찬란했던 과거가 되살아나 뜨거운 공기처럼 팔뚝에 달라붙어 있었고, 어설픈 현재가 비행기를 타고 따라와 귀신처럼 머리 위를 유영했어요. 답답한 미래가 갑자기 쏟아지는 스콜처럼 따갑게 피부를 때렸죠. 우리는 각자의 짐을 등에 얹고 각자의 시기를 치열하게 통과하고 있었어요. 그러다 하나는 인천에서, 하나는 조호바루에서 비행기를 타고 쿠알라룸푸르에서 만난 거에요.
두 번째 날 밤은 억수처럼 비가 내렸어요. 노천 테이블 위의 목소리들을 천둥 같은 빗소리가 다 잡아먹었어요. 빗소리보다 더 크게 소리치듯 이야기하다가, 마침내 쏟아낼 만큼 쏟아냈는지 둘 다 한동안 말없이 가만히 앉아 있었어요. 바닥으로 내리 꽂히는 빗줄기가 감옥 창살처럼 굵었어요. 각자의 집에서 멀리 떠나왔지만 그래 봤자 감옥에 갇힌 신세였던 것일까요. 우선은 그 안에 가만히 앉아 있어야만 하는 것일까요. 그러다 비가 그쳤고, 여전히 한두 방울 떨어지는 비를 맞으며 축축한 마음으로 숙소에 돌아와 잠이 들었어요.
세 번째 날 아침.
헤어질 시간은, 한 번 문이 닫히면 절대 열어주지 않는 보딩 게이트처럼, 칼 같이 다가옵니다. 시내에서 공항으로 가는 기차를 타고, 다 쏟아내 텅 빈 상태로 바깥을 보며 아직 옆에 앉아 있는 그녀를 벌써 그리워했어요. 국내선인 내가 먼저 내렸고, 그녀는 조금 더 달려 국제선 터미널로 갈 테지요. 잠시 멈춘 기차에서 뜨거운 포옹을 짧게 했어요.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작은 비행기에 새근새근 술냄새를 풍기며 유리창에 머리를 박고 생각했어요.
이런 친구가 있으니, 되었다.
아이가 속을 썩여도, 남편이 마음을 몰라줘도, 왔다가 가는 인연들의 부침이 힘들어도, 그래도 너 하나 있으니 되었다고 말이에요. 쌍둥이처럼 붙어 다니기도 했고 일 년 이상 떨어져 있기도 했지만, 탱탱하게 늘어났다가 또 착! 하고 달라붙는 고무줄처럼, 그렇게 25년 동안 서로의 곁을 지켰습니다.
아, 생각하니 보고 싶네요.
그래, 때가 되기도 했지요.
삼엄했던 코로나 시대도 끝나고 마침내 국경이 열렸으니까요!
그녀가 오면 팬티를 다시 들려 보내야겠어요.
‘야, 난 작아서 불편하더라. 한 번밖에 안 입었어. 하나는 아직 새 거니까 도로 가져가. 너 그 팬티 좋다며.’
그렇게 친구를 생각하다 보니 벌써 시간이!
커피도 다 마셨으니 자라에서 찜해 놓은 옷 얼른 사서 공항으로 가야겠어요.
안녕, 쿠알라룸푸르.
다음에는 또 친구랑 올게.
그땐 더 좋은 날씨 부탁해!
Photo by Izuddin Helmi Adnan on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