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회사에 퇴사를 밝힌 건 20년 10월이었다. 쉽지 않은 이야기라 여러 번 망설였는데, 인사평가 기간이 당겨져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다. 정기 인사 발령이 나기 전에 말하면 나와 우리 팀의 편의를 봐주지 않을까 하는 마음도 컸다. 두 명이서 일하는 자리에 선임이 한 명 빠져버리면 안 그래도 바쁜 연말연초에 팀원들이 고생할 게 뻔히 보이기도 했고. 회사는 크고, 너 한자리 채우는 건 일도 아니니까 걱정 말라던 팀장님의 응원이 무색하게 11월 정기 인사발령은 아무 일도 없이 지나갔다. 선임급 직원이 오면 오버티오로 열심히 인수인계를 하고 연착륙하듯 훌훌 떠나려던 욕심과, 딱히 다음 일정이 없었던 상황이 맞물려 연말연초 시즌을 마무리하고 1월이 넘어 퇴사했다. 4개월짜리 퇴사였다. 물론 내가 정말 퇴사할 때도 내 자리를 맡아줄 직원은 오지 않았고, 2개월이 넘어 3월에야 신입사원이 발령 났다고 들었다. 한동안 셋이었다가, 둘이 되어 일하던 자리는 꽤나 오래 한 명으로 돌아갔다.
처음 입사 때도 그랬다. 내가 발령받아 간 곳은 누군가의 빈자리였고, 제 몫을 해내기 전까지 팀이 그 부재를 메꿔줬다. 하지만 스케줄 근무로 돌아가는 직업의 특성상 그리고 어느 그룹이 다 그러하듯 어느 날은 혼자 출근해 도와주려는 사람 없이 부딪혀야 했고, 꽤나 오랫동안 버텨내는 것이 일을 잘하게 되는 유일한 방법이기도 했다. 많은 시행착오와 고통 끝에 1년쯤 지나니 내가 뭘 하고 있고, 뭘 하게 될지 정신이 들었던 것 같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큰 회사니까 일부 구성원들이 자리를 잡을 때까지, 나 하나를 빼더라도 전체 총합계에서는 여유가 됐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신입사원 때 쓰던 손바닥만 한 분홍색 노트에는 황급히 써갈긴 문제와 당황들이 가득하다.
호텔 플라워팀은 주말 웨딩을 기준으로 반복적으로 돌아간다. 월요일은 웨딩에 쓸 기물을 준비하고, 화/수는 그 주에 쓸 꽃들을 정리한다. 수요일에 대부분의 꽃이 들어오고 호텔 정기관리도 있기 때문에 바쁘다. 보조작업장으로 배달된 꽃 십여 박스를 풀어 정리하고 그걸 다시 각 웨딩 섹션별(포토, 신부대기실, 화병, 무대, 입구 등등)로 나누고, 그 외의 프로포즈 패키지와 웨딩 목업, 주문 꽃다발 등으로 나누려면 빠듯하다. 제일 어려운 것은 꽃 이름 외우기인데 1월에 처음 왔을 때는 꽃 이름의 95%는 몰랐던 것 같다. 각 섹션에 필요한 꽃 종류와 수량이 나와있는 리스트대로 정리된 꽃들을 냉장고에서 꺼내 모아야 하는데 이 핑크색 장미가 고르키파크인지 쉼머인지 저 흰 장미는 오하라인지 마르샤인지, 이 스프레이 장미는 자나인데 저건 왜 부부젤라인지 알 수 없었다. 꽃들에 더해 그린 소재는 조팝나무, 청사철, 탑사철, 청지, 유니폴라, 이반호프, 폴리안/블랙잭/시네리아 유칼리툽스들과 아직도 이름을 알 수 없는 푸르고 신기한 이름의 고사리들까지 흰 종이에 적힌 검고 낯선 이름에서 꽃과 풀들을 떠올리기가 쉽지 않다.
다행히 호텔은 가게들에 비해 들어오는 꽃의 종류가 일정한 편이고, 리스트에 적힌 이름과 꽃을 반복적으로 익히다 보면 점점 모르는 게 줄어든다. 꽃 정리를 하면서 박스에 적힌 이름들을 보기도 하고 몰래몰래 꽃 냉장고 안에서 꽃 이름을 검색해 찾아가기도 하면서 지금은 절반 정도의 꽃 이름은 알게 된 것 같다. 그 과정에서 잘못된 꽃을 가져가 실장님께 혼나기도 하고, 다른 플로리스트들과 몰래몰래 꽃 냉장고 안에서 서로 꽃을 찾는 걸 도와주기도 했지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 건 기다려 줄 수 있는 여유이다.
사실 꽃 하나 찾는데 빠르고 느려야 얼마나 차이가 날까. 꽃 냉장고 안의 여러 물통들에 나눠 꽂혀있어도 두 걸음쯤 일 테고, '그거 아냐, 그거 옆에 거' 정도의 지시만 들어도 대강 무엇인지 알 수 있을 정도의 감각은 있다. 2시에 꽃꽂이를 시작하나 2시 반에 시작하나 그 차이는 30분만큼이고, 우리가 조금 더 빨리 하면 조금 늦춰진 시간을 다시 당길 수도 있는 게 지금 일인 것 같다. 전 회사에서는 내가 30분 늦어지면, 팀장님 검토가 늦어지고 그 사이에 다른 유관부서 팀장님들이나 점장님 일정이 다시 끼어들어 단거리 선수처럼 달려야 할 때도 있었다. 큰 조직일수록 여러 일들이 얽혀있었고, 때문에 오히려 서로를 기다려 줄 수 없었다는 걸 다시 깨닫는다. 일과 그 일을 하는 사람을 더 미워하지 않아서 다행이다.
전 회사를 다닐 때도 기다려줄 수 있는 여유가 있는 사람이 되고 싶진 않았다. 대기업이 여유 있는 일이 있을까. 내 한몫 잘해서 열심히 자글자글 굴러가는 톱니바퀴가 되는 게 훨씬 좋다고 생각했다. 큰 톱니들과 달리 작은 톱니들은 간격이 촘촘하고, 서로 이가 맞물리지 않으면 오히려 더 겉돌게 되기에 남에게 방해되지 않고 성실하게 꼬박꼬박 굴러가는 게 좋은 실무자라고 여전히 믿는다. 지금 플로리스트로 호텔에서 일을 하며 기다려줄 수 있는 여유를 만든 팀과 팀원들에게 고마움을 느낄 뿐이다. 이 여유는 물론 한시적이겠으나 그래도 그 틈을 만들어 내기 위해 다른 팀원들은 조금 더 인내하고 조금 더 부지런하고 있을 것이다. 여유 없이 빡빡하게 굴러가는 작은 톱니들에게는 존경을, 모두를 위해 조금 기다려 줄 수 있는 여유를 만든 지금의 팀원들에게는 감사를 보낸다.
큰 회사일수록 작은 톱니들이 중요하다. 회신하라는 거 제 때 하고, 협조해달라고 사전에 요청이 왔으면 미리미리 검토하시길. 못된 톱니 때문에 좋은 톱니들이 도망가고, 어 이거 뭐야 하고 삐그덕 대는 소리가 들린다면 속은 이미 텅 비어있을지 모른다. 능력 좋은 부장님들로만은 팀을 꾸릴 수 없다. 작은 톱니바퀴 만세.
지원부서에서 일을 하며, 소수만 알아주는 반복적인 일들을 처리하는 데 뿌듯함을 느끼기도 했다. 매달 해야 하는 일이지만 그래서 더 중요하고, 점점 더 빠르고 정확하게 그 일을 처리하는 모습에 자부심도 느꼈다. 하지만 임원실 앞에 걸리는 우수 직원 액자에는 3년째 내가 없었고, 인사팀에 나의 중요성을 성토한 끝에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새롭고 획기적이고 임팩트 있는 일들이 칭송받지만, 누군가 하는 일상의 업무가 우리와 조직을 지탱하고 있다. 다시 한번 작은 톱니바퀴 만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