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3. 내가 좋아했던 것들

3막: 나에게 돌아가는 길 (회복의 시작)

by ARI

지난 며칠간 꾸준히 명상을 하고 일기를 쓰면서,

비로소 나의 머릿속 깊은 곳들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반가운 기억들이 떠올랐다.


내가 초등학생일 적,

아빠가 자주 들려주던 올드팝송이 머릿속을 스쳤다.

그 음악들이 다시 듣고 싶어 져서, 무작정 이어폰을 끼고 핸드폰을 켰다.

아직도 기억 속에 선명한 제목들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아빠가 제일 좋아하는 영화 쉬리의 ost였다.

[Carol Kidd - When I Dream]을 재생하자, 다시 그때로 돌아간듯했다.

잔잔한 기타 선율,

속삭이듯 들려오던 아름다운 목소리.

도심을 지나 바다로 향하는 길에 느껴지던 여름의 상쾌한 바다 내음.

그리고 드라이브를 다니며 옆에서 이야기를 들려주던 다정한 아빠의 모습까지.

그 모든 게 너무 선명하기만 했다.

그때의 나와 아빠는 정말 행복했다.


지금도 다시 연락하며 안부를 묻곤 하지만, 왠지 모르게 마음 한구석이 아련했다.

'나에게 힘든 일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나는 어떻게 자랐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가족이 사랑하던 따뜻하고 밝은 아이의 모습 그대로 자랐을 것 같았다.

그리고 좀 더 누군가에게 마음을 열기 쉬운 사람이 되었을 것도 같았다.

부모님을 원망하고, 나를 탓하던 시기를 지나 지금에 오기까지 많은 일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내가 이런 일들을 겪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겠지만, 아픔을 겪으면서 가족들과 다시 가까워지게 되었고

그 과정을 통해 다시 사랑을 느끼게 되었다고 생각하자 그 모든 게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어쩌면, 숱한 고통의 날들이 있었기에 지금이 더 나아 보이는 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비 오는 날 뒤에 쨍쨍한 햇빛처럼,

긴 터널을 지나 마주하는 출구의 빛처럼.

'내 인생도 그런 게 아닐까'라고 문득 그렇게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저미던 가슴이 조금은 안정되는 것 같았다.


마음이 차분해지자, 그동안 잊고 있던 것들이 하나둘 떠올랐다.

내가 좋아하던 것들이 말이다.

초록빛 풀과 나무가 우거진 공원, 시원한 공기.

아름답게 지저귀는 새들의 소리.

그리고 아기들과 강아지들이 뛰노는 장면이.

왠지 숲 속에 있으면 마음이 평온해졌다.

나뭇잎 냄새를 품은 공기가 뺨을 스칠 때면, 이상하게도 머리가 맑아지는 느낌이 들었고,

마음도 잠잠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제일 좋아하는 여름의 숲냄새까지.

그래서 종종 그곳을 찾곤 했다.


훨훨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새들이 부러웠고,

예쁜 소리들을 듣는 것도 좋았다.

걱정 없이 살아가는 아이들과 강아지들이

그저 예뻐 보이기도 했다.

신기했다.

무너져가던 시간 속에서도,

나는 여전히 좋아하는 것들로 나를 지키고 있었다.


돌이켜보면, 내 20대가 마냥 힘들기만 했던 건 아니었다.

살아가기가 힘이 들 때면, 복잡하고 어지러운 도심을 벗어나 자연을 찾아서 혼자 여행을 떠나곤 했다.

주말이면 짐을 싸 들고 이곳저곳을 걸으며 마음을 달랬다.

잠시라도 생각을 쉬고 싶었고, 편안하게 숨 쉬고 싶었다.

국내에 아름다운 사찰을 찾고, 드넓은 강을 따라 걸었다.

한옥마을을 둘러보고, 한국의 정서가 묻어난 곳들을 탐색했다.


어릴 적, 아빠가 보여준 외국영화 덕분에 영어에 대한 흥미가 생겼다.

영어유치원을 다니며 자연스레 모국어와 영어를 접했고,

그 덕분인지 영어는 내게 한국어와 같은 안정감을 가져다주었다.

그래서 외국영화나 드라마를 보는 게 나는 참 좋았다.

그러면서 언젠가는 꼭 가보고 싶은 여행지도 상상했다.

그렇게 음악을 듣고, 떠오르는 것들을 하나씩 적어보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좋아했던 것들을 이젠 나 자신에게 해주면 어떨까.’


생각해 보니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하면서도 버티듯 살아왔다고 느꼈었다.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던 일을 이어가며,

도망치듯 선택했던 운동.

외로움을 채우기 위해 만났던 누군가와의 인연들.

공허함을 달래려 숱하게 사들였던 물건들,

그리고 뭔가를 배우려 애썼던 일들.

즐거운 과정이 아니라 나를 외면하기 위한 도구였던 것이다.


이제는 정말 이전과는 다르게 살고 싶어 졌기 때문에,

'내가 좋아하는 걸 즐기는 것에 초점을 두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만의 작은 목록을 만들기 시작했다.

내가 진짜로 즐길 수 있는 무언가를.


<영어 회화 배우기,

퇴원하면 여행 가기,

숲이 우거진 산에 등산 가기,

여건이 된다면 반려동물 키우기.>


외국에서 영어로 대화하는 상상을 하니 가슴이 뛰었다.

울창한 숲을 오를 생각엔 심장이 요동쳤다.

그리고 내가 어릴 적부터 같이 자라오던 강아지들과 다시 살아간다면,

잃어버렸던 웃음기도 어릴 적 기억도 같이 돌아오지 않을까 기대했다.

리스트를 적으며 마음이 일렁였다.

내 안에 아직도 이런 불씨가 남아있었다는 사실이, 자꾸만 어린아이처럼 신이 났다.


어릴 적 내가 떠올랐다.

학구열에 불타고, 무언가를 좋아하면 끝까지 이뤄내던 성취까지.

어른이 된 내가 그때처럼 좋아하는 것들을 하나씩 시작하면서,

다시 그렇게 살아가보면 어떨까 생각하니 마음이 설레어 왔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제는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나만의 속도로 가자.'

매일을 쫓기듯 살아왔던 20대를 뒤로 하고,

누군가와 비교하지 않는 나만의 인생을 살아가고 싶어졌다.


30대엔 그렇게 조금씩,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채우는 일상을 만들어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동시에 이런 의문도 들었다.

'지금 나는 정말 괜찮은 걸까? 혹시 또 다른 도망을 준비하고 있는 건 아닐까.

아직도 나 자신이 확신이 없는 이유는 뭘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