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아이의 출산을 앞둔 그 한 달 여 간의 시간은 지금 생각해도 참 평화로웠다. 출산과 산후조리를 친정에서 하기로 하고 대학 진학과 함께 떠난 고향에서 느리게 천천히 보낸 나날들이 참 좋았다.
이른 아침이면 치악산 능선을 바라다보며 산자락까지 운동 삼아 천천히 걸어갔다 온다. 낮에는 졸린 눈으로 장독대 위에 내려쬐는 뜨거운 햇살을 바라다본다. 친정아버지의 손길을 먹고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 텃밭을 바라보는 것은 재미있는 놀이와 같다. 고추, 가지, 토마토, 그리고 딸기 몇 줄기는 가만히 지켜보고 있으면 자라는 것이 보이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빠르게 자라 잎줄기가 굵어지고 키가 자라고 꽃을 피운다. 더위가 사위어갈 때쯤, 마당의 수돗가 큰 대야에 때가 불라고 미리 담가놓은 작은 이불 빨래를 발로 밟는다. 종아리에 닿는 시원한 물이 거품과 함께 발가락을 간지럽힌다. 운동을 많이 해 놓아야 출산이 쉽다는 친정엄마의 말대로 씩씩하게 첫 아이의 출산을 기다렸다. 매 끼니마다 텃밭에서 자란 싱싱한 것들로 뚝딱뚝딱 만들어주는 엄마의 밥을 얼마나 맛있게 먹었던가.
막달이 되어 배가 풍선처럼 부풀었을 때 그의 말대로 친정으로 온 것은 참 잘한 일이었다. 어렸을 때는 보지도 느끼지도 못했던 자연의 아름다움을 맘껏 누리며 지냈다. 폐 속 깊숙이까지 상쾌한 공기, 시시각각 색이 변해가는 넉넉한 치악산 능선과 졸졸 흘러내리는 작은 개울가를 휘적휘적 느리게 산책하며 생명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새벽에 진통이 시작될 때 집으로 전화를 했다.
“진통이 시작된 것 같아요. 그런데 첫 아이라 아무래도 시간이 많이 걸린다고 하니까, 천천히 내려와요.” 이때는 내가 생각해도 참 침착했다.
“그래, 그래, 알았어. 내가 학교에 전화해 놓고 수업 마치고 곧바로 내려갈게. 아무래도 오후는 되어야 도착할 거야. 어떡하니? 내가 옆에 없어서. 얼른 내려갈게. 이따 봐.”
많이 긴장한 그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출산 관련 책을 너무 많이 보았고, 라마즈 호흡법도 충분히 연습했다. 이젠 실전이다. 친정엄마는 시간 좀 걸릴 것이니, 날 밝으면 병원으로 가면 된다고 하시며 챙겨놓은 가방을 현관으로 옮겨 놓으셨다. 그리고는 여느 때처럼 나를 꼭 안으시고 기도해 주셨다. 마음이 편안했다.
어느 정도의 아픔을 겪어내야 생명을 얻는 것일까? 하늘이 노랗게 보여야 아기를 낳는다고 했었는데, 더 참아야 하는 거겠지? 잠깐 생각을 했던 것도 같다. 아프면 소리 질러도 된다고 친정엄마는 옆에서 나보다 더 힘을 주며 땀을 흘리셨지만 나는 호흡에 집중하며 소리 한번 지르지 않고 씩씩하게 첫 아이를 낳았다. 거짓말처럼처럼 통증이 사라지고, 그 여린 생명을 품에 안았을 때 나는 세상을 품에 안은 듯했다.
휴가 제도가 만만치 않을 시절이었는데도, 수업을 마치고 내려온다던 그는 휴가를 내고 곧장 내려왔다. 그러나 생각보다 출산이 빨랐다. 그가 도착했을 때는 아빠를 그대로 콕 찍어놓은 것 같은 얼굴로 눈을 껌벅이는 아들을 받아 안았다. 갓난 아들은 아빠를 보고 알아보는 것처럼 눈을 껌벅이며 아빠를 쳐다보았고, 그 모습이 참 신기했다. 아들을 품에 안은 그는 눈물을 흘렸다. 곁에 있어주지 못해 미안하다며 나를 안으며 그는 눈물을 흘렸다.
그는 갑자기 팔을 쑥 걷어 올리더니 아이를 팔뚝으로 재어본다.
“이것 봐! 꼭 내 팔뚝만 하네. 장모님, 이것 보세요. 이 녀석 꼭 제 팔뚝만 해요.”
꼭 싸맨 배냇저고리의 아들을 들어 품에 안으며 그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남자의 웃음을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