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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iel May 06. 2016

영화를 여행하다,
'오만과 편견' 촬영지에서

 영국 더비셔 Chatsworth House 방문기

It is a truth universally acknowledged that a single man in possession of a good fortune must be in want of a wife.
                                                                                                            - Pride & Prejudice, Jane Austen


2005년 개봉한 영화'오만과 편견'을 보고, 나는 영미 문화에 사로잡혀 처음으로 원서를 샀고 문학을 사랑하게 됐다. 어쩌면 인문학을 전공으로 선택하게 된 것도, 영화를 즐겨보기 시작한 것도 이 작품 덕분일지도 모르겠다. 이것이 이어져 작년 9월의 여행에도 영향을 미쳤다. 4박 5일이라는, 런던만 구경하기에도 모자란 일정이었지만 나는 꾸역꾸역 하루를 비웠다. 바로 '오만과 편견'의 촬영지 Chatsworth House를 가기 위해서


리지가 자신의 마음을 확인한 곳
영화 속 Chatsworth House

영화 속 Chatsworth House는 다아시의 Pemberley 저택으로 나오는데, 영화 흐름상 제법 중요하다. 간략히 앞뒤 설명을 하자면, 사실 리지는 몇 가지 이유로 다아시의 프러포즈를 아주 냉정하게 거절한 참이었다. 게다가 자신의 오해로 비롯된 것임을 나중에 깨닫고 울적하기까지 했는데, 사정을 알 리 없는 삼촌 내외는 그저 저택이 아름답다던데 잠깐 구경하자며 리지를 데려간다. 핑계를 대긴 했지만 통하질 않아, 그녀는 울며 겨자먹기로 프러포즈를 거절한 남자의 집을 제 발로 들어간다. 하인의 안내와 함께 저택을 구경하는 중에 그녀는 다아시의 조각상을 발견하고, 알 수 없는 감정에 휩싸인다. 그러니까 Pemberley는 리지가 자신의 마음을 다시 확인하게 된 장소라고 말할 수 있다.


영화 속 중요한 장소라서 방문을 결심한 이유도 있지만, 무엇보다 영화 속 보이는 저택 곳곳이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실제로 Chatsworth House는 영국 내에서도 아름다운 저택으로 유명해, 영화 및 드라마의 촬영지로 자주 쓰이는 곳이라고 한다. 위치는 더비셔(Derbyshire) 지역으로 런던에서 기차로 2시간 정도 걸리는 Chesterfield나 Shefield역에 내려서 버스를 타고 40분쯤 가다 보면 도착한다. 시간이 많이 소요되는 듯해도 가는 동안의 풍경이 아름다워서, 지루한 감도 없었다. 특히 버스는 Peak District 국립공원 주변으로 돌아서 아름다운 자연을 덤으로 구경할 수 있다.


16세기부터 이어진 Chatsworth House

약 16세기에 지어진 저택으로 알려졌고, 현재도 Cavendish 귀족이 살고 있어 저택은 일부분만 개방하고 있다. 그러나 저택이 워낙 크다 보니 일부분만 보는 것도 꽤 시간이 걸린다. 정원까지 구경하려면 최소 2-3시간은 잡아야 한다. (참고로 크고 아름답다 보니 입장비가 대략 20파운드로 현재 환율로 환산하면 3만 4천 원에 달한다. 교통비 별도) 개인적으로는 오고 가는 시간까지 생각하면 최소 4시간은 머물러야 시간과 돈이 아깝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위의 두 사진은 입장권을 끊고 들어가면 바로 보게 되는 로비(?)이자 일명 Painted Room이다. 벽과 천장에서 볼 수 있듯이, 박물관에서 볼 법한 그림들이 그려져 있다. 여기를 지나면 여러  방을 볼 수 있는데, 실제로 사용했던 가구나 식기 등은 물론이거니와 지금까지의 컬렉션을 곳곳에서 살펴볼 수 있었다. 16-18세기 영국 귀족 문화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정말 행복한 비명을 지를만한 환경이었다.

보자마자 감탄이 절로 나온 곳은 서재와 조각상을 모아둔 갤러리였다. 좌측의 사진이 바로 서재인데, 특유의 분위기를 사진에 제대로 담지 못해서 아직도 속상하다. 같이 구경하는 사람들도 서재만 보면 입이 떡 벌어져서, 발걸음을 쉽게 떼지 못했다.



무엇보다 가장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곳은 Sculpture gallery 였다. 우선 영화에서 봤던 장면 그대로라 감회가 몹시 새로웠다. 이쯤 되니 Chatsworth house가 아니라 Chatsworth Museum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특이한 점은 영화에서는 다아시 조각상이 갤러리 내부에 위치했는데, 지금은 갤러리를 지나면 바로 나오는 기념품 샵으로 옮겨져 있다. 'Do not kiss him'이라는 작은 경고판과 함께.

기념품 샵에는 Jane Austen 관련 상품이나 더비셔 특산품도 함께 구비되어 있어서, 샵을 구경하는데도 시간이 꽤 오래 걸렸다. 어찌나 갖고 싶은 게 많던지, 고민 끝에 깃털이 달린 딥펜과 엽서 몇 장을 구매했다.


호수와 미로가 있는 정원

저택을 나오니 파란 하늘과 푸른 정원을 볼 수 있었다. 마침 점심시간이라, 미리 싸온 샌드위치와 과일 도시락을 들고 피크닉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처음 사진에서도 볼 수 있듯이, 저택 앞에는 넓은 호수가 있다. 그 옆에 울창한 나무 밑에 돗자리를 깔고 점심을 먹었는데, 지금 생각해도 생애 최고로 평화로운 점심시간이었다.


장소가 아름다운 것도 있었지만, 날씨가 한몫했었다. 풀밭에 누워서 오리랑 놀기도 하고, 호수의 잔잔한 물결도 구경하면서 내부를 구경하느라 부었던 다리를 풀기도 했다. Kings of Convenience 노래를 배경 음악으로 삼아 낮잠을 청했는데 어찌나 기분이 좋던지, 그때의 감정이 아직도 떠올라 글을 쓰면서도 실실 웃고 있다.


슬슬 기력이 회복되고 본격적으로 정원을 구경했다. 정원의 크기가 거의 동네 하나와 맞먹어서, 다 둘러보려면 꽤 오래 걸린다. 제일 신기했던 곳은 동화책이나 디즈니 애니메이션에서 볼법한 미로였다. 은근히 난이도가 있어서 빠져나가는데 고생 좀 했었다. 그래도 몇 번씩 마주치면서 겸연쩍은 미소로 인사를 대신했던 사람들과 마지막에는 빠져나오자마자 하이파이브를 하기도 했다. 

미로를 빠져나가고 좀 걷다 보니 사람들이 아이스크림을 들고 있었다. 미로 탈출에 열을 내다보니 마침 시원한 게 먹고 싶었는데, 조금 걸어보니 아이스크림 트럭이 있었다. 꼭 나뭇가지 같은 가니쉬도 추가해달라고 받은 아이스크림은 꼭 그림으로 그려낸 것 같았다. 참고로 아이스크림까진 맛있었는데, 과자는 진짜 맛이 없었다. 아무튼 옆으로 걸어가 보니 신기한 건축물이 하나 있었다. 일명 Cascade라는 인공 폭포였다. 미로 때도 느꼈지만 내가 알고 있는 정원은 정원이 아니라는 게 새삼 느껴졌다. (인공 폭포와 미로 정도는 있어야 정원...)

마지막으로 인공 화실까지 구경하고 나서야, 비로소 정원 구경이 끝났다. 개장 시간인 9시에 맞춰 들어왔는데 정원을 다 둘러보니 4시가 다 됐다. 곧 퇴장시간이기도 하고 슬슬 허기져서, 저택 밖에 있는 카페테리아에 들어갔다. 티를 사랑하는 나라답게 애프터눈 티를 즐길 수 있었는데 런던보다 훨씬 저렴한 가격이었다. 다만 더비셔가 사투리가 심한 지방에 속하다 보니 종업원의 말을 알아듣기가 힘들었다. 이른 저녁까지 먹고 나니, 기차 시간이 다가왔다.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다음에 다시 오겠다고 스스로를 달래고 기차에 몸을 실었다.


운 좋게도 런던으로 돌아가는 기차에서는 석양을 마음껏 구경할 수 있었다. 시작부터 끝까지 마음에 들지 않는 게 없었던 하루였다. 신기한 것은, 나중에 다시 영화를 감상했더니 오묘한 감정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지금까지 수십 번 돌려 본 영화인데 말이다. 어쩐지 10년 동안 품고 있었던 버킷리스트를 하나 지웠지만, 다른 버킷 리스트가 여러 개 생기는 듯한 기분이다.


뭐 어때? 앞으로도 어떤 곳을, 어떤 감정을 마주하게 될지 벌써부터 설레이는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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