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는 여름 방학이 몇 달이나 남은 시점부터 염색을 해달라 졸랐다.
분홍색, 회색, 보라색, 파란색, 온갖 투톤의 옴브레 사진을 스크린샷 해놓고 보여주면서 이게 이쁘냐 저게 이쁘냐 묻고 또 물었다.
염색은 무슨 염색!
이라고 했지만 결국 조건을 걸고 해 주겠다 약속했다.
좋아, 무슨 색이든 원하는 대로 해. 하지만 개학 전에는 다시 까만색으로 염색하던가, 아니면 옴브레 부분은 자르고 학교 가!
좋아!
머리 색이 달라질 때 내가 변한 것 같은 느낌, 잘 모르겠지만 좀 새로워진 느낌. 그 느낌 아니까.
그래서 머리도 하고, 옷도 사고, 네일도 하는 거니까.
중학생이지만 누려볼 가치가 있는 경험이라고 생각했다.
마침내 방학이 시작되었고, 우리는 미용실에 갔다.
그 색깔은 탈색을 두 번 정도 해야 해요.
아이도 머릿결이 상할까 걱정되어 무슨 색으로 하든 탈색은 한 번만!으로 합의한 상태였기에, 원하던 색은 할 수 없었다. 가장 고민했던 애쉬 그레이와 애쉬 핑크는 불가능한 옵션이 되었고 결국 가장 색이 잘 나온다는 레드 계열로 하기로 했다.
계획 : 아래 부분만 탈색을 하고, 그 부분을 레드로 염색한다. 개학 전에 그 부분만 자른다.
그런데 내가 미용실에 붙어 있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합의를 하고 나는 일을 보러 나갔다.
그런데! 돌아와 보니 아이는 빨강머리 앤이 되어 있었다!
아래 부분을 탈색하고 염색을 전체에 해버린 것이다!
그건 약속과 다르잖아!
외쳐보았지만, 이미 늦었다.
그래야 이쁘다는 설득에 넘어간 건지, 원래 옴브레를 그렇게 하는 건지, 엄마 없는 김에 에라 모르겠다 해달라고 한 건지, 암튼 아이는 햇빛을 받으면 정수리가 빨갛게 반짝반짝 빛나는 머리를 갖게 되었다.
그래 한 달인데, 마음껏 누려라.
이미 엎질러진 물, 깔끔하게 마음을 비웠다.
니 나이땐 화장 안 한 게 제일 이뻐!
라고들 한다. 그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하지만, 사실 틴트라도 하나 바르고 내 꽃무늬 원피스를 빌려 입고 나서면, 나보다 키가 더 커서 그런가 내 눈에도 더 이뻐 보인다. 그래서 뭐가 맞는지 잘 모르겠다. 화장을 시작한 중학생들에게 화장 안 한 모습이 가장 예쁘다고 말하는 것도 어른들의 관점을 주입시키는 것일 뿐이라는 글을 어디선가 읽었다. 아이들도 염색하고 싶고, 손톱도 꾸미고 싶겠지. 왜 안 그러겠는가. 그 많은 SNS의 홍수 속에서.
그래서 기타 선생님이 자르라고 했다는 귀신같은 손톱도 내버려 두었다. 때때로 이미 굳어버린 매니큐어로 공들여 덧칠을 하는 것 역시. 일주일에 한 번 기타 칠 때 편한 것보다 일주일 내내 이쁜 게 더 중요하겠지, 이해했다. (정말 멋진 엄마 아닌가, 자뻑)
아이는 곧바로 다음 작전에 돌입했다.
방학 전에 계속 사진을 보여주며 엄마를 설득하던 작전 그대로.
끈질기게, 생각날 때마다 나에게 주입시켰다.
똥 머리로 묶으면 안 보여!
다들 이 정도는 염색하고 다녀!
**도 하고 온 댔어!
엄마 교장 선생님한테 불려 가기 싫어.
불려도 내가 불려 가지 왜 엄마가 불려 가!
나만, 괜히, 속이 시끄러웠다.
그래, 그 말은 맞다만, 아, 몰라! 어쨌든, 약속은 약속이니까! 생각하다 보니 또 빨간색이 생각보다 빨리 빠진다. 그래서 그래, 그 정도면 괜찮을 것 같기도 해.라고 마음이 오락가락했다.
그래도 약속을 지키는 엄마의 모습을 보여줘야지! 그러다 나중에 큰 코 다친다! 생각했다가 또
아니야, 사람이 좀 넉넉하고 여유도 있고 그래야지. 어떻게 그렇게 딱 말한 대로 살아.라고 생각했다.
아이는 아침마다 거울 앞에 앉아 공들여 머리를 다듬는데, 내 마음만 싸우느라 바빴다.
그래도 나 혼자 나랑 싸우는 게 낫지, 아이랑은 싸우기 싫었다.
내가 아이를 설득할 화려한 말발이 있는 것도 아니고, 구워삶을 비장의 무기가 있는 것도 아니니, 반대 의견을 꺼내도 결국 의견만 팡팡 부딪치다가 싸울 게 뻔했다.
그래서 속으로만 생각했다. 이걸 어째.
결국 빨간색은 많이 빠졌고, 아이는 그 상태로 개학을 맞아했다. 머리도 묶지 않고!
머리 묶어야지!
가서 묶을 거야!
부지런히 손톱 색은 지웠으나, 귀신처럼 긴 손톱은 그대로!
사춘기의 정답은 아무래도 이건 것 같다.
속으로만 생각하기.
겉으로 내뱉어봤자, 의견이 다를 것은 분명하고, 그러다 싸우기만 할 테니까.
아이가 말을 안 들으면, 나를 무시하나?라는 생각에 더 기분이 나빠져 강압적이 되고,
그러면 아이는 문을 쾅! 닫고 제 방으로 들어가고, 그럼 나는 더 화가 나서, 이게 감히 어디서! 당장 못 나와! 까지 가게 되면, 아, 생각만 해도 벌써 기운이 빠진다.
그래서 정답은, 속으로만 생각하기.
그렇게 속으로 생각하고 또 생각하다 보면,
학생이 무슨 염색! 에서 그래, 그 정도면 괜찮지 뭐.로,
나 교장실에 불려 가기 싫어! 에서 그래, 불려 가도 네가 불려 가지.로
손톱 깎아야지! 에서 선생님한테 눈물 쏙 빠지게 한 번 혼나 보는 것도 괜찮지. 등으로 알아서 생각이 정리가 된다.
단정한 머리로 학교 다니지만 엄마랑 싸우는 사춘기 딸에서
머리는 좀 발랄하지만 엄마랑 싸우지 않는 사춘기 딸이 될 수 있는 기회를 내가 제공하는 것이다!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그리고 결국 머리 색 때문에 큰 일은 일어나지 않고 있다. 아직까지는.
덕분에 나는 사춘기의 큰 팁을 하나 얻었다. 속으로만 생각하기.
속으로 오래 생각하다 보면, 아무래도 다 괜찮아지는 것 같다.
Photo by Tim Mossholder on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