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막: 천천히, 단단해지는 중 (현재)
본가에 머물면서 날이 갈수록 건강해졌다.
엄마가 해주는 따뜻한 밥을 먹고,
동생과 아빠와 수다를 떨고,
어릴 적 기억과 맞물리는 장면들이 겹치자 행복하다고 느끼는 순간들이 많아졌다.
하지만 그런 날들 사이사이 이유 없이 슬프거나 우울한 순간들도 여전히 있었다.
눈을 뜨면 통증이 덮쳐오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날이 이어졌다.
그럴 때면 마음이 한없이 수렁 속으로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산책을 하러 나가다가 무심코 디딘 발걸음에 넘어져 버렸다.
털고 일어서야 하는데 왠지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고, 그런 내가 덜컥 겁이 났다.
그리고는 아무도 없는 집에서 나를 도와줄 사람이 없다는 걸 깨닫자 울음이 터져버렸다.
한참을 울고 나서, 조금씩 기력이 돌아오자 잠시 소파로 돌아가 앉았다.
몸의 감각이 남의 것처럼 이상하게 느껴지는 느낌이었다.
병원에서도 그랬다.
마약성 진통제를 오래 맞고 있었을 때의 '어지러움과 함께 찾아오는 무감각함'이 느껴졌다.
오랜만에 느끼는 익숙한 감각이었다.
'별거 아니야.' 라며 나를 달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나는 다시 일어나 있었다.
잘 지내다가도 문득 넘어져서 일어나지 못하는 날이 와도, 무너지는 나조차도 이제는 조금 괜찮게 느껴졌다.
입원전만 해도 이런 일이 생겼다면 아마 넘어진 채로 한참을 누워있었을 것이다.
그 자리에서 약해진 내 몸을 탓하고, 세상을 원망하며 하루를 보냈을 터였다.
이제는 조금은 단단해진 마음을 붙잡고 살아가는 내가,
새삼스레 대견스럽게 느껴졌다.
그래서인 힘이 나서는 다시 산책을 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집을 나서서, 익숙한 동네를 탐험하듯 산책했다.
입구를 지나 도로를 건너서,
골목을 거닐고,
자연스레 다니던 길로 향했다.
문득, 지나가던 길에 위치한 성당이 보였다.
왠지 모르게 들어가고 싶은 충동이 일어,
발걸음을 성당 안으로 조용히 들였다.
성당 내부로 들어가니, 아무도 없었다.
조용하고 엄숙한 분위기가 흐르는 듯했고,
나는 그 속에서 조금은 마음이 진정되는 걸 느꼈다.
한참을 성당 안에 앉아 기도를 드렸다.
누구에게 하는 기도 인지 정하지도 않았지만,
이제는 내가 정말로 잘 살아갈 수 있게 도와달라고 간절히 바랐다.
그동안 아파왔던 기억 때문인지 자꾸만 눈물이 흘렀다.
힘들었던 지난날의 고통들이 떠올라, 나를 서글프게 했고 동시에 마음을 흔들었다.
울컥해 오는 마음을 달래며 성당을 나가려 할 때였다.
한 수녀님이 다가와 내게 말씀하셨다.
"많이 고통스러우셨나 봐요."
그 말 한마디가, 왠지 공감과 위로가 되는 듯 느껴져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눈물이 자꾸만 앞을 가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러자 수녀님은 나를 조심스레 안아 주었다.
한동안 나는 수녀님 품 안에서 서럽게 울어댔고,
그런 나를 포근하게 안아주며 기다려 주셨다.
그동안 견뎌온 통증 속에서 자꾸만 무너졌던 날들이,
그리고 괜찮다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참아왔던 인내의 시간들이 스쳐 지나갔다.
나 홀로 버텨야만 했던 그 시간들을 지나, 지금은 곁에 가족들이 있지만 고통스러운 시간들 속엔
여전히 나 혼자였다고 생각했다.
그때 수녀님께서 나를 토닥이며 말씀하셨다.
"그동안 고생 많았어요"
성당을 나온 나는 기분이 얼떨떨했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기도 했고, 동시에 홀가분하기도 했다.
성당 앞 벤치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며 생각했다.
그동안 잘 견뎌왔다고 믿었는데, '마음이 잠시 무너졌었나 보다'라고 느꼈다.
그리곤 성당에서 받았던 위로를 떠올리며,
이제는 흔들리는 날에도 마냥 무너지는 내가 아닌 스스로가 다르게 느껴졌다.
예전과는 생각하는 것도 분명 달라졌다고 생각했다.
'나는 도대체 왜.. '
'아니야. 나는 지금 정말 잘하고 있어.'
'남들은 다..'
'이건 내 인생이고, 속도가 다를 뿐이야'
가족들의 지지 속에 몸을 회복해 가면서 생각을 바로잡았던 지난 시간들이 떠올랐다.
끊임없이 나를 깎아내리던 비난과 비교하는 습관을 조금씩 멈추기로 했던 날.
자꾸만 나를 갉아먹던 낡은 습관들을 벗어던지고,
새롭게 태어나고 싶다고 결심했던 날.
무너진 나를 진짜로 돌볼 수 있는 건
결국 나 자신이라는 걸,
이제야 완전히 깨달았다.
몸의 통증이 완전히 가신건 아니라,
그런 날엔 여전히 머릿속이 복잡하고 시끄러웠지만,
그 안에서 단 하나의 다짐만은 분명했다.
‘이제는 나를 괴롭히지 않을 거야. 그런 시간 속에서도 나를 돌볼 거야.’
작고 사소하지만 나를 지켜주는 습관들도 내 안에 천천히 자리 잡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5분조차 어려웠지만, 시간이 점점 늘어나 이제는 1시간까지 걸어도 괜찮은 산책시간.
생각을 잠잠하게 만들어주고, 고요함 속에서 머무를 수 있게 해주는 명상시간.
그리고 굳어진 몸과 마음을 부드럽게 풀어주는 스트레칭시간,
거르지 않고 매끼마다 조금씩이라도 챙기는 식사시간.
그 모든 것들이 모여 단단한 내가 되게 해 줬고,
흔들리는 날에도 여전히 나는 괜찮을 거라고 붙잡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