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막: 천천히, 단단해지는 중 (현재)
가족과 외식을 준비하던 어떤 날이었다.
엄마, 아빠, 동생이 뭘 먹을지 정하고 있었고 나는 익숙하게 그 사이를 중재하고 있었다.
"나는 고기 먹고 싶은데"
라고 동생이 먼저 의견을 냈다.
"고기 말고 다른 거 먹자. 회 같은 거"
엄마가 동생 의견에 반대하며 제안을 했다.
하지만 모두가 망설이고 있을 때, 내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나는... 고기랑 회 말고.."
처음으로 내 의견을 얘기하자,
가족 모두가 놀란 듯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나는 입을 닫고 괜히 입술을 깨물었다.
나를 이상하게 생각할까 봐 불안했다.
"응, 우리 딸 뭐 먹고 싶은데? 얘기해봐 봐. 오늘은 공주가 먹고 싶은 걸로 먹자!"
아빠가 웃으며 다정히 나에게 말씀하셨다.
그런 아빠를 보니 조금은 불안감이 가셨다.
따뜻한 격려에 마음이 놓여서,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실 나가는 건 좀 힘들고, 집에서 시켜 먹는 거는 어때? 내가 몸이 좀 힘들어서.."
가족 모두가 아차 싶었는지 다들 서둘러 얘기했다.
"그래그래, 몸이 아직 힘들지. 집에서 먹자"
"그래, 좋지! 배달시켜 먹으면 편하잖아"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엄마와 동생이 돌아가며 이해한다고 얘기해 주었고,
내 의견을 받아준 가족이 그 순간 너무 고맙게 느껴졌다.
처음엔 그런 말을 꺼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리고, 불안했다.
누군가에게 내 의견을 얘기한다는 것조차 어려웠고,
주목받는 일이 나에겐 부담스럽게 느껴지기만 했다.
그때를 돌이켜보면, 늘 나보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게 익숙했다.
맞춰주는 게 편하다 보니 한때는 그런 말도 들었었다.
"넌 왜 니 의견이 없어?"
그 말은 나에게 큰 상처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아픈 현실이기도 했다.
예전의 나는 자라면서 문제를 회피하는 습관이 굳어졌고,
감정을 꺼냈다가 부정당했던 기억은 누군가에게 말할 기회조차 가로막아왔다.
그래서 나는 점점 기회조차 만들지 않았고,
누군가에게 거절당하는 일이 내겐 소중한 사람을 잃는 일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렇게 애써 사람들과 거리를 두는 내가, 점점 더 외롭게 느껴졌다.
누군가의 부탁에 그저 알겠다고 응하던 지난 시간들,
괜찮다는 말로 애써 내 감정을 부정해 왔던 세월들,
조그마한 의견조차 제시하지 않았던 순간들.
그런 과거를 돌아보니, 이제는 나를 위해서라도 달라지고 싶었다.
변화를 위해 익숙했던 나쁜 습관들부터 끊기로 했다.
그리고 더 이상은 혼자가 되고 싶지 않았다.
변하기로 결심한 이상, 입을 열기로 마음먹었다.
누군가와 깊이 가까워지고 싶었고,
내 안에 벽처럼 남아있는 거리감을 누구보다 내가 먼저 헐어버리고 싶었다.
막상 실천해 보니, 내 생각보다 상황은 나빠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건강한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이런 건 좀 힘들어"
"불편해, 나 괜찮지 않아"
조금씩 내 진짜 속 얘기를 나누자,
주변사람들이 나를 더 이해해 주었고 관계도 가까워졌다.
내 감정을 솔직하게 전해보려는 노력만으로도, 관계들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괜찮지 않다고 얘기하는 처음엔, 눈을 질끈 감고 입술을 깨물며 말을 던지듯 고백하던 날도 있었다.
그리고 그런 나를 떠나가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다.
어떤 날, 친구들을 만나는 자리에서 그동안의 안부를 물으며 내가 어떻게 지내왔는지를 얘기하던 때였다.
"너네 집은 엄청 화목했잖아. 근데 우울증이라고 네가?"
내가 가장 친하다고 생각했던 친구에게,
그런 말을 듣자 내가 그 친구에게 상처받았던 지난날들이 떠올랐다.
무심코 던진 의미 없는 말들이었겠지만, 그 말들 때문에 상처받았었고 불편했다고 털어놓았다.
그러자 친구가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얘기했다.
"그런 걸 왜 이제 와서 꺼내? 다 지난 일인데."
대화가 길어지자, 점점 다툼이 되었고 나는 그 상황이 너무 불편해서 자리를 뜨려고 할 때였다.
다른 친구가 다가와 나에게 얘기했다.
"네가 이해해라"
하지만 나는 더 이상 그러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스쳤고,
힘 있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가 왜 항상 이해만 해야 하는데?"
친구들에게 내가 하는 배려는 당연하게 느껴지는 게 너무 마음이 아프고 화가 났다.
그리고 이제는 그전처럼 내가 모든 걸 이해하고,
참고 살아가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터라 그렇게 대답했다.
이후, 누군가가 떠나는 경험을 또다시 하는 것이 내가 거절당한 것처럼 느껴지고 마음이 아파서
한동안 다시 무너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말하지 않았더라면 덜 불편했을까? '
그날 밤, 같은 질문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내가 만약 그 상황에서 그런 얘기들을 하지 않았더라면,
혹은 평소 하던 대로 모든 감정을 참았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들이 꼬리를 물었다.
그 시간은 마치 예전으로 되돌아간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다시 사람들과 거리를 두고 싶은 충동이 일었고, 말한 자신이 바보 같았다.
그러나 자책과 후회 속에서도, 시간이 지나면서 이상하게도 확고한 의지만 남았다.
'말 안 했으면 앞으로도 힘들었을 거야'
'그래, 앞으로도 이렇게 얘기하자'
그게 끝이 아니었다.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과 멀어지고,
진심으로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들만 남자 오히려 편해졌다.
이전엔 늘 맞추고 조심했는데, 이제는 그냥 있는 그대로 있어도 괜찮았다.
자연스럽게 숨을 쉬는 듯 마음이 가벼웠고, 내 감정을 내어 보여도 다들 이해해 주었다.
그 경험을 통해 나를 숨기지 않고도 사랑받을 수 있다는 걸 처음으로 믿기 시작했다.
하루가 쌓이고, 한 달이 흐르며 그런 변화가 내 안에 천천히 뿌리를 내렸다.
그리고 그런 변화가 내 일상에도 조금씩,
봄을 데려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