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막: 천천히, 단단해지는 중 (현재)
다행히도 병원에서는 섬유근육통이 아니라는 확진을 받았고,
몸도 많이 좋아져 이내 퇴원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다시 본가에 머물게 되었다.
가족이 있는 집으로 간다는 게, 마냥 좋은 일만은 아니었다.
내려가는 기차 안에서 복잡한 감정이 밀려왔다.
'내가 본가에서 잘 지낼 수 있을까?'
'나를 환영해 줄까?'
걱정이 이어지자, 설렘도 잠시 씁쓸한 느낌이 들었다.
바로 그때, 내게 전화가 걸려왔다.
"딸~ 잘 내려오고 있지? 아빠가 기차역에 데리러 갈까?"
반가운 아빠의 목소리였다.
퇴원하고 내려오는 길이 힘들까 봐, 마중을 나온다던 아빠의 목소리에 이내 마음이 잠잠해졌다.
'그래, 괜찮을 거야. 별일이야 있겠어'라고 나를 다독였다.
역에 도착하자, 먼저 온 아빠가 나를 반겼다.
두 팔을 벌려 나를 와락 안고는 내게 말했다.
"우리 공주, 퇴원축하한다. 그동안 고생 많았다"
그 말을 듣자, 기차에서 내내 걱정하던 마음이 사르르 사라지기 시작했다.
"고생은 무슨, 엄마 아빠가 더 고생했지"
나는 아빠의 말에 밝게 웃으며 대답했다.
고향에 돌아와 집으로 향하는 길은 낯설었다.
도시가 변한 건지, 내가 변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쩐지 자꾸만 다르게 느껴졌다.
집에 도착해서 내 방에 들어가자,
어쩐지 내 방이 아닌 것 같은 괴리감도 들었다.
그런데 침대에 눕자 이상하게도 안도감이 들면서, 피로감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집에 온 게 안심이 되었는지 그대로 잠이 들어버렸다.
한참뒤에 퇴근한 엄마와 동생이 들어오는 소리를 듣고서 그제야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딸~ 잘 왔네. 몸은 좀 어때?"
"누나 괜찮아?"
엄마와 동생이 각각 나의 안부를 물었다.
"응, 괜찮지 그럼. 다 나았어 이제!"
어릴 적 나처럼 그 누구보다 밝게 대답했다.
가족들은 내가 집에 머물게 된다는 사실을 기뻐해줬고,
다시금 가족들이 제대로 뭉치는 것 같은 분위기였다.
엄마는 나를 위한 푸짐한 저녁상을 준비했고,
아빠와 동생은 내 옆에 붙어 이런저런 얘기를 건넸다.
집 안엔 오랜만에 웃음이 돌았다.
오랜만에 행복하다고 느꼈다.
집에 오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왜 그렇게 집에 오기 두려워했을까,
가족에게 연락하기 망설였을까 조금은 후회가 되었다.
어릴 적 기억 속으로 돌아가고 싶어 했던 내가,
지금 이 순간 이대로도 괜찮다고 느끼는 때였다.
또다시 시간이 멈추었으면 하고 생각했다.
본가에서 보내는 일상은 평화로웠다.
엄마와 동생이 일하러 가서 집에 혼자 있었지만,
병원에서의 일상이 익숙해져서 인지 외롭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그런 평온함 속에서도, 마음 한편에는 여전히 무거운 것이 있었다.
가족들의 따뜻함을 받으면서도,
정작 내가 겪어온 아픔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가족들에게 내 깊은 상처를 꺼내 보이게 됐다.
말을 꺼내기 전까지 나는 한참을 머뭇거렸다.
손목을 가만히 내보이며, 말없이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우울증을 진단받은 날부터 시작했다.
그러다 손목에 생긴 상처,
부모님께 흉 진 손목을 보이지 않게 하려 새긴 타투들의 의미를 얘기했다.
왼손에는 가족과 추억이 많던 아빠의 애견 훈련소 마스코트 '보스'를,
오른손에는 내가 독립해서 처음으로 키웠던 고양이 '향이'를.
그렇게 하면 두 번 다시 나를 해하지 않을 수 있게 되지 않을까,
그리고 나를 좀 더 소중히 여길 수 있지 않을까 하며 그려 넣었다고 했다.
그런데 타투를 새긴 후에도 자꾸만 아파오던 몸의 통증들이 커져 가며,
가족들이 너무 그리웠다고 했다.
여태 멀어진 가족들에게 내 상처를 알리는 게 큰 죄책감이었다고,
하지만 얘기하길 잘한 것 같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입원해서 써왔던 일기의 내용들도 얘기했다.
병원에서 지내왔던 일상들,
결코 쉽지만은 않았던 치료들,
그리고 그때마다 나를 붙잡아 주던 가족들.
혼자 버텨온 그 시간들을 돌이켜보며,
나는 내가 처음부터 아프게 된 모든 이유가 내 탓이라고 생각했다고 했다.
생각이 많고, 꼬리를 물다 걱정으로 이어지고,
이내 우울함으로 빠지기를 반복한다고.
그렇게 감정을 되새기다 보니,
어릴 적 장면으로 이어졌고 그때의 상황이 원망스럽기도 했지만
성인이 된 나는 이제 다 이해한다고도 했다.
사실, 마음 가득히 부모님을 이해하진
않았지만 이제라도 그런 노력을 조금씩 하다 보면 내가 나를 받아들이고 사랑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한 말이었다.
내 얘기를 듣고 난 부모님은 아픈 게 네 탓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아빠는 내 손을 한참 바라보다 조용히 고개를 숙였고,
엄마는 말없이 내 손등을 쓰다듬었다
나는 눈물을 터져 나왔지만 어쩐지 마음이 후련한 기분이 들었다.
긴 시간 동안 혼자서 끙끙대던 응어리가 조금씩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뭔가 내 편이 생긴 것 같았다.
줄곧 혼자라고 생각해 왔던 견고한 믿음이 조금씩 부서지는 느낌이었다.
여태 나는 내가 어딘가 고장 난 것 같고, 실패한 인생이라고 생각해 왔지만
그 순간만큼은 뭔가 조금은 희망적이었다.
내 감정에 솔직해지고 나니,
처음으로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는 순간이었다.
그제야 내가 나를 이해받는 감각이 생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