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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샘 Jan 04. 2021

애들한테 넌 엄마야

    

누가 지나가듯이 “큰 일 겪어보면 그동안의 인간관계가 정리가 돼? 그치?” 했었다. 


남편을 갑작스레 떠나보내고 나서 사느라 잘 보지 못하고 지냈던 친구들과 다시 만나게 되었다. 애들 낳고 키우느라 잘 못 보고 지냈어도 다시 금방 가까워질 수 있는 그런 친구들이었다. 새로운 관계의 시작이었다.


그중 한 친구는 고등학교, 대학 동창이다. 같은 교사를 하고 있기에 공감대가 그만큼 컸다. 부부간에도 아는 선후배 사이이기도 하고 결혼하고서는 몇 번 집에도 오가고 했었다. 친구가 조금 멀리 이사를 가게 되면서 가끔 전화하다가, 또 각자 사느라 잘 만나지 못하고 지낸 지 좀 되었었다.


예쁜 얼굴에 무슨 일에나 자기주장이 분명하고 합리적이면서 다른 사람들을 잘 다독이는 친구라 언니 같이 느껴졌었다. 그저 야무지고 평범하게 잘 지내던 그 친구가 다시 내게 성큼 다가왔다.

     

남편을 떠나보내고 정말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 것과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이 친구는 나를 찾아와 내게 자신의 이야기를 고백처럼 들려주었다. 


대학을 입학하고 얼마 되지 않아 아버지가 갑자기 암으로 세상의 떠나셨을 때 가족 모두는 많이 힘들었다. 맏이 었던 친구는 엄마가 힘들겠지만 어린 동생들을 잘 보살피며 이겨내주길 바랬었다. 그러나 매주 고속버스를 타고 고향 집에 내려갈 때마다 무너져 내리는 엄마를 보아야만 했다. 


유난히 사이좋았던 부부였기에 아버지를 잃고 엄마가 한동안 힘드시겠지, 그러나 곧 일어서겠지 생각했다. 사람 살지 않는 오래된 집처럼 엄마는 조금씩 조금씩 무너져 내리기만 했다. 식사를 하지 않으셨고, 술만 마셨고 취하면 잠들기까지 울면서 돌아올 수 없는 아버지를 찾으셨다. 고등학생부터 초등학생까지 어린 동생들 먹는 것도 챙기는 않으시고 집안 살림을 다 내려놓으셨다. 술에 의지한 채 자신의 건강을 몽땅 망가뜨리고 결국은 몇 년 견디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셨다.   


아직 학생이었던 친구는 고향에 있던 동생들을 모두 서울로 데리고 올라와서 작은 집을 마련하고 부모 대신 동생들 교육부터 결혼까지 자기 손으로 치르느라 사는 게 참 고단했다고 친구는 말한다.  


무엇보다 그 엄마를 용서하는데 20년이 걸렸다고 했다. 물론 남편을 잃은 엄마의 슬픔을 이해하지만, 자신의 슬픔 하나 해결하지 못하고 어린 자녀들을 두고 자신을 망가지게 내버려 두었던 그 엄마를 용서할 수가 없었다고. 지금에야 독실한 신앙을 갖게 되고 나이가 들어가면서 엄마의 인생도 참 가엽다 느껴져 많이 울었다고 말한다. 

    

“너, 정신 똑바로 챙겨. 애들 밥 챙겨 먹이고, 너도 건강 챙기고. 애들한테 넌 엄마야. 응?”

친구가 내게 말한다. 


이 말은 무너지는 나를 일으켜 세웠다는 것을 친구는 알까? 정신이 퍼뜩 났다. 아이들에게 걱정이 되는 엄마가 되지 않아야 한다, 아빠를 잃은 아이들에게 든든한 엄마가 되어야 한다고 나를 움직이게 했다. 그동안 남편 그늘 밑에서 아무 생각 없이 지내왔지만 이제 우리 아이들에게 난 든든한 나무로 서야 하니까. 


난 식사를 준비하고 아이들을 불러내어 밥을 먹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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