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생과 사가 정신 없이 교차하는 무대 같다.
이십몇년밖에 안 산 애송이가 하기에는 시기상조인 말 같지만, 요즈음은 정말 그렇게 느낀다.
차분히 책상에 앉아본 지가 얼마만인지.
그 사이 마드리드에서 돌아온지 2주가 넘어갔다.
어쩌면 모든 것이 내 마음먹은 대로 흘러가는 순간이 기적같은 때일지 모른다. 제 계획대로 흘러가는 인생은 어디에도 없겠지.
비행기에서 한국에 들어오자마자 해야 할 일들을 빼곡이 적어두었는데
귀국하자마자 장례를 치르고, 후에는 몸살과 장염을 연이어 앓느라 주인도 모르는 새에 이미 달의 절반은 넘어갔다.
마드리드에서도 탄핵 뉴스를 수도없이 들여다보왔으니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돌아오자마자 느꼈다.
그래 이 맛이지-,
도저히 준비가 될리가 없는 쓴 맛.
서울의 공기는 추위 속에 패배감과 씁쓸함이 감도는 것 같아 건드리기가 힘들다.
서울 돌아가는 동향을 몰라서 자주 가던 가게를 들리러 1월 첫 주에 한남동에 갔다.
하필이면 버스를 타고...
1시간 가까이 갇혀있던 버스가 간신히 한남대로에 진입하니 반대편 대로에서 길고 긴 시위대가 차도의 방향을 거슬러 줄을 지었다.
날이 많이 추웠다.
바람이 찼고, 사람들은 거침없이 걸었다. 모두 아는 그 곳으로 올라가는 중이었다.
뉴스고 SNS에서고 몇번이고 봤던 풍경인데 눈 앞에 나타나니 조금 당황했다. 내 나이 또래의 여성들도 많았다.
가만히 서서 시위대의 마지막 인파까지 이태원로를 오르는 걸 지켜봤다.
지금와서는 그러지 말았어야 됐다는 생각이 든다. 인파의 대열이 아주 길었으니 가까운 편의점에 뛰어들어가 핫팩이라도, 따뜻한 음료라도 그 줄의 아무에게 건넸어야 했다.
살면서 낯선 이에게 무엇도 건네본 적은 없지만 어쩔 때는 그런 수줍음 따위가 중요하지 않다. 그런 건 잊어버리고 그들과 달리 거리에 정지된 채 시간을 벌게 된 내가 할 수 있는 무엇이라도 하는게 좋았을 것이다.
조금 멍해지니 시위대의 끝이 보였고 나는 부채감을 안은 채 집으로 돌아왔다.
시위대 인파가 지나간 한남동은 눈에 띠게 인파가 적었고 활기가 없었다. 골목골목의 공실은 그새 더 많아졌다.
도망친 곳에서 천국은 없댔나, 뭐든 멀리서 봐야 희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랬나,
언뜻 보면 1년 내내 햇빛이 쨍쨍하고 느긋하게 여유를 즐기는 사람들만 있을 것 같은 스페인도 실상 살아 보면 서울과 크게 다르지 않다.
예상보다 날씨는 구져서 가끔 햇살이 흩날리면 길 가다가 무릎 꿇고 감사인사를 올려야 한다.
연신 여유롭고 꺄르르 거리는 사람들만 가득하댔는데 왠걸, 대중교통이고 비행기고 서기도 전에 일어서서 내릴 준비하는 건 여기도 똑같다. 핸드폰만 들여다보는 피곤에 쩌든 사람들로 가득찬 출퇴근길 지하철도 똑같다.
길 걷다가도 눈 마주치면 이유 없이 웃어준다는 이야기는 전설에 불과해서, 마드리드 사람들도 귀에 에어팟 꼽고 갈 길 가기 바쁘다. 뜬금없이 말을 거는 사람은 취객이나 마약 중독자, 좋게 쳐줘도 호객행위일 가능성이 높으므로 피하는 게 좋다.
외국인이라면 더더욱 쉽지 않다. 비자와 까다로워지는 이민 정책, 넘기 어려운 인종이라는 벽,
세상 어디에도 완벽한 천국은 없다는 걸 다시금 깨달았다.
하필 도망쳐오기도 했고 졸업까지 앞둔 시점에서 마드리드까지 안고 갔던 고민 한 가지가 있다.
이렇게 소용돌이치는 세상에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일단 이 세계를 뛰쳐나가버리지는 않기로 결정했다.
12월을 지나면서는 옳은 일을 하는데 있어 세계에 희망이 있냐 없냐가 충분조건이 아니라는 것도 대강 알았다.
완벽한 천국은 어디에도 없지만, 천국이 아니라고 해서 다 지옥이 되란 법도 없다는 걸 함께 느꼈다.
그렇다면 어떻게 내가 지금 있는 곳을 지옥이 아니라 견딜 만한 인간 세상으로 만들 수 있을까?
역시 완벽한 묘안이 있는 건 아니지만, 그나마 효과적인 방법을 스페인에서 배워오긴 했다.
웃자.
자주 웃고, 많이 웃자.
말했듯이 스페인도 똑같이 사람 사는 곳이라 한국보다 대단히 반짝거리는 곳이 아니지만,
한국보다 더 나은 점이 있다면 그래도 사람들의 얼굴이 덜 경직되어 있다는 점이다.
시종일관 미소를 짓고 있는 건 당연히 아니지만, 마주치거나 대화할 때 훨씬 표정이 밝다.
한국은 웃을 일도 별로 없고, 웃어줘봤자 무시하는 사람도 많아서 경직된 표정이 유리하다고 생각해서 나도 그렇게 했다.
짧은 시간이지만 마드리드에 살면서 이곳 사람들에 동화되다 보니 내 표정이 한결 밝아진 게 스스로도 느껴진다.
미소로 환대해주는 사람들에게 많은 하루를 빚지면서
함께 웃으니 사는 게 덜 버겁더라.
이번달에도 어김없이 복작복작한 과제가 쌓여있지만,
보통의 날들에 웃음기를 머금고 일상의 과제를 하나씩 씩씩하게 해결하는 1월이 되기를.
1월은 생과 사의 교차가 나를 마구 헤집어놓는 달이다.
우리 집은 오래전부터 음력 생일을 셌다. 부모님은 아직 음력으로 생신을 챙기시고, 나도 양력 생일을 세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다.
나는 음력으로 증조모의 제삿날에 태어났다. 그러니까 우리 엄마는 아빠의 가족들이 할머니 제사를 드리는 날에 두번째 여자아이를 낳은 거다.
몇 번의 생일은 하루에 생일상과 제삿상을 모두 먹었다. 제사를 드리러 가면 먼 친척들은 오늘이 나의 생일이라는 것을 몰랐고, 사실 별로 중요하지도 않았다. 나는 할머니, 아빠와 함께 딸려온 작은 식구 역할이었으니 그에 맞춰 조용히 제사를 드리고 오곤 했다. 모든 해에 제사를 드리러 간 것도 아니었고, 이런 우연이 있나- 하고 별 의미부여는 생략해도 되지만 어린 마음에 기분이 좋지 않았다.
성인이 돼서 양력으로 생일을 세기로 한 데에는 여러 편의상의 이유도 있지만, 심정적으로 가장 큰 이유는 이것 때문이 가장 크다.
양력으로 생일을 세기로 한 첫 해에 가족들과 모여서 저녁을 먹던 중에 엄마의 전화벨이 울렸다. 병원에 계신 외할아버지가 상태가 좋지 않으시다는 전화를 받고 부모님은 급히 집을 나섰다.
언니와 나는 집에 남아 저녁상을 치우고 괜히 불안한 마음이 들었던 우리는 한 방에서 같이 밤을 세기로 하고 이부자리를 폈다. 스탠드를 키고 할일을 하던 언니를 머리맡에 두고 나는 깜빡 잠이 들었다.
조금 있다 언니의 통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고, 통화를 마친 언니는 나를 흔들어 깨웠다. 그날 새벽에 외할아버지는 돌아가셨다.
그리고 올해 1월 첫째주, 마드리드에서 돌아온지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은 어느 날 비슷한 새벽에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
사실 이상할 건 아니다.
1월은 원래 장례가 많은 달이라고 한다. 병환이 앓으셨던 분들에게 유달리 추운 1월은 힘든 계절인 데다, 1월이 100날이 있는 게 아니라 고작 31일 뿐이니 이 정도 날짜가 겹치는 우연쯤은 있을 수 있다.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아도 된다는 걸 알지만, 조금 충격이었다.
1월이 정말 싫어질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