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는 송중기를 기억했다

중학생, 방학맞이 넷플릭스 무료 체험기

by 아리

아이가 커가면서 함께 드라마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아이 덕분에 재미있는 드라마를 알게 되기도 하고 (<사이코메트리 그 녀석>도 그랬고, 지금 <열여덟의 순간>도 그렇다) 엄마 아빠 추억의 드라마를 함께 보기도 한다.


때는 아이의 방학,

방학을 맞이하여! 마음 좋게 신청해 준 건 아니지만, 어쩌다 그즈음 우리는 넷플릭스 한 달 무료체험을 해보기로 했다.


방학을 맞은 아이의 일상은 이랬다.

오후 두 시나 세시 정도에 일어나 눈도 뜨지 못하고 '배고파' 하면서 부엌으로 온다. '뭐 먹을래?' 물어도 대답은 늘 시큰둥. 과일을 먹거나 요구르트에 그래놀라를 먹고 곧바로 우리 집에서 가장 편한 자리에 비스듬히 앉는, 아니, 눕는다.


넷플릭스라는 신세계에서 아이가 가장 먼저 정주행 한 드라마는 <유성화원>

한동안 거실에 시끄러운 중국어가 떠다녔다. <꽃보다 남자>의 중국판인지, 대만판인지 어쨌든 괜찮게 생긴 남자들이 여자애 주위를 우르르 몰려다녔다. 아무래도 그 드라마는 내 취향이 아니라서 아이가 어서 정주행을 끝내고 중국어가 들리지 않기만을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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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해를 품은 달>

두둥! 이것은 언제 적 드라마인가.

때는 2012년, 김수현이 마음에 들었던 내가 부지런히 봤던 드라마다.

그때 아이는 일곱 살, 집에 텔레비전도 없었는데 어떻게 봤을까. 잘 기억도 나지 않는다.

같은 동네에 있던 할머니 집에 자주 드나들었고, 그 집엔 늘 텔레비전이 켜져 있었으니, 거기서 아이와 함께 몇 번 본 것도 같다. 예쁘고 화려한 것들을 좋아했을 나이니 온갖 한복이 아이의 마음을 사로잡았을 것이다.

그리고 김수현. 기억한다. 아이가 최초로 이름을 외운 연예인의 이름은 바로 김수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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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해품달 정주행을 마치고 아이가 선택한 드라마는 바로 <태양의 후예>.

역시 내가 재미있게 본 드라마였다. 속으로 생각했다. '웁스, 네가 그걸 지금 보기 시작하면, 나도 같이 볼 수밖에 없잖아! 그건 그렇고, 엄마와 취향이 좀 비슷한 걸.'


그땐 2016년이었으니 아이는 초등 고학년이었고, 역시 그때도 집에 텔레비전은 없었다.

아이가 잠들고 나면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 유튜브 클립들을 이어서 봤던 것 같다. <착한 남자> 때부터 송중기의 팬이었으니까.


어쨌든 슬그머니 아이 옆에 앉아 같이 <태양의 후예>를 다시 봤다. 지금은 안타깝게 되었지만 두 사람의 대화는 참 재미있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착한 남자>가 떠올랐는데, 오랜만에 그것 또한 다시 보고 싶은 마음에, 넷플릭스는 한 달 무료체험만 하고 끊을 거니까, 마침 아이도 방학이고, 그래서 아이에게 슬며시 물었다.



"송중기 나오는 드라마 또 알려줄까?"


그랬더니 얼마나 신나게 '응!'을 하는지.


결국 같이 나란히 앉아 또 <착한 남자>를 정주행 하기 시작했다.

역시, 오래전 드라마인데도 참 잘 만들었어, 등의 추임새를 넣으며 나는 옛 추억에 흠뻑 빠졌는데,


(웁스, 스포 있음)

이야기가 끝나갈 즈음,

송중기가 문채원 대신 칼을 맞는다. 칼 맞은 곳을 손으로 부여잡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그녀를 택시에 태워 보내고, 내일 있을 뇌수술을 위해 병원으로 터덜터덜, 비틀비틀 돌아가는데!

그러다가 아무도 없는 으슥한 곳에서 철퍼덕! 쓰러지는데!

아이가 외쳤다.


나 이 장면 기억나!! 진짜! 나 이거 봤어!


뭐? 네가 이 장면을 어떻게 기억해? 보기나 했어? 나 너랑 같이 본 기억 없는데? 집에 텔레비전도 없었고 항상 너 몰래 봤는데?


몰라, 기억나.


<해품달>과 <착한 남자>는 같은 해 방영한 드라마지만 <해품달>은 함께 봤고 <착한 남자>는 나 혼자 몰래 봤다. 아이는 김수현은 알았지만 송중기의 존재는 최근에야 알게 되었다.


일곱 살 기억이라. 나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한두 개뿐이다. 그마저도 나이가 확실하지 않다.

그런데 아이는 기억한다. 많은 것을. 아이가 송중기를 기억한다면 정말 기억하는 것일 테다.

역시 할머니 집에서 봤는지, 몰래 핸드폰으로 보고 있는데 자다가 깨서 엄마랑 같이 봤는지 모르지만,

어쨌든 내가 기억하지 못해도 아이가 기억한다면 기억하는 것이다.


왜냐, 아이는 많은 걸 기억했다.




36개월 정도였던 어느 날, 아이가 말했다.


"엄마 뱃속에 들어갈래."

그러더니 온 몸을 잔뜩 웅크리고 내게 몸을 꼭 밀착해 안겼다.

나도, 꼭 껴안으면 아이가 다시 뱃속으로 들어가기라도 할 듯, 으스러지게 아이를 안았다. 그리고 물었다.


"느낌이 어때?"


"부드러워."


"그래?"


"응, 그리고. 깜깜해."


깜깜하다고? 뭘 알고 하는 소리? 내가 뱃속 이야기를 해줬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그저 깜깜하다고?

그리고 또 무심히 물었다. 어쩌면 엉뚱한 대답을 기대하며.


"그리고 또?"


"두근 두근 두근..."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너무 놀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이가 말을 이었다.


"심장소리"


".........."


"세게"


"................"


"천둥처럼"


"......................"


너! 정말 기억하는 거야? 정말 그때를? 뱃속을? 아직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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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나는 너무 놀랐다. 살짝 울었던 것 같기도 하다. 울면서 아이를 더 세게 껴안았다.

아기가 뱃속에서의 일을 기억한다는 말이, 과학적 근거가 있는 말인지 그저 태교의 중요성을 강조한 말인지 나는 정확히 모른다. 그런데 아이가 알려주었다. 심장 소리를 들었다고, 캄캄했다고. 그리고 마치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다시 놀이에 몰두했다. 나는 한낮에 꿈을 꾼 것처럼 멍해져 한동안 아이를 바라보았다.





시간은 흐르고 흘러,

어쩌면 스쳐 지나가면서 봤을 송중기를, 이름도 몰랐던 그를, 그 뒷모습을 기억한다는 아이의 말에 나는 놀라기보다 이번에는 뜨끔했다. 정말 그 순간이, 그 장면이 아이 머릿속, 몸속, 무의식 속 그 어디든, 어딘가엔 있었다는 거다.


넌 도대체 뭘 그렇게 쌓고 있는 것이냐.

물론 지금은 뱃속 대화를 들려주면, '내가 그랬어?' 하고 무심히 넘기겠지. 오래된 기억은 많이 사라지고 새로운 기억을 또 부지런히 쌓고 있을 테니까.


<착한 남자>의 마지막 회를 보며 나는 덜컥 겁이 났다.


이 피 끓는 사춘기 시절, 아이는 무엇을 기억에 남기고 있을까.


오늘부터 기도라도 해야겠다. 모든 순간을 기억하지 말라고. 좋은 것만 기억하라고.


달밤에 엄마랑 산책했던 것. (맥주를 사러 갔다는 건 잊어도 좋겠다.)

둘이 드라마 보며 낄낄거리던 것.

상기된 표정으로 남자 친구 이야기할 때 귀 쫑긋 세우고 들어줬던 것.

원피스 사고 싶다고 쭈뼛쭈뼛 말했을 때 '그래 사줄게!' 호기롭게 외쳤던 것.

이런 것만 기억하라고.


머리 콩 한 대 박았던 것.

안아달라고 오는 걸 귀찮아 슬쩍 밀었던 것.

혼자 교복 다려 입고 학교 가던 아침.

엄마한테 내는 짜증 겨우 받아주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엄마가 더 크게 소리 질러 버렸던 것.

일한다고 바빠 자러 가는데 눈도 못 맞춰줬던 것.

런 것들은 기억하지 말고.


별 결 다 기억하는 너를 위해서라도, 지금부터 신경 좀 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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