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막: 천천히, 단단해지는 중 (현재)
오랫동안 사랑을 믿지 않았다.
누군가와 가까워질수록 언젠가는 떠나갈 것이라는 두려움이 더 컸다.
마음을 열기보단 닫는 것에 익숙해서 언젠가부턴 혼자 지내는 것이 편해졌다.
그래서인지 친구나 연인이 생겨도 그 관계는 오래가지 못했고,
그 책임을 늘 나에게서 찾았다.
내가 이상한 건 아닐까,
나는 사랑받을 수 없는 사람인가,
그런 생각들로 자꾸만 스스로를 밀어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도 모르게 한 사람에게 '보고 싶다'라는 말을 하고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절대 하지 않았을 말이었다.
그 사람은 오랫동안 나를 응원해 주던 한 사람이었다.
그 무렵, 집안에 부고가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말없이 우리 남매를 돌봐주시고 아껴주셨던 큰아버지가 돌아가신 일이었다.
장례식장 분위기는 많이 무거웠다.
여러 차례 병으로 형제를 잃은 아빠의 어깨가 무거워 보였고,
당시 나는 장녀로서 가족들을 챙기기에 바빴다.
그 시간이 지나고 보니,
정작 나는 기댈 곳이 없다는 사실에 많이 우울하고 슬픈 하루를 보내던 와중이었다.
습관처럼 수면제를 복용하고 잠자리에 들었지만, 늘 그랬듯 정신은 말짱하게 깨어있었다.
문득 그 사람이 떠올랐고, 전화기를 들고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한참을 통화했고, 보고 싶다는 말과 함께 내 마음을 건넸다.
내일 아침 만나자는 약속과 함께 전화를 끊었다.
다음날 아침, 전화기 너머로 들었던 목소리를 집 앞에서 듣게 되었다.
긴 시간 그리워하며, 보고 싶었던 그 사람이었다.
집 앞을 나서자 그가 환하게 웃으며 나를 반겨주었다.
그는 참 다정하고 배려심 넘치는 따뜻한 사람이었다.
가족을 잃은 슬픔으로 무너져가는 나를 그저 묵묵히 곁에서 지켜봐 주었고,
오랫동안 내 이야기를 들어주며 깊은 위로와 응원을 건네주었다.
그렇게 지금, 남편이 될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그 사람은 오래전부터 내 이야기를 응원해 주던,
말 그대로 나의 1호 팬이었다.
처음인연은 내가 아프기 전에 시작한 라디오 어플 방송이었다.
사람들과의 소통을 하고 싶었고,
서로를 위로하고 응원하는 차원에서 만들었던 채널이었다.
그는 그 채널의 몇 안 되는 청취자 중의 한 명이었고,
내 안부를 물을수록, 나도 갈수록 그의 안부가 궁금해졌다.
라디오 방송을 진행하면서 서로를 향한 관심이 우리의 일상이 되었다.
밥은 먹었는지,
잠은 잘 잤는지,
서로의 하루를 조용히 나누는 시간을 보냈다.
그 사람 앞에서는 이상하게 조금씩 마음이 열리는 느낌이었다.
마음을 여는 것이 겁이 났지만, 동시에 그만큼 편안함을 느꼈다.
나 자신조차 돌보지 못하던 시기,
마음을 여는 것도 두려웠던 내가 그 사람 앞에서는 서툴게나마 진짜 내 모습을 꺼낼 수 있었다.
라디오 방송을 통해 서로를 알게 되었지만,
당시 나는 마음의 문을 열 준비가 되지 않았던 터라 깊은 관계로 발전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돌고 돌아 우리는 다시 만나게 되었다.
그렇게 만난 우리는 작은 이야기들부터 시작해
힘들었던 일, 무기력했던 날들, 마음속 깊이 묻어둔 외로움까지 서로에게 털어놓았다.
그는 내 이야기를 가로막지 않았고, 조언하려 들지도 않았다.
그저 조용히 들어주었고, 그 안에 함께 머물러 주었다.
“여태 얼마나 힘들었겠어. 고생했어.”
“이제는 내가 있잖아. 나한테 기대.”
그 말을 들은 순간, 무너지듯 울고 싶어졌다.
그 사람을 통해 서서히 의지하는 법을 배워갔고,
우리는 그렇게 만남을 시작했다.
우리는 대화를 참 많이 했다.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
어떤 걸 좋아하는지,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지 등등 매일 얘기를 해도 소재가 넘쳐났다.
내가 내 속 깊은 얘기를 해주었듯, 그도 나에게 힘들게 살아온 얘기를 들려주었다.
머물 곳 없이, 부모님 없이 홀로 견뎌왔던 인생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내내 마음이 아프고 저려왔다.
우리는 서로에게 힘이 되어 주고 싶어 했고, 누구보다 서로를 응원하고 아끼며 지냈다.
그 사람을 통해 나는 나 자신을 조금 더 소중히 대하는 법을 배웠다.
사랑은 완벽해서 시작되는 게 아니라, 서툴러도 옆에 있어주는 것이라는 걸 조금씩 알게 되었다.
어느 날, 그의 집에서 내 우울증을 고백하게 되었다.
그동안 오랫동안 아파왔던 마음을 꺼내 보이며 서럽게 울었다.
그 사람은 그런 나를 꼭 안아주며 나보다 더 가슴 아파했다.
"그동안 말할 곳 없이 얼마나 속으로 앓아왔어, 너무 힘들었겠다"
내 사정을 잘 아는 그는, 그렇게 깊은 공감을 해주고 나를 토닥여주었다.
처음엔 내 증상을 알리는 게 두렵고, 불안하기만 했다.
나를 떠나가면 어쩌나,
나를 이상하게 생각하면 어쩌나 싶었던 내 생각과는 달리 그는 여전히 따뜻한 사람이었다.
덕분에 나는 완벽하지 않아도, 내 모습 그 자체로 사랑받을 수 있다는 걸 깨닫게 되면서
나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연습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주변사람들과 가족과의 관계도 조금씩 달라졌다.
내 속마음을 꺼내 보이고, 증상을 알리면서 나를 서서히 꺼내보였다.
예전에는 감정 하나 꺼내는 것도 버거웠던 내가 이제는 불편한 마음도 조금씩 부드럽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여전히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는 일들이 반복되고 있다.
나는 오늘도 성장 중에 있고,
나를 사랑하는 방법을 하나씩 배워가는 중이다.
그리고 그 사랑은,
나를 세상과 다시 연결시켜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