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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리 Jun 11. 2022

찜통 안에서 울다



그 속도감이 좋았다. 오토바이 운전은 자동차 액셀을 밟을 때보다 더 팔딱이는 맛이 있었다. 자동차의 속도감은 감히 따라올 수 없었다. 프레임에 갇혀 있지 않으므로 온몸으로, 오감으로 길 위의 공기를 느끼는 살아 있는 맛이 있었다. 그 상쾌한 속도, 웅웅 대며 헬멧을 파고드는 온갖 소리, 거친 듯 부드럽게 굴러가는 바퀴가 좋았다. 자갈길을 달리면 엉덩이가 들썩들썩한 대로, 잘 닦인 길을 달리면 매끈하게 나가는 대로 다 좋았다. 
나시와 반바지를 입고 오토바이를 타면 열대의 작열하는 태양에 팔뚝과 허벅지가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는 것이 초 단위로 느껴졌다. 내 살갗의 온도가 시시각각 달아오르는 느낌조차 만족스러웠다. 비가 오면 슈퍼맨 망토처럼 펄럭여서 입으나 마나 한 비옷을 입고 달리는 대로, 빗물이 줄줄 흐르는 선글라스 너머를 눈 부릅뜨고 째려보며 달리는 대로 다 좋았다. 쌀쌀한 아침이면 카디건을 걸쳐 입고 평소보다 더 상쾌한 공기를 들이마시는 게 좋았고, 밤에는 밤대로 낮과 다른 우붓의 밤을, 흥겨운 여행자들을, 소박한 불빛을 구경하는 게 좋았다. 


제가 쓴 <결혼에도 휴가가 필요해서> 중 ‘오토바이 타는 여자’의 일부입니다. 


5년 전 우붓에서 살던 때의 이야기죠. 일 년 내내 더운 열대의 나라에서도 그렇게 바람을 맞고 다니면 살만 했습니다. 아니 그렇게 좋을 수 없었습니다. 요즘 그 바람이 유난히 그립습니다. 그 속도감이 그립습니다.


한낮에 머리 꼭대기에서 작열하는 해만 봐도, 저녁 일곱 시가 넘었는데 아직도 중천인 해만 봐도 짜증이 나는 날씨거든요. 요즘 날씨가 무지 더워요. 더워도 더워도 이렇게 더울 수가 없어요. 우붓에서는 아무리 더워도 일단 오토바이에 앉아 달리기 시작하면 그래도 시원했는데, 오토바이를 타지 않는 이곳 조호바루에서는 그 더위에 한껏 달아오른 차에 올라타는 것 자체가 고역입니다. 반바지라도 입고 잠시 땡볕에 세워 놓은 차에 타려면 말 그대로 욕이 저절로 나옵니다. 두 다리를 들썩이며 에어컨을 최대로 틀고 창문을 죄다 열고 열기를 빼냅니다. 그렇게 한참을 달려야 그나마 쾌적한 온도가 됩니다.


그럼 오토바이를 타라고요? 물론 타고 싶지요. 하지만 오토바이가 생활이라 누구나 오토바이를 타는 곳과 특정 직업군만 오토바이를 타는 곳은 다르지 않겠습니까. 남녀노소가 골고루 운전하는 곳과 젊은 남성 운전자가 98퍼센트 이상인 곳에서 느끼는 위험도도 다르고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차를 탑니다. 동네 마실 가듯 오토바이 뒤에 아이를 태워 학교에 데려다줄 수 있는 곳도 아니고요. 차들이 시속 120킬로미터 이상 달리며 일차선에서 조금이라도 속도를 늦추면 꽁무니에 바짝 붙어 비키라고 빔을 쏘아대는 곳에서는 더더욱 어쩔 수 없지요. 저도 험하게 운전한다는 소리 많이 들었는데 여기 사람들은 장난 아니거든요. 어쨌든 오토바이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게 아니라 날씨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데 이야기가 또 샜네요. 


더워도 너무 덥다고요. 옛날에는 마당의 빨래가 바짝바짝 마르고 있는 걸 보면 그렇게 기분이 좋았는데 지금은 그 햇볕에 빨래를 널러 나갈 생각만 해도 짜증이 올라옵니다. 다 마른 빨래 건조대를 그늘로 가져오는 동안 정수리가 탈 것 같아요. 


세어보니 발리에서 조호바루까지, 열대의 나라에서 산 세월이 꽉 채운 9년, 햇수로 십 년입니다. 더위에 적응될 때는 물론 훨씬 지났지요. 적응하다 못해 이제 지긋지긋해질 때도 된 거지요. 아이는 이제 사계절이 있는 나라보다 열대의 나라에 산 세월이 더 길어졌습니다. 


아침에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주고 올 때는 그나마 숨 쉴만한 공기가, 도시락 싼 싱크대를 대충 정리하고 집을 나서려고 할 즈음에는 뜨겁게 끓어올라 문만 열어도 얼굴을 잡아먹을 듯 훅 끼쳐옵니다. 차 안에는 그 안에서 더 달궈진 공기가 도사리고 있지요. 그래도 어쩌겠어요. 짐까지 다 챙겨 들고 나왔는데 다시 들어갈 수도 없고. 일이라도 한 자락 하려면 어쩔 수 없이 나가야죠. 그렇게 오늘도 나왔습니다. 아이 픽업을 위해 다시 차를 타야 하는 오후쯤, 차는 또 얼마나 달궈져 있을까요. 땅덩이가 넓어 건물이 낮으니 차를 댈 만한 그늘이 없어요. 땅덩이가 넓어 지하 주차장을 만들 필요가 없으니 그저 땡볕에 세워놓을 밖에요.


드라마에서 누가 가을바람을 맞거나 겨울에 춥다고 덜덜 떠는 장면을 보면 그래서 그렇게 부럽습니다. 그리고 애써 옛 추억을 꺼내 봅니다. 우붓에 살던 때보다 훨씬 오래전, 해마다 9월이 되고 개강 첫날이 되면, 방학 내내 조용했던 학교가 어느 날 갑자기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듯 활기차 졌습니다. 개강 첫날, 여름 내내 바짝 마른 풀들을 바스락 밟으며 온도가 낮아진 바람을 맞고 있으면 어느새 가을이 내 옆에 서 있었습니다. 새로운 학기도 시작, 새로운 계절도 시작이라며 괜히 설렜습니다. 봄의 시작은 설렘보다 긴장이 더 컸다면 가을의 시작은 늘 조금 더 익숙해서 여유가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사계절 중 가을이 거의 다 온 것 같은 바로 그 순간이 유난히 더 마음에 남았습니다. 그래서 열대의 나라에서도 9월만 되면 마음이 몰랑몰랑해졌고요. 어디선가 가을바람이 불어오는 것 같았습니다. 그때를 기억하는 몸과 마음이 해마다 9월이면 추억을 꺼내 느껴보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십 년쯤 지나니 약발이 떨어져 아무리 눈을 감고 떠올려 봐도 그 가을바람이 안 느껴집니다. 하긴 십 년이면 희미해질 만도 하겠지요.


그리고 추억이 희미해질수록 다시 사계절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방에서 꽃이 피어나는 봄도, 타들어갈 듯 덥지만 그늘도 있고 지하 주차장도 있고, 또 금방 끝난다는 생각에 더 견디기 쉬운 여름도, 바닥에 떨어진 나뭇잎만 봐도 괜히 싱숭생숭해지는 가을도, 털장갑과 목도리를 꺼내고 붕어빵 장수가 나타나길 기다리는 겨울도 골고루 느껴보고 싶어 집니다. 너무 덥지도 않고 너무 춥지도 않은 곳. 더위도 추위도 모두 적당한 그런 곳에서 살고 싶어 집니다. 스페인이나 이탈리아 같은 곳. 어쩌면 한국 같은 곳. 삼십여 년 가까이 살던 곳, 하지만 지독히 달아나고 싶었던 곳이 다시 그리워지는 날씨입니다. 


물론 지금처럼 옷걸이 하나에 일 년 내내 입을 옷이 다 걸리는 곳에서 살다가 돌아가면, 계절이 바뀔 때마다 옷장을 보며 한숨을 쉬겠지요. 옷장 정리가 제일 싫어! 하면서요. 맞아요. 사람이 이렇게 간사해요. 



자, 더위가 지긋지긋하지만 지금 당장 이사를 할 수도 없고 그럼 어째야 할까요?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케케묵은 말 같은 건 하고 싶지 않지만 그거 아니고는 방법이 안 보이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즐길까요? 수영을 할까요? 그늘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수영장에서요? 30분만 물장구를 쳤다가는 거울을 보며 ‘넌 누구니’ 하게 될 겁니다. 아이들이야 그렇게 좀 태우면서 노는 거지만 아유, 열대의 햇빛에 이미 십 년이나 노출된 피부를 더 태우고 싶지는 않네요. 집에서 에어컨 틀고 책이나 읽을까요. 네, 그래야겠죠. 그러다 보면 이 찜통 같은 날씨가 조금 더 순해지는 때가 분명 오긴 옵니다. 열대지만 날씨의 변화가 또 아예 없는 건 아니니까요. 그렇게 버텨야죠. 이깟 더위쯤, 바짝 웅크려 지나가길 기다리면 언젠가는 지나가겠죠. 이렇게 울고 싶은 마음으로 오늘도 찜통 같은 차를 탑니다. 아니, 찜통 같은 차에 타서 웁니다. 


그래서 오늘 글의 제목은 미셸 자우너의 <H마트에서 울다>를 차용해 ‘찜통 안에서 울다’입니다. 책을 읽으신 분도 있겠지만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설명하자면, 한국인 엄마와 미국인 아빠 사이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뮤지션으로 자란 저자가 갑자기 엄마를 잃고 한국 식품점인 한아름 마트에서 엄마와의 추억을 떠올리며 쓴 에세이입니다. 미셸 자우너는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죠. 


“며칠 동안 한국 음식을 먹지 않으면 진짜 먹고 싶어 져요. 날씨가 달라질 때나 각종 연휴 때 이러한 욕구가 드는 거죠. 제가 자라는 내내 먹어온 음식이에요. 아프면 잣죽이 먹고 싶고, 비가 오면 수제비가 먹고 싶고, 더운 여름밤에는 팥빙수가 먹고 싶어요.” 


이제 엄마와 딸이 등장하는 책을 읽으면 엄마에게 감정 이입을 하게 된 지 어언 십몇 년째, 당연히 우리 딸은 이곳에 있는 ‘코리아 훼미리마트’나 ‘동네 마트’에서 무엇을 보고 엄마를 떠올릴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퀴즈! 우리 딸은 무엇을 보며 엄마를 떠올릴까요? 1) 양념 깻잎 2) 말린 고사리 3) 불닭볶음면 4) 붕어싸만코 5) 포천 이동막걸리 


깻잎은 반찬 없을 때 가끔 사 먹긴 하지만 그냥 반찬이고, 불닭면과 붕어싸만코는 아이의 취향, 포천 이동막걸리는 아빠의 픽입니다. 나중에 아이가 엄마를 떠올릴 품목은 바로 말린 고사리! 제가 고사리나물을 또 기가 막히게 잘하거든요. 말린 고사리를 불리고 끓인 다음 들기름에 달달 볶다가 양념을 하고 다시마 육수에 자작하게 끓여 들깨가루를 넉넉하게 뿌리면 야들야들 고사리나물 완성! 아이가 좋아하는 반찬입니다. 


사계절이 있는 곳보다 열대의 나라에서 더 오래 산 아이는 나중에 어디에 살아도 눈만 감으면 이 찜통 같은 햇살이 느껴지겠지요. 어딜 가든 몸과 마음은 이곳의 푹푹 찌는 공기를 한동안 기억하겠지요. 그리고 이 찜통 같은 더위에 엄마가 에어컨도 들지 않는 부엌에서 고사리를 볶는 모습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아니, 그것보다 오래전 우붓에서 오토바이 타던 모습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늘 뒤에 앉아 바라보던 엄마의 자유롭고 시원한 등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슬리퍼를 신고 옆집으로 술 마시던 건 잊으면 좋겠고요. 밤마다 99 마트에서 칼스버그를 사는 모습도 금방 잊으면 좋겠고요. 보름달 아래서 신나게 춤추던 모습은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언제든 삶이 힘들 때, 그래 엄마처럼 춤이나 추자! 하고 훌훌 털어버리면 좋겠습니다. 밤마다 얼굴에 톡톡톡 크림을 바르던 엄마 모습, 병아리색 샛노란 스웨터를 짜던 우리 엄마 모습을 제가 기억하는 것처럼요. 






Photo by Jorge Vasconez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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