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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리 Jun 29. 2022

소원을 말해봐



No. 11 Jalan Eco Botani */** 

지금 사는 곳의 주소입니다. 조호바루에서 벌써 네 번째 집이고요. 발리에서 세 곳의 집에 살아 봤으니 열대의 나라에서만 벌써 일곱 번째 집에 살고 있네요. 방 한 칸에 소꿉놀이 하면 적당할 것 같은 부엌 달린 집에서도, 서양인들의 키에 맞춰 싱크대와 조리대가 높았던 집에서도, 인자한 부처님이 연못에 발을 담그고 미소 짓고 있는 집에서도, 대문만 나서면 걷기 좋은 산책길이 있는 집에서도 살아보았습니다. 가족들은 모두 지금 집을 가장 좋아합니다. 좁아서 아늑하다나요. 저는 큰 집에 가구는 없어서 휑한, 미니멀리즘이 유난히 강조되는 집이 가장 좋았는데 말입니다. 물건을 여기저기 늘어놓고 아늑하다는 사람들이 잘 이해가 되지 않지만 어쩌겠어요. 미니멀리스트 취향은 제 책상에나 적용해야지요. 아무튼 이사도 쉽지 않은 곳에서 이사를 많이도 다녔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태어나서 스무 살까지는 이사 한 번 가보는 게 소원이었으니 어찌 보면 소원을 이루면서 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방 네 칸이 디귿자로 붙어 있던, 작은 정원에 철쭉과 목련과 봉숭아가 탐스럽게 피던, 부엌 아궁이에 연탄 집게로 연탄을 갈아 넣으며 방에 불을 때던, 대문 앞에 있는 재래식 화장실에 갈 때마다 얼굴을 찌푸렸던, 거기 가기 싫어 뒷마루의 요강에 오줌을 싸던, 장독대가 있던 옥상에 올라가면 옆집이 내려다 보이던, 옥상으로 올라가는 철제 계단에서 세 자매가 줄줄이 서서 사진을 찍던 한옥 집에서 스무 살까지 살았습니다. 시골에서 얻어 와 키우던 진돌이 진순이라는 이름의 진돗개들은 몇 년씩 키우다 보면 어느 여름날 꼭 집을 나갔고, 정원의 꽃들은 해마다 탐스럽게 듬뿍 피고 졌으며, 친구들이 올 때는 왕왕 짖는 개의 목줄을 잡아 당기며 괜찮아 내가 잘 잡고 있으니 어서 들어가라고 말해야 했던, 친구들이 화장실 가고 싶다고 말할 때마다 괜히 부끄러웠던 그 집을 하루빨리 떠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공부를 아주 열심히 했어요. 요즘 말로 ‘인서울’ 하려고요. 


하지만 그 집을 떠나 살던 곳들도 모두 마음에 들지 않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한 방에 넷이 비좁게 살던 기숙사도, 기숙사를 떠나 살던 바퀴벌레 나오는 하숙집도, 하숙집을 떠나 얻은 창문이 한 뼘 열리던 고시원도, 고시원을 떠나 친구와 겨우 얻은, 빗물이 방으로 슬금슬금 스며들던 방 두 칸짜리 전셋집도요. 그리고 그 다음이 시드니에서 발품을 팔아 어렵게 구한 방이었습니다. 처음으로 방다운 방 같던, 창밖으로 초록이 보이던, 내 마음대로 어지르고 꾸밀 수 있었던 방이었습니다. 11 hugo street NSW 아직도 주소가 기억납니다. 옆집과 벽을 공유하는 3층 짜리 테라스 하우스. 1층에는 거실과 부엌과 뒤뜰이, 2층에는 방 두개와 화장실이, 3층에는 방 두 개가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일주일에 110달러였던 3층의 큰 방에 짐을 풀었다가 일주일에 90달러인 3층의 작은 방이 비자 그 방으로 옮겼습니다. 110달러 짜리 방에서는 집 건너편의 작은 잔디 공원과 아름드리 나무가 보였고, 90달러 짜리 방에서는 1층의 지붕과 빨래를 너는 뒷마당이 보였습니다.


그 방에서 영어 신문을 오려 스크랩하며 공부했고, 모르는 단어를 찾아가며 청소년 소설을 읽었고, 그 소설의 오디어 테이프를 도서관에서 빌려 녹음이 되는 친구의 카셋트에 공테이프 두 개를 넣고 재생과 녹음 버튼을 동시에 놀러 복사본을 떴습니다. 그 소설책은 아직도 집에 있답니다. 아이 방 책꽂이에요. 그렇게 복사해 온 테이프는 아마 고향집 상자에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방에서 혼자 공부도 많이 했고 생각도 많이 했습니다. 고독하게, 내 자신과 단둘이. 현재의 나와 내가 되고 싶은 나를 끝없이 비교하며 그렇게 나를, <나의 해방일지> 염미정의 말을 빌리자면, 소몰이하듯 몰아가며 살았습니다. 지금의 나는 아마 그때의 고독으로 탄생한 나일 것입니다. 고독할 만 했습니다. 충분히. 




며칠 전, 한국에서 오징어 스무 마리가 날아왔습니다. 오징어라니! 오징어라니! 오징어를 실물로 본 게 몇 년만인지 모르겠습니다. 말레이시아에서 굽는 오징어는 감격이었습니다. 감격인 이유는 외로웠기 때문입니다. 외로워서 툭하면 혼자 한숨에 눈물 바람인 걸 어찌 알고, 카톡을 하던 동생 하나가 오징어를 스무 마리나 보내준 겁니다. ‘언니가 애정결핍이구나. 내가 오징어로 추앙해줄게!’ 하면서요. 그렇게 오징어 스무 마리가 무사히 바다를 건너 11번지 우리 집에 도착했습니다. 경건한 마음으로 가스불에 구워 공들여 껍질을 벗겨 혹시라도 그동안 위가 약해졌을가봐 열심히 꼭꼭 씹어 먹었습니다. 맥주 한 모금에 오징어 한 입. 요즘 해 진 후의 행복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다섯 마리 쯤 먹으니 같이 먹을 친구가 아쉽습니다. 하지만 이 귀한 오징어를 나눠 먹어야 한다고 생각하면 아유 그냥 혼자 먹자 하다가 또 맨날 혼자 오징어를 뜯는 내가 가엾기도 했다가 그렇게 오락가락 질겅질겅 야금야금 한 마리씩 먹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부를 친구도 없어요. 왜 친구가 없냐고요? 고독이 체질이 되다 보니 친구 사귀는 법을 잊어버렸나 봅니다. 그래서 몹시 외롭습니다. 외로워서 드라마를 보면 더 외롭고요. 술을 마셔도 더 외로워요. 그래서 그 맛있는 오징어를 맨날 혼자서 질겅질겅. 


인생에는 지랄 총량의 법칙이 있다고 하지요. 그뿐만 아니라 고독총량의 법칙도 있고 수다총량의 법칙도 있는 것 같아요. 저는 고독은 진작 채웠습니다. 그런데 수다는 거의 안 채운 것 같아요. 그래서 지금 이렇게 외로운가 봅니다. 죽기 전까지 수다총량을 다 채울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그래서 지금부터라도 부지런히 채우고 싶어요. 그런데 누구랑 채워야 할까요. 친구가 없냐고요? 네 없어요. 좀 까다로워서 그런가봐요. 열 명 중에 마음 맞는 사람 한 명 찾기가 왜 그렇게 어려운지. 한 백 명은 있어야 그중에 한 명 찾을 수 있으려나요. 수다 수다 했지만 사실 의미없는 수다를 못 견디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의미 있는 수다, 나를 성장시키고 위로하고 또 하루를 살아갈 힘을 주는 그런 수다를 떨고 싶어요. 이제 고독은 그만, 수다로 연결되고 싶네요. 


혹시 나만 외로운가요? 아닐 거에요. 아니죠? 살다보면 누구나 문득 느낄 수 밖에 없는 감정이 곧 외로움 아닐까요. 아무리 가족끼리 끈끈해도, 아무리 주변에 친구가 많아도 말이에요. 끝없이 나를 알리고 상대를 알아가고 싶지만, 그런 환상 속의 합일을 꿈꾸지만 나만큼 나를 잘 아는 또 한 사람이 존재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겠지요. 욕구는 넘치지만 방법은 요원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도하고 불가능을 깨닫는 그 과정 속에서 인간은 결국 고독한 존재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거에요. 세상을 떠날 때도, 화장실 갈 때도 인간은 누구나 혼자, 그래서 모두 외로운 존재. 그러니 우리 서로 연결됩시다. 수다로 대동단결! 


그래서 아이가 대학을 가면 한국으로 돌아가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어디에 살게 될까요. 이제 그만 이사 다니려면 집을 사야 할까요. 그래서 요즘은 동거인과 툭하면 집 이야기를 합니다. 서울에 집값이 얼마나 올랐는지 모르는 두 사람이, 대출 조건 같은 거 하나도 모르는 두 사람이, 청약도 이제 두 달 밖에 넣지 않은 두 사람이, 서울에 집을 사네 어쩌네 술만 마시면 떠들고 있습니다. 나중의 일은 나중의 우리가 알아서 하겠지요. 


살 곳이 생기면 아늑하게 꾸며 툭하면 친구들을 초대하고 싶습니다. 작은 거실에 꽉 차는 테이블을 놓고 꽃무늬 테이블보를 깔겠습니다. 그 때쯤이면 식물도 하나쯤 키우고 싶겠지요. 손님이 언제든 묵어갈 수 있는 넉넉한 침대도 마련해 두겠습니다. 그런 다음 비오니까 부침개 해 먹자, 스트레스 받으니까 떡볶이 해먹자, 심심하니 커피 마시자, 생일이니까 파티 하자 등 끝없이 구실을 만들어 친구들을 부르겠습니다. 수다를 떨다가 같이 글도 쓰고요. 같이 글 쓰다가 같이 책도 만들고요. 요리는 잘 못하니 파티는 늘 포트락 파티입니다. 마른 오징어 파티도 좋고요!


자, 얼른 부엌에 가서 요리 하나 해요. 그래서 들고 우리 집에 와요. 

아, 아직 먼 미래의 일이군요. 이런. 


그럼 그 전에 조호바루 먼저 놀러와요. 요리는 되었고요. 오징어 몇 마리만 들고 와요. 나랑 수다 떨어요. 주소는 이미 말했죠? No. 11 Jalan Eco Botani  @/@@ 입니다. 자, 그럼 나 기다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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