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4. 괜찮지 않은 나를 받아들이는 법

3막: 나에게 돌아가는 길 (회복의 시작)

by ARI

어느 날은 괜찮았다.

그런데 또, 그다음 날은 주저앉았다.

날이 흐리거나, 몸이 더 아픈 날이면 유독 무너지기 일쑤였다.

그럴 땐,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언제 낫는 거지?'

'나는 왜 맨날 주저앉아 있는 걸까'

'나는 늘 제자리인데, 세상만 나를 두고 달려가는 것 같을까'


내 생각보다 회복이 빠르지 않아서 불안하고 초조했고,

마음처럼 움직여지지 않는 내 몸이 원망스러웠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현실이 좌절스러워 금세 무기력해졌다.

익숙한 방식으로 자꾸만 나를 탓하고, 후회하고,

그렇게 쓰러지기를 반복하던 어느 날이었다.


하루는 일기를 적다가 무심코 깨달았다.

[왜 이렇게 약하게 태어나서, 나만 뒤처지게 살아가고 있는 걸까.]

'살아가고 있다.'라는 문장이 묘하게 눈길이 머물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하고 있다고 내 안에 누군가가 속삭이는 것 같았다.


다시 살펴보니, ‘노력하고 있다’, ‘괜찮아지려고 한다’는 말들이 여기저기에 쓰여 있었다.

나는 늘 쉽게 포기한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만도 않다는 걸 알게 되었다.


도망치듯 집을 나오던 날도,

꾸준히 이어가지 못한 직장도,

회피하기 바빴던 인연들도,

좋아하는 걸 마저 끝내지 못한 내 성취까지,

나는 지금까지 그 모든 걸 '포기했다'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나는 분명 나만의 방식으로 살아내고 있었다.

아무리 힘들고 지치더라도, 고통스럽고 괴롭더라도 나만의 끈기와 인내로 나아가는 중이었다.

삶을 끝내고 싶다던 날을 지나 지금에 오기까지, 나는 포기하지 않은 거였다.

그 사실을 깨닫고 나니 그런 내가 아주 조금은 대견스러웠다.

'생각해 보니 나 꽤 잘하고 있었을지도 몰라.'


돌이켜보면 어릴 때부터 자주 아픈 몸을 탓하고,

사람들의 눈치를 보느라 내내 맘 졸이며 살아온 내가 안타까웠다.

내가 하고 싶은 얘기를 누구에게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살아온 내가 가여웠다.

병원에 입원하기 전까지만 해도, 내게 나는 능력 없고 가치 없는 사람으로만 여겨졌다.

자라오면서 '나는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이구나'라는 믿음이 생기자,

마치 그게 사실인 것처럼 20대를 그렇게 살아버렸다.

우울하고 공허한 이유를 제대로 알지 못했고, 애써 내 마음을 외면하기에 바빴던 삶이었다.


그런 나에게 연민이 생기기 시작하자, 내가 조금씩 이해되기 시작했다.

낯설고 이상한 감정이었다.

상처투성이인 어린 내가 나를 바라보고 있는 느낌이었다.

마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그 아이를 만나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아이를 안아주고 싶었다.

그동안 힘들고 버거웠을 어린 나에게,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 많았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이제라도 얘기를 들어주고 싶었다.

하고 싶었던 얘기,

털어놓지 못했던 감정들,

상처로 남아 꺼내지 못했던 순간들을 위로해 주고, 품어주고 싶어졌다.

그러려면 다시 그 시간으로 돌아가서 감정을 직면하고,

그 순간에 머물러야 한다는 걸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다.


놓아주지 못했던 과거를 돌아보기 시작했다.

그러자 자주 아팠던 어릴 적 내 모습이 떠올랐다.

스트레스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나는 몸과 정신이 너무나도 잘 연결되어 있어서

조금이라도 버겁다는 생각이 들면 줄곧 몸이 아팠다.


엄마, 아빠가 나에게 관심 가져 주지 않을 때도,

집에 큰일이 닥쳤을 때도,

나는 항상 배가 아프고, 머리가 아팠다.

소중한 가족들이 분열되기 시작할 때, 그 끈이 끊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

이리저리 눈치를 보던, 그리고 웅크리던 어릴 적 내 모습이 떠올랐다.


내 안에 깊은 공허함의 정체는 바로 '불안'이었다.

누군가가 관심 가져 주지 않을까 봐,

나를 사랑하지 않을까 봐 두려워하는 감정이었다.

아빠가 떠나면서 내 안에 큰 상처가 남은 것 같았다.

늘 누군가 떠날까 두려워했고, 거절당할까 봐 걱정했다.

내가 거절당하는 경험이 생기자, 거절을 하는 것도 무서워졌다.

내내 부탁을 들어주다 무거워진 내 어깨가 떠올랐다.


지난 과거가 이해되기 시작했다.

스스로를 무능력하고, 무가치한 사람으로 여겨왔다.

사랑받지 못한다는 믿음이 굳어져 누군가를 만나는 일조차 어려웠다.

그렇게 이어져온 우울함과 무기력은 그런 나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비난하고 부정만 하는 나 자신이 너무 미워서 생기는 '분노' 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내 안에 있는 감정들의 본질을 파악하기 시작하자,

머리가 가벼워지기 시작했다.

하루하루 숨을 쉬는 것조차 버거웠던 마음도 조금은 가볍게 숨 쉴 수 있게 되었다.


이후, 일기를 쓰는 것도 수월해졌다.

명상도, 산책도 이전보다 더 즐거워졌다.

나와의 시간에 머문다는 것이 고통스럽지만은 않았다.

이제는 그때를 즐기고, 오히려 기다려지기까지 했다.

마음이 아물기 시작하니, 몸이 회복하는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억지로 먹던 밥이 왠지 조금은 맛있다고 느껴졌다.

밤에는 꿈도 꾸지 않고 깊게 잤다.

그토록 약을 먹으며 노력해도 오지 않던 잠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내 안에 감정적으로 곪아 있던 상처들이 아물어가고,

회복되어 가자 나는 점점, 괜찮지 않았던 나조차도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완벽하지 않은 나, 여전히 아픈 나도,

충분히 사랑받을 만한 존재라는 것을 그제야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