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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샘 Dec 16. 2020

떠나 보낼 준비를 해야지

알면서 붙들고 사는 욕심이 누구에게나 한 가지쯤은 있다. 내가 해결해야 할 숙제는 딸아이다.    


딸아이는 고집이 센 아이였다.

초등학교 2학년 때 나는 우리 딸에게 완패했다. 작정하고 큰 맘먹고 사 준 예쁜 원피스를 사들고 왔을 때부터 고개만 살살 저으면서 입으려 들지 않았다. 계절이 바뀌고 몸집도 자라서 거금을 들여 산 너무도 예쁜 저 원피스를 남 주게 생겼다. 하루는 나도 작정을 하고 억지로 하얀 타이즈를 신키고 원피스를 입혔다. 이번에도 안 입겠다고 고집을 부리면 정말 엄마한테 매 맞고 학교 갈 줄 알라고 종주먹을 들이댔다. 입을 꼭 다물로 온몸에 힘을 주고 반항하는 중인 줄 뻔히 알면서도 모른 채하고 끝내 가방을 들려 현관 밖으로 내 몰았다. 

“도대체 이렇게 이쁜 옷을 왜 안 입겠다고 고집이야, 고집이. 이쁘기만 하고만.”

나는 내가 이긴 줄 알았다.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면 아이는 피아노 학원과 미술 학원 등을 돌다가 나보다 늦게 집에 온다. 여느 때처럼 아무 생각 없이 현관문을 열었을 때, 나는 그대로 한참을 서 있었다. 분명히 아침에 입혀 등 떠밀어 보냈는데 원피스와 타이즈가 나를 보고 웃는 듯 고스란히 놓여있다. 잠시 후 집에 들어서는 딸아이는 늘상 입던 쫄바지에 헐렁한 후드티 차림이다. 안 봐도 짐작이 된다. 소파에 앉혀놓고 차분히 물어보니, 가방을 메고 아파트 현관 주변을 서성이다가 내가 출근하는 것을 확인한 후 집에 되돌아와 옷을 갈아입고 학교에 갔다는 것이다. 결국 나는 우리 딸을 못 이긴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딱히 나쁜 짓을 하거나 버릇없이 행동하거나 그렇지는 않다. 그저 자기 하고 싶은 것을 반드시 하고 마는 아이인 것이다. 먹는 것, 입는 것, 그리고 시간 보내는 것, 하고 싶은 것을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하려는 의지가 강한 아이인 것이다. 크게 공부를 잘하는 것은 아니지만 잔소리를 하지 않아도 뭐든 알아서 한다. 물론 내 잔소리가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기에 내가 하지 않은 것도 한몫했을 것이다.     


교복 치마를 제멋대로 짧게 잘라서 입고 다닌다. 엄마한테 물어본다던가 선생님의 지적도 별 의미가 없다. 고등학교 때 슬슬 화장을 시작하더니 약간의 어색한 시기를 지나더니 화려하지 않지만 화사하고 뽀얗게 꾸미고 다닌다. 제법 값나가는 DSRL 카메라를 사 달라고 하더니 학교 사진반 활동을 열심히 한다. 친구들과 할머니, 할아버지 영정 사진을 찍어 드리는 봉사활동에 열심을 내기도 하고, 작품 사진을 찍는다며 새벽 출사도 다닌다. 대학을 진학한 후에는 연애도 열심히 하고, 주당으로 술도 잘 마시고 다닌다. 나는 좀 버거웠는데 딸아이의 그 고집스러움을 남편은 늘 좋아했다. 그런 딸아이를 보며 바보 같은 웃음을 웃었다.

“그럼, 그래야지. 사람이 고집이 좀 있어야 성공하는 거야. 으흐흐.”    


남편과 나는 심각할 정도로 붙어 다녔다. 맨날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에게 집중했기에 아이들은 제각각 자기들의 세계를 자유롭게 맘껏 돌아다니며 지내도 아쉬울 것이 없었다. 아이들은 그저 자기 세상을 열심히 헤엄치며 맘껏 지냈다. 자유롭게 살던 딸아이가 아빠가 돌아가시자 내 품으로 와락 들어왔다. 아빠를 보내 놓고 한 학기를 휴학을 했다. 딸과 나는 6개월을 거의 붙어서 살았다. 물론 아들도 곁에 있었지만 딸이라 그랬는지 더 밀착되었다. 아빠가 보고 싶으면 보고 싶은 대로, 울고 싶으면 울고 싶은 대로 아빠 애도 기간이라 괜찮다고 괜찮다고 서로를 보듬었다. 이제 각자의 자리로 되돌아가 자신의 일상을 살지만 딸아이와 나는 많은 시간을 함께 여행을 다니고 이야기를 나누는 소울메이트가 되었다.  


졸업을 마치고 여기저기 취업을 준하던 딸아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엄마, 이번에 함께 프로젝트했던 친구가 일본 IT회사에 지원서를 내 볼까 한 대. 나도 같이 넣어보자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해?”

“안 돼. 수진아, 엄마는 안 돼.”

“그치? 나도 친구한테 안될 거라고 말은 했어.”    


그날 잠을 못 이뤘다. 요즘처럼 취업하기 어려운 시대에 딸아이의 앞길을 막는구나 싶어 자책도 했다. 남편이 있었다면 혼자 독학으로 일본어를 배운 딸아이는 우리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지원서를 냈을 것이다. 나도 딸 덕분에 일본 좀 실컷 다니겠다며 박수를 쳤을 것이다. 그런데 난 아직 딸아이를 멀리 내놓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퇴행하는 나의 자아를 확인하는 것 같아 밤새 뒤척였다.    


다음 날 나는 딸아이에게 카톡을 보냈다.

<생각해보니까 엄마가 돼서 그러면 안될 것 같아. 일본은 멀지 않으니까 보낼 수 있을 것 같아. 어디 자리 있으면 알아보고 지원서 넣어.>

<엄마, 생각 정리 끝. 가까운 곳에서 끝내주는 직장 찾을 테니까 걱정 마.>

   

딸아이는 졸업을 하고 한 달이 채 되지 않아 취업에 성공했다. 늘 그렇듯이 큰 욕심이 없는 아이라 자신이 관심 있어 하는 분야의 업무를 할 수 있는, 적당한 인원과 근무 환경, 적절한 업무 스트레스, 그야말로 적절한 연봉에 사인을 마치고 매일 즐겁게 출근을 한다. 게다가 늦은 시간까지 야근을 하지 않아도 돼서 좋아하는 주짓수 운동을 매일 갈 수 있다며 아주 만족해한다. 고마운 녀석.    


딸아이의 취업 소식에 또 눈물이 찔끔 난다. 자식 앞길 막은 엄마가 안되게 해 줘서 고맙고, 아빠가 있었으면 얼마나 기뻐했을까 생각하니 또 눈물이 난다. 그러다가 갑자기 마음이 바빠졌다. 무슨 일이 있으면 빳빳한 현금으로 금일봉을 건네주곤 하던 남편이었다. 아이들 대학 붙었을 때 애들 뒷바라지하느라 고생했다면 두툼한 봉투를 나에게 건네주던 사람. 아마 딸아이의 취업 소식에 금일봉을 준비했을 것이다.    


축하카드와 함께 넉넉하게 담은 금일봉을 준비했다. 귀가한 딸아이에게 건네며 인증샷도 남겨놓자고 장난스레 사진을 찍었다. 너저분한 침대와 민낯이 그대로 드러나 지워야겠다며 어린아이들처럼 우리는 침대 위를 나뒹굴며 낄낄거렸다.         


난 알고 있다. 내가 이제부터 딸아이에게서 조금씩 마음을 비워야 한다는 것을. 내 곁에 붙잡아두지 말고 놓아야 한다는 것을. 아직 떠나보낼 준비가 안된 나를 인정하고, 떠나보낼 준비를 해야 한다. 딸아이에게 기대었던 내 마음을 반듯이 세우고 나 혼자 우뚝 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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