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뜰한 며느리의 탄생 6
그 집에 들어서면
나는 습관처럼 숨을 줄였다.
밥상은 늘 급했고, 김치나 반찬을 나누는 일이 없었다.
바쁘다며 밥 먹을 시간도 없다는 말이 먼저 나왔고,
나는 그 말을 그대로 믿었다.
그래서 나는 일요일마다 J의 부모를 위해 음식을 준비해 갔다.
왜 그렇게 했는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결혼 후에도 이어졌던 말들.
신부 화장이 이게 뭐냐,
네 엄마의 한복 고름은 왜 이러냐.
그 말들 어딘가에 이유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식사를 마치면, J의 어머니는
식빵에 버터를 발라 먹거나 시리얼을 그릇에 부어 먹었다.
그러면서
"이건 미국식이야."
라고 말했다.
나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지는 않았고 그냥 웃었다.
J는 보상이라도 하는 듯 토요일에는 친정에 갔다.
반찬을 얻어 돌아왔고, 우리는 그것으로 다음 며칠을 지냈다.
친정도 같은 동네였다.
그 균형이 공평하다고 생각했다.
그 무렵, J의 어머니는
신혼집 전화기에 자동응답기를 설치하라고 했다.
그녀는 원하는 시간에 전화를 걸었고
내가 받지 못할 때는 수차례 메시지를 남겼다.
응답하지 못한 시간만큼 설명했지만, 내 말은 변명처럼 느껴졌다.
내가 J와 함께 있을 때 J가 무언가를 들고 있으면
J의 어머니는 얼른 그것을 뺏어 들었다.
그것이 무거운 것이든 가벼운 것이든 상관없었다.
그렇게 그녀가 들면 그 짐은 허공에 걸려 있던 내 손으로 돌아왔다.
J가 다시 들면. 그녀는 또 짐을 뺏었다.
J의 본가에는 세탁기, 전기 청소기, 식기세척기까지 있었다.
하지만 그것들은 거의 쓰이지 않았다.
겨울에도 찬물을 썼고, 빨래는 손으로 했다. 바닥은 빗자루로 쓸었다.
그 집에서는 모든 것이 귀했다.
버리는 것이 없었다.
오래된 것은 덜 쓰고,
고장 난 것은 고쳐 썼다.
J의 부모는 스스로 일군 사람들이었다.
어려운 환경에서 공부했고, 돈을 모으는 일에 성실했다.
J의 아버지는 한국전쟁 때 피난을 왔다고 했다.
여러 형제 중에서도 공부를 잘해 유명 대학을 수석으로 입학하고 졸업했지만,
형편이 어려워 유학은 가지 못했다고 했다.
젊은 시절부터 일을 놓지 않았고,
집을 사고 한방만 쓰며 나머지는 세를 주었다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나룻배로 한강을 건너 땅을 보러 다녔다는 이야기는 집안에서 자주 반복되었다.
전쟁이 날지 모른다며 더 사지 말자고 다퉜다는 말까지, 늘 세트처럼 따라붙었다.
J의 어머니도 피난 와 홀어머니 아래서 자랐고, 어렵게 대학까지 나왔다고 했다.
방송국에 취직할 수 있었으나 졸업하자 J의 아버지와 결혼했다고 했다.
외할머니는 똑똑한 딸을 데려갔으니 동생의 학비를 요구했고
J의 아버지가 그 요구를 감당했다고 했다.
J의 어머니는 아들을 낳고 석 달 동안 방 안에만 있었다고 했다.
화장실도 가지 않고 요강만 사용했다고 했다.
그 말들은 그들을 설명하는 데 늘 사용되었고, 매번 비슷한 문장으로 끝났다.
너희는 아무 걱정하지 말고 유학 가서 학위만 받아 와라.
나는 그 설명에 기대어 있었다.
그것은 나를 설득하기에 충분히 단단해 보였다.
그리고 그 사이, 내 안의 어떤 반응은 자동화되었다.
노력해야 한다.
이 정도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생각이
그때 함께 굳어졌다.
그들의 방식은 내가 자라온 집과는 많이 달랐다.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이 남았다.
생경함과 쉽게 부정할 수 없는 어떤 태도 같은 것.
그리고 그들의 생활 방식 중에는 나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꽤 있었다.
나는 마음의 불편함보다 그들을 믿는 쪽을 선택해야 할 것 같아 그냥 지나갔다.
다만,
어딘가에서 자꾸 멈춰 서게 되는 순간들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