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아이와 놀이터에 갔다.
아이는 '시쇼시쇼' 하면서 시소로 달려갔다가 또 금방 미끄럼틀을 탔다. 온갖 돌멩이를 주워 동물 이름을 붙였고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아 모래놀이를 했다. 외출했다 돌아온 화창한 일요일 오후였다. 혼자서도 잘 노는 아이를 바라보며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을 때 아이 또래의 친구가 등장했다. 함께 온 사람은 아빠. 우선, 젊은 나이는 아니었다. 기름 발라 가지런히 넘겨 한 올 흐트러짐 없는 머리칼과 오랜 세월 회식이 아니면 생성될 수 없어 보이는 듬직한 배가 일요일 오후에 아이와 함께 놀이터에 나오는 아빠들의 흔한 모습은 아니었다.
남자아이는 쪼르르 계단을 올라 미끄럼을 탔다. 아빠는 ‘잘한다. 또 해봐.’ 하면서 놀이의 시동을 거는 아이에게 맞장구를 쳐주었다. 하지만 뭔가 어색했다. 바로 아빠의 걸음걸이였다. 슬리퍼를 신고 나온 아빠는 발가락에 모래 한 올이라도 묻을 까 봐 10개의 발가락 마디마디에 힘을 꽉 주고 엉거주춤한 자세로 모래밭을 걷고 있었다. 아이의 빠른 발걸음을 따라갈 수 없는 속도였다. 그리고 신나게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오는 아이에게 그런 자세와 딱 어울리는 말을 하기 시작했다. ‘으이그, 먼지. 이게 뭐야. 이게.’ 하면서 거칠게 아이를 세워 엉덩이며 옷에 묻은 먼지를 털기 시작했다.
먼지라니.
당연히 미끄럼틀엔 먼지가 있다. 뿌옇게 쌓여 있다. 아이들이 오르내리며 옮겨다 놓은 모래, 자갈, 나뭇잎들.
그저 놀이터의 일부인 그런 것들이 먼지라면 그에게 놀이터는 커다란 먼지 구덩이였을 테다.
옆에서 미끄럼틀 타는 친구와 신기한 아저씨를 빤히 쳐다보는 내 아이는 그에 비하면 한마디로 거지꼴이었다. 점심 먹으며 흘린 음식 자국, 여기저기 들러붙은 모래와 흙, 새까만 손. 게다가 기저귀에 똥까지 싸놓고 더 놀고 싶어서 들어가기를 거부하고 있는 상태였다.
다시 미끄럼틀 계단을 오르는 아이에게 아빠가 재촉하기 시작했다. ‘빨리 내려와. 얼른 가자. 아빠 간다.’
하지만 미끄럼틀 꼭대기까지 올라간 아이는 빨간 미끄럼틀로 내려올까, 파란 미끄럼틀로 내려올까, 아니면 더 기다란 동굴 같은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올까 고민하는 것처럼 위에서 두리번거리기만 했다. 아빠는 점점 더 속이 탔다. 뜻대로 되지 않자 목소리가 커졌다. ‘빨리 와! 얼른! 이 놈의 자식’과 함께 ‘매매!’까지.
미끄럼틀에서 빨리 내려오지 않는다고 매를 맞는다면 아이들이 얼마나 불쌍한가. 아빠는 왜 아이와 놀이터에 나왔을까. 엄마 등쌀에 떠밀려 나왔을까, 아니면 담배 한 대 필 시간 동안만 짧고 굵게 놀고 잽싸게 따라 들어오길 바랬을까.
무슨 용기가 났는지 나는 그에게 살며시 물었다. “몇 개월이에요?” 눈도 마주치지 않는 간단한 대답이 돌아왔다. "28개월이요." 아, 생각보다 큰 아이였구나.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은 서로 모르는 사이라도 ‘그저’ 눈길을 마주 치치 않는다. 한번 교환하는 눈빛에는 수많은 뜻과 감정이 오롯이 담겨있다. 힘들죠? 다 그런가 봐요. 그래도 행복할 때가 있잖아요. 우리 힘내요.
내 아이보다 더 어린아이의 엄마와 눈길이 마주칠 때면, 힘내요. 그때만 지나면 곧 괜찮아질 거예요. 그래도 어쩌면 그때가 젤 행복해요. 시간이 얼마나 빨리 가는데요. 그 행복을 마음껏 누리세요. 내 아이보다 더 큰 아이의 엄마와 눈길이 마주칠 때면 언제 그만큼 키울까 하는 부러움의 눈빛과 함께 솟아오르는 갖가지 질문을 애써 감추어야 한다. 그 나이쯤 되면 말은 얼마나 해요? 밥은 잘 먹어요? 간식은 뭘 줘요? 이제 잠은 잘 자죠?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알게 될 것임을 뻔히 알기에, 궁금하지만 그저 꾹 참으며 눈빛만 교환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몇 개월이에요?’라는 질문은 그저 아이의 개월 수에 대한 질문만이 아니다. ‘우리 애들 키우느라 힘든데 앉아서 수다나 떨어요.’라고 대놓고 말하기 머쓱해 그저 누군가 먼저 용기내기를 서로 기다리는 것이다. 그러다 누군가 ‘몇 개월이에요?’ 하고 조심스레 물으면 그때서야 대화의 물꼬가 트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눈길도 안 준 채 대답만 하는 아빠 때문에 잠시 머쓱해졌다. 아빠는 점점 목소리를 높이더니 드디어 혼자 놀이터를 떠나며 말했다. ‘아빠 간다.’
아빠는 발길을 돌렸고 아이는 그대로 서 있었다. 그런데 자세가 약간 이상했다. 엉거주춤 서 있는데 연두색 바지 색이 진해져 온다. 쉬를 한 것이다. 순간 많은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하지? 적당하지 않은 상황에서 쉬를 한 아이들은 주변에 있는 엄마 아빠를 찾거나 엄마 아빠가 보이지 않으면 울음을 터트리지 않을까. 하지만 그 아이는 당황하지도, 아빠를 부르지도 않았다. 그저 어떤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올까에 대한 고민이 끝나지 않은 듯 계속 미끄럼틀 위에 서 있었다. 가끔씩, 젖어버린 바지를 내려다보며.
아빠는 놀이터를 벗어나 발을 털고 아이가 있는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혹시 그쪽에서는 아이의 모습이 보이지 않나 해서 나는 ‘애가 쉬를 했어요’라고 말했다. 아빠는 아무 반응 없이 그저 성큼성큼 아이에게 다가갔다. 아이들이 놀다 보면 바지에 쉬를 할 수도 있다는 표정은 아니었다. 마침내 아이가 부르길래 난 시소 쪽으로 갔다.
‘어이구, 쉬했어.’ 하는 아빠 목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아보다가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나는 살짝 충격을 받았다. 아이의 아빠도 아이를 들어 올리며 내가 있는 쪽을 쳐다보다 눈이 마주친 것인데, 그 눈빛에는 이런 것들이 들어 있었다.
쪽 팔 림. 체 면 없 음. 재 수 없 음. 아 이 를 한 대 쥐 어 박 고 싶 은 마 음.
그 찰나의 순간에 고스란히 드러나버린 그의 감정들. 그 짧은 순간 마주친 눈빛 안에서 전부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아이의 연두색 바지가 자기 옷에 닿을세라 무거운 물건을 들고 가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아니 더러운 것을 조금이라도 몸에 닿지 않게 들고 가는 자세로 아이를 '들고' 사라졌다.
그때 내가 느낀 감정은, 나는 저 사람보다 좋은 엄마라는 우월감도, 우리 아이의 아빠는 저렇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안도감도, 어떻게 아빠가 저럴 수 있냐는 어처구니없음도, 아이를 불쌍히 여기는 동정심도 아니었다. 바로 슬픔이었다.
놀이터에서 쉬를 한 아이에게 쪽팔림을 느끼는 아빠라니. 아이의 기분과 상태는 안중에도 없이 아이가 깎아버린 자신의 체면만 생각하는 아빠라니. 놀이터에서 만난 동네 아이 엄마가 뭐 대단한 사람이라고 그렇게 쪽팔려하다니.
아이를 낳으면 생물학적 부모가 되지만, 진정한 부모가 되는 길은 너무 힘들다는 것을 매일 느낀다.
우리 아버지 세대는 먹고살기 바빠 매일 밤 따뜻한 말 한마디 해줄 시간이 없었고, 사랑한다는 눈빛,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에도 인색했다. 좋은 부모가 되는 법도 모른 채 살아남아야 하는 삶이었다. 어머니들은 대가족 어른들 눈치 보랴, 많은 아이들 씻기고 입히고 먹이랴, 모성으로만 삶을 가득 채우며 어쩌면 자기도 모르게 아이들에게 화를 풀거나 스스로 이루지 못한 꿈을 강요했을 것이다. 독립해 자기 길을 가는 자식들에게 배신당한 듯 괴로워하기도 하면서. 우리 어머니와 아버지들, 또 그 어머니와 아버지들부터 쭉 그래 왔던 것이다.
사회의 발전이란 무엇인가.
더 많은 물건을 생산하고, 더 많이 소비하며, 더 많은 쾌락을 누리고, 더 많은 돈을 쓸 수 있는 것인가. 마음이 부자이고 싶다는 소박한 소망이 다시 떠오른다. 모든 사람이 마음을 살찌우는데 신경 쓴다면 내 아이를 위해서도, 이 땅의 모든 아이들을 위해서도 더 따뜻한 세상이 될 것 같다. 결국은 따뜻한 세상에서 존재 자체로 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란 아이들이 이 사회를 발전시킬 기술을 개발하고, 어려운 이웃에게 도움이 될 제도를 만들고, 그들의 아이들 또한 행복하게 잘 키울 수 있을 것이다.
그날 밤 아이는 아빠에게 많이 혼났을까.
몇 년이 지난 후, 그 아이가 동네 놀이터에서 교복을 입은 채 담배를 피우며 자신의 꿈이 무엇인지, 오늘은 무엇을 하며 보냈는지 관심조차 두지 않는 아빠를 원망하지 않길 바랐다. 자식을 소유물로 여기고, 자신의 사회적 지위와 체면을 멋지게 장식해 주길 바라며, 아이의 꿈보다는 성적표 숫자에만 관심을 두는 아버지를 미워하면서 불행한 청소년기를 보내지 않기를 바랐다. 해맑던 아이의 눈빛이 언제까지라도 그대로 머물기를 오늘 밤, 정말 간절히 바랐다.
그로부터 많은 세월이 지났다.
내가 걱정했던 이름 모를 그 소년의 사춘기가, 요즘 사춘기인 아이를 보며 종종 궁금하다.
내 아이가 벌써 이만큼 자라 그 무섭다는 열다섯이 되었으니, 그 아이도 많이 자랐을 것이다. 이미 거뭇거뭇한 청소년이 되어 있겠지. 어떤 청소년이 되어 있을까. 여전히 그때 그 놀이터를 찾을까. 그때처럼 아빠하고 둘이 종종 시간을 보낼까. 아빠는 어떤 눈빛으로 다 큰 아이를 보고 있을까. 아이는 또 어떤 눈빛으로 아빠를 보고 있을까. 아니, 보기나 할까.
궁금하지만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내가 알 수 있고, 볼 수 있는 건 오직, 지금 내 곁에 있는 아이의 눈빛일 뿐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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