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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리 Jun 20. 2022

싱가포리안 나이트




저는 말레이시아 반도 남쪽 끝, 조호바루라는 곳에 살아요. 그런데 여기는 인도가 잘 없어요. 차도 중심 도시랄까요. 한국에서는 걸어서 한강도 건너고 체력만 좋으면 서울 끝에서 끝까지도 걸어갈 수 있잖아요. 그런데 여기는 모든 곳이 섬처럼 존재해요. 다른 동네로 가려면 반드시 차를 타고 이동해야 해요. 버스도 없어요.  


그러다 보니 걷는 행위와 이를 통해 느낄 수 있는 몸과 마음의 역동이 몹시 그리워요. 주택 단지 안의 고요한 산책길을 걸을 수는 있지만 도시 산책자 플라뇌르는 될 수 없는 거죠. 타인의 존재가 주는 그 북적한 느낌, 타인의 존재로만 완성되는 도시의 익명성은 느끼기 힘들어요. 그게 아쉬워요. 혼자이면서도 함께인 느낌, 함께이면서도 혼자인 바로 그 느낌이 말이에요.


그런데 아주 오랜만에 밤의 도시를 걸었지 뭐예요. 이름하여, 싱가포리안 나이트. 조호바루에서 다리 하나 건너면서 여권에 도장을 두 번 쾅쾅 찍으면 바로 싱가포르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국경을 넘어 매일 출퇴근을 하던 그 다리가 코로나 시절 내내 닫혀 있다가 다시 열리기 시작했거든요. 그래서 콧바람을 쐬러 싱가포르에 다녀왔습니다.


호텔에 짐을 부리고 바깥으로 나서니 각국의 다양한 음식 냄새가 둥둥 떠다니는 넉넉한 인도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길을 걷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조호바루에서는 막 차에서 내려 건물로 들어가는 사람들, 막 건물에서 나와 차를 타러 가는 사람들이 전부였는데, 싱가포르에는 길을 걷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목적지를 향해 두 발로 걸어 이동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낮에 뜨겁게 데워진 공기가 아직도 밤공기에 얹혀 있었고, 가로등 불빛과 건물 창에서 나오는 불빛이 초록 잎사귀에 반짝이를 뿌리는 그 풍경 속에서 사람들 틈에 섞여 함께 걸었습니다. 구글맵을 켜 목적지를 검색한 다음 자동차 모양 대신 걷는 사람 모양을 클릭하는 경험, 걸으며 가게도 구경하고 앞서 걷는 사람 마주 걷는 사람도 구경하고, 남들은 무슨 신발을 신고 있나 무슨 옷을 입고 있나 쓰레기통은 어떻게 생겼나 나무들은 어떻게 다른가, 이 모든 걸 이동하며 구경할 수 있다는 게 참 신선했습니다. 조호바루에서 이동하며 볼 수 있는 거라곤 남들은 무슨 차를 타나 밖에 없었거든요. 아, 구름과 하늘 빼고요. 


도시를 걷는 밤은 가족들 없이 혼자 보내는 자유 부인의 밤이기도 했습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멋진 레스토랑에서 파스타 한 접시와 칵테일 한 잔을 주문했습니다. 감바스 알리오 올리오를 포크에 돌돌 말아 느긋하게 먹고 빨간 체리가 꽂힌 푸른색 칵테일을 마시며 창밖의 걷는 사람들을 구경했습니다. 그리고 2차로 갈 근처의 바 bar를 검색했습니다. 지도를 켜고 목적지를 향해 밤의 도시를 걸었습니다. 신호등은 빨간 옷과 파란 옷을 부지런히 갈아입었고 노천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의 목소리가 지나가는 자동차 소리에 섞여 밤하늘로 날아올랐습니다. 그렇게 사람들을 구경하며 목적지에 도착해 긴 손잡이가 달린 나무 문을 열자 완전히 다른 세상이 나타났습니다. 열대의 나른한 밤에서 갑자기 시끌벅적 살아있는 밤의 세계로 들어선 느낌, 혹은 지나가버린 나의 청춘으로 되돌아간 느낌이었달까요. 앗, 그런데 자리가 없네요. 잠시 자리를 찾아 기웃거리다 포기하고 나갈까 하는데 바텐더가 출입문 바로 앞에 등받이 없는 간이 의자를 내어주며 앉으라고 합니다. 그래서 누가 들어오면 바로 제 등을 바라볼 수 있는 자리에 앉았습니다. 시끄러운 음악을 뚫고 바텐더에게 버번 콕을 달라고 외쳤습니다.


좁은 실내는 살아있다 못해 폭발하는 밤의 세상이었습니다. 쩌렁쩌렁 울리는 음악소리, 꽉 들어찬 사람들이 질세라 높이는 목소리들, 부딪치는 몸들, 분주한 바텐더들, 와인병, 정종병, 맥주병들이 사이좋게 뒤섞인 높은 바 테이블 주위로 앉은 사람들과 선 사람들이 꽉꽉 들어차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마스크를 쓰고 있지 않네요! 직원 한 명만 마스크를 쓰고 있었고 저 포함 두 명만 턱에 마스크를 걸치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갑자기 과거로 시간 이동을 한 것처럼요. 그래요, 이게 원래 우리 모습이었죠.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말이에요. 그리고 추억에 젖어 얼굴을 훤히 드러낸 사람들을 구경하기 시작했습니다. 역시 조호바루보다 사람들이 쌔끈해! 하면서 말이에요. 시골에서 상경한 촌사람의 눈빛으로 말이에요. 


사람들 구경하기는 제가 가장 잘하고 또 좋아하는 취미 중 하나인데요. 가끔 너무 빤히 쳐다봐서 아이가 그만 좀 보라고 팔을 툭툭 치기도 합니다. 다민족 국가답게 중국계 인도계 말레이계가 적당히 섞여 있었고, 아시아의 허브답게 저 멀리 서쪽에서 온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저마다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뭐가 그리 재밌는지 깔깔깔 난리도 아니더군요. (쳇, 나만 혼자야)


그렇게 사람들을 관찰하고 있는데 갑자기 뭐랄까, 자의식이 똘똘 뭉쳐 고개를 쳐드는 겁니다. 갑자기 사람들의 시선이 의식되는 겁니다. 옆에 누가 있든 없든 어디서든 하고 싶은 거 다 하는 편이고 누가 나에 대해 뭐라고 생각할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편인데 말이에요. 아, 물론 이만큼 나이를 먹어 쌓인 내공이긴 합니다. 젊었을 때는 누구나 어딜 가나 남의 시선을 조금씩은 의식하잖아요. 사춘기에 시작되는, 세상 사람들이 다 나만 봐!라는 생각이 이십 대까지 이어지기도 하고요. 코로나 이전으로 시간 이동을 했나 싶었는데, 갑자기 이십여 년을 더 거슬러 과거에 도착해 버렸습니다. 순식간에 사람들을 구경하는 내 모습이 어떻게 보일까 의식하며 앉아 있는 지질한 청춘이 되어버렸습니다. 게다가 며칠 전 앞머리를 자르다가 몽실 언니가 되어버린 내 모습을 생각하니 몸이 베베 꼬이면서 몹시 불편해지는 게 아닙니까. 하지만 난 발리에서 산 멋진 스카프를 두르고 있잖아. 다리를 바꿔 꼴 때 잘못하면 팬티가 보일만큼 짧은 검은색 청치마도 나쁘지 않아. 상의가 흘러내려 어깨가 살짝 드러나는 것도 괜찮고. 그렇게 혼자 왔지만 청승맞아 보이지는 않는, 살짝 멋있는 여자처럼 보이기 위해 가만히 앉아서 내적으로 최선을 다했습니다. 하지만 나는 볼 수 없지만 남들은 다 볼 수 있는 그 몽실언니 머리만 생각하면 몹시 낭패감이 들면서…….


그렇게 쓸데없는 타인 의식과 내적 좌절을 반복하다 마침내 정신을 차렸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저쪽 테이블에 앉아 있던 잘생긴 남자가 다가와 빤한 말을 걸었고, 그래서 자유 부인은 그날 밤, 넘어서는 안 되는 선을 넘고…, 뭐 그런 일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일행과 소리 높여 떠드느라 바쁘지 나를 보고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으니까요. 그저 다시 스무 살이 된 것처럼 사람들을 의식하던 과거의 내가 다시 나타나 그 자리에 앉아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싫지만은 않더라고요. 그런 지질했던 시절조차 반갑더라고요. 그렇게라도 젊음을 다시 느낄 수 있어서 좋더라고요. 그렇게 마흔 넘은 아줌마가 시끌벅적한 술집에서 지가 스무 살 청춘인 줄 알고 어쩔 줄 모른 채 앉아 있었습니다. 그때는 뭐가 그렇게 다 어려웠는지, 무슨 고민이 그렇게 많았는지, 그 청춘을 지나온 내게 애썼다 말해주고 싶더군요.


그리고 주문한 버번 콕이 나왔는데! 시커먼 게 아니라 허여 멀 건한 게 나온 겁니다. 혹시 잘못 가져왔나 싶어 이게 뭐냐고 물어보니, 버번 콕이라며 짐빔 병까지 친절히 들어 보여주는데! 아니, 그런데 색이 왜 이러냐고요. 흠, 의심의 눈초리로 우선 한 모금 쭉 빨아보니, 세상에나 이렇게 싱거울 수가 없는 겁니다!!! 이건 콜라도 아니고 맹물도 아니고 뭣도 아니여! 내가 여기저기서 버번 콕 좀 많이 마셔본 여잔데, 이렇게 맛없는, 아니, 술맛이 안나는 버번 콕은 정말 처음이었지 뭡니까. 짐빔 두 방울 떨어뜨리고 말았구먼! 이런 깍쟁이 싱가포리안들 같으니라고! 좀 싱겁다고 그렇게 열을 낼 일인가 싶다면, 버번 콕은 제게 그냥 술이 아니기 때문이에요. 한 모금 마시는 순간 젊음으로 돌아갈 수 있는 마법의 술이거든요. 알맞은 비율의 그 시커먼 것을 한 모금 마시면 언제든 이십 대 청춘으로 돌아갈 수 있어요. 내 이십 대의 맛. 그보다는 소주를, 맥주를 훨씬 더 많이 마셨지만, 임팩트 있는 한 방은 바로 버번 콕입니다. 용감했던 내게도, 지질했던 내게도 그 시절에는 언제나 버번 콕의 향기가 조금은 배어 있었습니다. 지금도 추억이 그리울 때나 지나가버린 젊음이 야속할 때면 가끔 버번 콕을 마십니다. 그런 버번 콕을, 그렇게 싱겁게 마시며, 자의식에 똘똘 뭉친 이십 대 청춘이 되어 그 출입문 앞에 얼떨떨하게 앉아 있던 싱가포리안 나잇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싱거운 버번 콕도 두 잔째가 되니 결국 알딸딸해지면서 둥둥 떠다니던 생각이 무게를 얹고 가라앉기 시작합니다. 그럼, 나는 지금 여기서 뭘 하고 있나? 이런 질문들이 떠오르죠. 물론 답은 정해져 있습니다. 내게 꼭 필요한 시간이라는 것. 휴가 혹은 일탈. 잠수하다 올라와 숨을 쉬는 시간. 일상에서 벗어나 홀로 고독하게 존재하는 시간. 가족과 함께 있는 것도 즐겁지만 태생적으로 혼자 있을 때 가장 충만해지는 사람으로서 가끔 이렇게 혼자, 과거와 미래로 떠나보는 시간이 꼭 필요하거든요. 자의식에 가득 찬 청춘으로도 돌아가 보고, 백발을 휘날리며 젊은 바텐더에게 버번 콕을 주문해 혼술 하는 할머니도 상상해 봅니다. 그때가 되면 짐빔을 두어 방울 떨어뜨린 것 같은 이 싱거운 버번 콕도 그리워지겠지요. 보는 사람 하나 없는데 혼자 몽실언니 머리를 부끄러워하던 사십 대의 여인이 얼마나 아련할까요. 그때? 젊었지. 애기였어 애기! 하면서 말이에요. 밤의 도시를 걷다가 이상한 술집에 들어가서 과거와 미래로 시간 여행을 했던 그날 밤, 저기 앉은 잘생긴 남자가 내게 다가오거나 그런 일은 전혀 없었던 그날 밤을 떠올리겠지요. 그렇게 혼자 과거와 미래를 넘나들며 바쁜 싱가포리안 나잇을 보냈습니다. 


그러고 돌아오면 현재에 조금 더 집중할 수 있지요. 지금은 무사히 일탈을 마치고 다시 인도도 없는 조호바루로 돌아와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다 쓰고 나면 노트북을 챙겨 들고 밤의 거리를 걸어서 집에 가고 싶지만 차를 타고 돌아갑니다. 조만간 비율이 환상인 버번 콕을 한 번 더 마셔야겠다고 다짐하면서 말입니다. 아니, 아예 한 병을 사서 집에 둬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다시 돌아온 일상, 오늘의 가장 큰 고민은 바로 내일의 도시락 메뉴입니다. 지긋지긋하면서 또 없으면 허전하고 다시 돌아오면 반가운, 그런 일상의 고민이죠. 눈을 감고 싱가포리안 나잇의 흥겨운 분위기를 떠올리며 발은 까딱까딱, 싱거운 버번 콕에 다시 내적 분노를 활활 태우면서, 동시에 머릿속으로 냉장고를 스캔해 메뉴를 정합니다. 시간이 지나면 이런 고민도 그리울 거라는 사실을 현재의 나도 이미 알고 있으므로 그저 감사한 마음으로 고민합니다. 


그렇게 현재와 과거와 미래가 고무공처럼 번갈아 통통 튀며 나의 오늘을 만듭니다.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와 미래의 내가 가장 사이좋을 방식으로 오늘을 살아가려고 애씁니다. 


여러분도 그런 오늘을 보내길 바라요. 


과거의 내가 바라던 오늘, 

현재의 내가 살고 싶은 오늘, 

미래의 내가 그리워할 오늘을 말이에요. 











Photo by Mike Enerio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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