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견한 보물 같은 서점들
속초에 다녀왔다. 27살 생일을 앞둔 1월 어드매. 기차 여행에 로망이 있는 나로서는 강릉이 더 가고 싶었지만 김상욱 교수님의 페이스북을 보고 마음을 바꿨다. 페이스북에는 속초의 서점, 문우당 서림에서 강연을 할 예정이라는 글이 올라와있었다. '강연 때문에 속초를 간다고?' 조금 오버스럽지 않나 싶었지만 가보고 싶었던 서점에서 듣고 싶었던 강연이라니. 여행의 이유는 그걸로 족했다.
시간이 넉넉하지 않은 탓에 일부러 문우당서림과 가까운 게스트하우스를 머물기로 했다. 짐을 얼른 내려놓고 서점으로 향했다. 건물마다 어둠이 가라앉고 거리는 한산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속초는 낮엔 관광객들로 북적거리지만 실 거주 인구는 많지 않다고 한다. 꽤 씩씩한 성격인데도 외지의 여자 사람이 낯선 거리를 혼자 걸으려니 조금 위축되려던 순간 문우당 서림의 불빛이 반겨주었다. 문 앞에는 강연을 소개하는 안내판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예정된 시간보다 1시간 남짓 여유가 있어 서점을 둘러보기로 했다. 로컬서점을 구경하는 일은 늘 즐겁다. 특히 2층에는 독립 출판물들과 MD들이 즐비했고 책마다 덧붙여진 소개글을 읽는 재미가 쏠쏠했다. 어느새 8시가 되자 서둘러 자리에 앉았더니 문우당서림의 총괄 디렉터인 이해인 님이 짤막하게 강연을 소개했다. 뒤이어 김상욱 교수님이 꺼낸 얘기가 놀라웠다. 사실 (알쓸신잡에 출연한 이후) 요 근래 무지막지하게 바빠져서 온갖 부탁을 거절하고 있는데 해인님의 메일은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글인지라 이 자리에 왔다고 한다. 아니, 어떤 글을 쓰면 한 사람의 시간을 빌어올 수 있는지 그 순간만큼은 교수님보다 디렉터님이 궁금해지고 사람을 사로잡는 글솜씨가 너무너무 부러워졌다. 강연은 기대한만큼 정말 좋았다. 내용도 내용이거니와 넓지도 좁지도 않은 공간에서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과 어떤 주제에 대해 경청하는 분위기도 새삼 오랜만이었기 때문이다. 강연이 끝나고 어수선한 분위기에 얼른 숙소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도 들었지만 서점 사람들에게 작게라도 나마 보답하고 싶었다. 이번 여행의 동기를 만들어주고 또 이렇게 좋은 시간을 마련해주셔서 감사하다는 뜻으로 엽서 세트와 책 한 권을 샀다. 인상이 푸근한 남자 사장님께 감사하단 말을 남기고 게스트하우스로 돌아갔다.
다음 날, 아침 일찍이 동아서점으로 향했다. 커다란 창가에 빛이 한가득 들어와, 책 표지들이 반짝반짝거리는 풍경이 정감이 가는 서점이었다. 오픈 시간에 맞춰가서 서점에 나 혼자였고 그게 좀 뻘쭘했지만 꿋꿋이 서점을 둘러봤다. 한 시간쯤 됐을까 동아서점의 베스트셀러이자 동아서점의 이야기를 담은 책 '당신에게 말을 건다'를 포함 친구들에게 선물할 얇은 책 몇 권을 샀다. 돌아갈 버스 시간이 아직 좀 남았고 어젯밤의 짧은 체류가 아쉬운 마음에 다시 문우당서림을 방문했다. 곧장 2층으로 올라가서 독립출판 서적을 훑어보는데 여자 사장님이 '안 되겠다, 또 손님에게 잔소리하겠다'며 다가오셨다. 방금 집어 든 맑음에 대하여는 독립출판물 중에서도 인기가 많아 최근엔 구하기 힘들었고 김영하 작가님은 알쓸신잡 촬영 때 개인적으로 사갔다며 귀띔해주셨다. 이거랑 사랑의 몽타주는 안 사가도 좋으니 샘플 책이라도 한 번 보시면 좋겠다고.
나는 여자 사장님의 다정한 참견이 기뻤다. '사실 어제 강연 보러 왔는데 그냥 가기 아쉬워서 구매한 책이 사랑의 몽타주거든요! ' '어제도 오셨어요?' '네, 근데 아쉬워서 또 왔어요' 소곤소곤 목소리를 낮춰 사장님과 짧은 수다를 나누는데 내 동아서점 쇼핑백을 보시더니 거기도 다녀왔는지 물으셨다. 아차-실례인가 싶었는데 오히려 가까워서 손님들이 이 서점, 저 서점 둘러보는 게 좋다고 하셨다. '거긴 리뉴얼해서 깔끔하죠? 우리는 좀 이곳저곳 때가 타서...' '확실히 창이 커서 시원시원한 느낌은 있더라고요. 여기는 가정집처럼 따뜻한 분위기구요. 각각의 매력이 있어요.'
떠나야 할 시간이 점점 다가오자 좀 더 떠들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고심 끝에 책 몇 권을 더 골랐다. 그보다 훨씬 넉넉하게 스티커, 책갈피 등을을 챙겨주시는데 도저히 다시 오겠습니다는 말을 안 할 수가 없었다. 해인님이 어떤 글을 썼는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글이었다는 상욱 교수님의 말은 과장이 아니겠구나. 이 서점을 운영하는 분들의 마음씨가 그러하였다.
점심을 먹고 짐을 정리해보니까 어느새 책이 대여섯 권이 생겨버렸다. 어쩐지 가방이 무겁더라니. 이걸 매고 돌아다니기는 지쳐서 근처 카페에 들어갔다. 홍콩 영화가 연상되는, 독특한 분위기의 장소였는데 역시나 다소 이른 시간이라 그곳을 혼자서 전유하는 행운을 맛보았다. 흰 벽과 초록색 잎사귀가 살랑살랑거리는 화분을 배경 삼아 동아서점에서 구매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중간중간 울컥하는 대목이 몇 번 나와서 턱을 벅벅 긁었다. 어젯밤처럼 내용도 내용이거니와 독서를 하는 이 시간, 공간도 너무 맑아서. 아, 어쩐지 속초가 너무나 그리워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