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들 데리고 미술관 가봐야 1도 기억 못 해라고 타박하던 나를 반성하며
친구가 아빠가 되었습니다. 아내 만으로도 힘든 경쟁인데, 이제 딸이라니 아빠를 친구로 둔 사람들은 포디움에서 내려갈 준비를 해야 합니다. 산성역으로 이사 간 아빠가 출산휴가 중 야간 등산이든 러닝이든 뭔가를 하자고 연락이 왔어요. 어제부터 장마가 시작돼 얄궂긴 하지만 어떻게든 시간을 짜내고 있습니다. 지난 수요일 꽃집에 놀러 온 또 다른 어느 따님의 아빠인 친구와 점심을 먹으며 이 이야기를 했는데, 출산 휴가 중에 친구랑 야간등산을 가는 것은 다시는 그 친구를 볼 수 없게 되는 리스크를 안고 있다고 겁을 줬어요. (크게 말렸습니다. 둘 다 혼나고 싶냐고도 했어요.) 이 친구에게는 해바라기를 안겨 집으로 보내고 신규 애아빠에게 상황이 괜찮냐, 협조가 다 된 사항이냐 확인했습니다. 집과 가까운 곳으로 가는 거고, 양해를 구해뒀대요. 괜찮다고 하니 괜찮은 거겠죠.
야간등산을 할 수 있는 산이 많이 없습니다. 장비를 갖추지 않고 라는 조건을 붙이면 서울의 그 편리한 산들도 후보에서 지워져요. 한 번은 검단산을 도전한 적이 있는데, 초입에서 바로 돌아 나왔습니다. 헤드랜턴을 끼고 산에 오르는 건 별로예요. 시야가 딱 조명만큼 잡히고, 머리와 발도 긴장을 많이 해야 합니다. 남한산성은 산성 오르기 전부터 산성까지 등산로에 조명이 다 되어있어요. 더운 날이나 바쁜 일정들을 피해 야간 등산을 한다면 생각나는 저에게는 유일한 선택지입니다. 친구네 집이 산성역이니 출발과 복귀에 걱정이 덜하고, 이사를 앞둔 저에게도 그나마 가깝게 갈 수 있는 마지막 남한산성행이 될 것 같아 오늘 밤도 때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오늘은 밤에 비가 오지 않을 거란 예보를 빕니다.)
코스를 어떻게 짜야 하나 구글로 검색하던 도중에 남한산성 등산에 대한 글이 있더라고요. 브런치의 글들은 은근 정보가 많은데, 작가의 취향이 꽤나 들어가 있어서 다른 곳에서 개략적인 것들을 익힌 채 읽으면 아 요고 괜찮다, 이 코스는 별로다 하는 느낌이 정보와 섞여 저항 없이 들어옵니다. 이건 어떨까 하는 마음으로 글을 조금 읽었는데 뭔가 너무 저항이 없었단 말이죠? 알고 보니 2022년에 쓴 제 글이었습니다. 조회수가 500이 넘었다니, 내놓은 식물처럼 어찌저찌 살고 있었나 봅니다. 아쉽게도 친구들과 낮에 성곽 종주를 한 글이라 크게 보탬이 되지 않았어요. 끝나고 먹은 삼겹살이 끝내줬다는 기억만 되살아났습니다.
저는 아이들을 데리고 미술관이나 박물관 같은 '어려운' 곳을 가는 것에 크고 조용하게 반대하던 사람이에요. 우선 저에게 방해가 되고, 아이와 부모에게도 그 시간이 가치 있지 않다고 확신했거든요. 그 시간에 좀 더 리스크는 적고, 눈치는 덜 봐도 되며, 더 행복한 시간을 보낼 곳이 많다고 짐작합니다. 하지만 얼마 전에 '지금은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6살의 기억이 7살에는 남아 다시 8살의 아이를 만들어 내고, 그렇게 지금까지 영향을 준다.'라고 말하는 글을 읽었어요. 가만히 앉아 고민해 보니 그럴 것 같습니다. 미술관을 잘 알지 못하고, 아이의 취향이 아니더라도 (그것도 가봐야 아는 것이니까요) 한번 가보고, 그때의 경험으로 다른 미술관을 가거나, 가지 않고, 조용하거나 활기찬 분위기나 사람들의 옷차림, 액자 위에서 조명을 받고 있는 그림들이나 건물 그 자체에 대한 경험과 선호가 남을 것이고 그것은 다음 날에, 다음 해에 영향을 줄거라 생각합니다. 테세우스의 배 같은 거예요. 저는 이 문제에 4차원주의 답을 선호하기 때문에, 수리되고 수리될 모든 조각들이 테세우스의 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6살에 간 미술관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7살과 그 7살이 행한 것들로 남은 8살, 9살, 그리고 지금까지가 모두 남아있는 거겠죠.
출산 휴가 중에 친구랑 등산을 다녀왔다고? 의 기억이 아내분께 남아 올해, 내년, 그리고 한참 뒤까지 혼나지 않기를 빕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적절한 타이밍과 사전 양해, 큰 보상 같은 것들을 준비해야 하겠죠. 이 산행이 잘 끝난다면 기쁜 소식과 정보로 돌아오겠습니다.
ㆍ요 며칠 싱숭생숭했는데, 글을 적다 보니 마음이 전체적으로 골라진 것 같아요. 꽃집의 일상과 이주 전의 도쿄 여행 덕에 뭔가 잔뜩 쌓여있어나 봅니다. 오래 읽었으면 짧게라도 써야 한다고 다시 깨닫습니다.
ㆍ미술관 하니 이번에 다녀온 도쿄 서양미술관이 생각납니다. 상설 전시관 입장료가 500엔인데, 현대카드 이용자는 무료입장이 가능해요. (특설관은 입장 불가, 혜택이 종종 바뀌니 기간과 내용을 미리 확인하세요.) 현대카드 앱 일본 제휴 서비스에서 이용할 수 있는데, 도쿄에 가신다면 확인 후 이용해 보시는 걸 권해드려요. 저는 더운 날을 피해 꽤나 재미있게 봤습니다.
ㆍ지난주 토요일 꽃집에서 브라이덜 샤워 대관이 있어 대청소를 했는데. 글도 쓰고 깨끗하게 청소된 꽃집을 보니 기운이 납니다. 날씨와 매출 덕에 처질 뻔 한 기분을 마크해 주는군요. 역시 물리가 우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