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 교장님의 간암 소식을 듣고 마음이 무너져 내리는 줄 알았다.
누구보다 둘이 친했고 누구보다 더없이 좋은 사람들이었는데 남편을 허망하게 떠나보내고 얼마 되지 않아 류 교장님 소식을 들었을 때, 전화기를 붙잡고 한참을 울었다. 이겨내겠다는 의지가 강하셨다. 자연 치유하는 곳에서 조금 회복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오면서 정말 간절하게 기도를 했다. 회복시켜 주시라고. 3년 전의 일이다.
가끔 안부 전화를 통해서나 모임에서 스칠 때면 조금씩 조금씩 나빠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건장했던 모습이 야위어가고 낯빛이 점점 좋지 않다.
두어 달쯤 전 마지막 통화에서는 많이 약해지셨다.
“잘 먹지를 못해. 통 삼켜지질 않네. 살살 걸어보려고 하는데 힘들어.”
“한 번 뵈러 갈게요.”
몇 주 전, 전화를 드렸는데 받지를 않으신다. 아는 사람을 통해 들으니 병원에 입원을 하셨단다. 아무도 만나지 않으신다고. 남편이 있던 대학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은 마음을 무너 내리게 한다. 그 병원이 아니었다면 한 번 들러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문득 안 되겠다 싶어 병문안을 나서려다가도 도저히 그 병원에 발을 디밀 자신이 없어 망설이던 며칠이 지나고, 허망하게도 소천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말았다. 망설이지 말고 그냥 찾아뵐 걸, 그랬어야 했는데..... 밀려오는 자책으로 힘들었다.
차는 그냥 집에 두고, 택시를 타고 장례식장으로 가는 내내 눈물이 멈추질 않는다. 그 따뜻했던 목소리, 환하게 웃던 류 교장님의 모습이 자꾸만 떠오른다. 남편의 장례 이후 이 병원 앞도 지나가지 못했는데, 나는 저 계단을 내려가 지하 장례식장으로 들어가야만 했다.
30년을 넘게 형님 아우 하며 지낸 사이니 장례식장에 모여 앉은 조문객들도 익숙한 얼굴들이다. 함께 눈인사만 나눠도 눈물이 나는 사람들, 남편을 떠나보내고 울던 사람들이 3년도 되지 않아 류 교장님을 떠나보내고 빨개진 눈으로 들어서는 나를 바라본다.
“에잇, 수민이 수진이 시집 장가보내겠다고 큰소리치더니만 저렇게 가 버렸다. 흐흑.”
나를 붙잡고 남편의 후배이기도 한 안 선배가 말한다. 머리가 하얗게 센 오십을 훨씬 넘긴 선배가 펑펑 운다.
맞다. 남편의 장례식장에서 우리 수민이 수진이 모두 시집 장가보낸다고 류 교장님이 말했었다. 경황없는 나 대신 장례의 모든 절차를 대신해 주던 고마운 분이었다.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던 나 대신, 가까워 오가기 좋을 것이라며 추모공원도 정해주셨다. 남편을 보러 갈 때마다 류 교장님이 참 좋은 곳으로 잡아주셨구나 감사한 마음이었는데, 저렇게 또 한 분이 떠나 버렸다.
발인 날, 새벽에 잠이 깼다. 장지까지 따라가야 할까 싶다가도 도저히 따라나설 자신이 없어 침대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를 했다. 어느 곳인지 미처 물어보지 못했지만, 편안하게 잘 가시길.
항상 예감이 먼저 온다. 11시가 넘어 카톡 소리가 나는데 느낌이 이상했다. 카톡에는 사진과 함께 지인분의 메시지가 있다.
- 안 교장 옆에 형님 잘 모셔두고 갑니다.
- 혹시나 했는데 함께 모셨군요. 나란히. 덜 쓸쓸하겠네요. 마음이 아픕니다. 애쓰셨어요.
- 둘이 나란히 있으니 덜 외롭겠네요.
한참을 펑펑 울었다. 비워 있던 남편의 옆 자리에 류 교장님이 함께 나란히 잠든 사진 속 모습은 내 마음을 무너지게도 하지만 한 편 고맙기도 했다.
남편을 모셔놓은 추모공원 옆 자리가 이상하게 채워지질 않았다. 전에 아이들과 다녀오면서도 이야기를 나눴었다.
“이상하다. 그렇지? 이 자리가 참 좋은데 계속 비워 있네.”
“그러게요. 옆에 누가 들어오면 아빠가 좀 덜 쓸쓸할 텐데.”
“다른 곳은 이렇게 다 채워지는데 이상하게 아빠 옆 자리가 안 채워지네요.”
그 옆 자리에 류 교장님이 모셔진 것이다. 어찌 된 내막인지는 모르겠다. 류 교장님이 여기저기 알아보고 가장 좋은 곳으로 정해 주셨을 것이다. 류 교장님은 아마 자신이 무너져가는 것을 아셨을 테고 미리 예약을 해 두셨던 것일까? 아니면 우연일까? 나는 남편을 보러 오가는 길에 항상 두 다발의 꽃을 준비한다. 가끔 가보면 류 교장님 유족들도 남편에게 꽃을 드리곤 한다.
살면서 그렇게 붙어 다니며 형님 아우 하던 두 사람은 나란히 함께 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