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을 유지하는 비용 4
미국에 온 지도 몇 달이 지났다.
생활비는 매달 늦게 왔다.
J가 그의 부모와 전화할 때면
수화기 너머로 나를 찾는 고성이 들려왔다.
흘러나오는 그 소리보다
그 상황을 그냥 지나가는 J가 더 무겁게 느껴졌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미국에서
잔고가 바닥을 보일 때면 나는 두려움 속으로 끌려 내려갔다.
의도가 무엇이건 그 모든 것은 위협처럼 느껴졌다.
함께 유학 온 사람들 중 몇 명은 이미 한국으로 돌아갔다.
한국에서 보았던 영화 속 미국 여성들은
아이들을 어딘가에 맡기고 일을 하고 있었다.
그 ‘어디엔가’는 생각보다 멀고 비쌌다.
유학생 아내로 나는 돈을 버는 일을 할 수 없었다.
고민 끝에 J가 학교에 간 사이
옆집 미국 아이들을 돌보거나 다른 유학생의 아기를 봐주기 시작했다.
몇 장의 구겨진 지폐를 받을 때면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기억으로
마음 한구석이 흔들렸지만,
점점 밀려나는 아이들을 보며 눌러야 했다.
결국 친정 부모님의 도움을 받았다.
아이들을 반나절이라도 유치원에 보낼 수 있게 되었고,
나는 그 시간에 맞춰 수업을 청강하려 했다.
아이들을 유치원에 내려놓고 온 첫날, 집에 도착하자마자 전화가 울렸다.
오랫동안 집에서 나와 지낸 아이들은
내가 교실을 나서자마자 울음을 터뜨렸다.
나는 결국 수업을 포기하고 교실 앞에서 아이들을 기다려야 했다.
한국에 있는 형수에게서 매일 전화가 왔다.
형수의 전화는 처음에는 J의 부모 이야기였다.
J의 어머니는 집과 차를 구해준 부모에게
내가 얼마나 함부로 했는지 J의 형에게 말했다고 했다.
화해를 하며 급하게 쇼핑을 가던 그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녀의 말은 점점 길어졌다.
그녀는 여전히 J의 외할머니를 모시고 있었다.
그녀의 남편은 유학 실패에 이어
그만두었다가 다시 시작하기를 반복하고 있다고 했다.
그 사실조차도 한동안 그녀에게는 숨겨져 있었다.
매일 아침에 나간 그는 본가에 가 있었다고 했다.
직장을 다니며 할머니를 모시고 있던 형수는 J의 형이 그렇게 지낼 때
다른 것들을 감당하고 있었다.
J의 어머니는 그녀의 집 열쇠를 쥔 채 수시로 드나들었다고 했다.
결국 그들 부부는 다툼이 이어졌다.
형수는 막다른 골목에서 극단적인 시도를 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녀의 남편은 그 순간조차 방관자로 남았다고 했다.
그 말이 정말 사실인지 나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이혼을 결심했고
남편과 시어머니를 고소했다고 말했다.
그녀가 집에서 나가는 날,
그녀의 남편은 소파에 가만히 앉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렇게 딸을 두고 친정으로 들어갔다고 말할 때 그녀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그녀의 말이 이어졌다.
큰돈이 들어간 예단을 준비해 결혼한 형수는
신혼여행에서 돌아오는 날부터, 다른 이름으로 불렸다고 했다.
내가 알던 그녀의 이름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결혼 기간 동안 자신을 위해 쓴 돈은 모두 친정에서 마련했고
가계부와 영수증은 모두 보관해 증거로 남아 있다고 말했다.
아들을 낳으라는 완강한 요구 속에 그녀가 몇 번이나 생명을 지키지 못한 채
혼자 눈물을 삼켜야 했던 시간들이 있었다는 사실에 나는 그녀의 말을 더 듣지 못했다.
내 이름을 바꾸지 못해서였을까?
나를 에고이스트라 부르며 결혼 후 자신을 잊으라 했던 J의 아버지 말은
기이하게도 며느리의 생활비만큼은 친정 몫으로 남겨두어야 한다는 계산과 공존하고 있었다.
“나는 다시는 아이를 안 가질 거야. 절대로.”
“시어머니하고 처음부터 잘 지내고 싶지 않은 며느리가 어디 있겠어. 다들 예쁨 받고 싶지.”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표정을 볼 수는 없었지만, 나는 알 것만 같았다.
그들이 내건 조건인 예단도, 아들 출산도, 명문대 유학도
J의 부모 마음을 움직이지 못했다.
형수는 앞으로도 움직이지 않을 것을 아주 잘 알고 있는 듯했다.
얼마 뒤, 그녀는 나에게 증언을 부탁했다.
나는 잠시 망설였다.
자신과 아이에게 친정에서 받은 지원을 생활비로 쓰지 않고
명품 옷과 백을 사던 형수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것이 그녀의 모순인지 나의 질투인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그녀를 위해서라기보다
내가 알고 있는 인간으로서의 도리로 그러겠다고 했다.
그녀의 남편은 법원에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고 했다.
대신 J의 어머니가 나와 “아들은 바쁘다.”라고 했다는
말을 듣고 한편으론 나도 자식에게 그렇게까지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매일 오던 그녀의 전화가 한동안 뜸해졌다.
몇 달 뒤, 걸려온 전화로 그녀는 잘 마무리했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J의 형은 그녀와 친정에게 사과했고
J의 부모는 그녀가 원하는 곳에서 살 수 있도록 해주었다고 했다.
그녀는 결국 이혼하지 않았으며
더 이상 본가에 방문하지 않으며 지낼 수 있었고
그렇게 원하는 것을 얻었다.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그녀의 남편이 나의 남편과
같으면서도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J는 절대로 사과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미간에 힘을 주고 고개를 숙인 채 그대로 있을 것이다.
내가 이혼을 선택하는 순간,
그것은 전략도 회복도 없는 끝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혼한다고 나를 맞아줄 친정이 없었고
아이들을 두고 온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형수는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방식으로 끝을 바꾸는 동안
나는 내가 선택한 자리에서 버티고 있었다.
그녀가 해내지 못한 것을 끝까지 가서 내가 해내면
무언가 달라질 수 있을 거라고 믿는 방법밖엔 없었다.
아주 긴 시간이 지난 뒤 상담실에서 전혀 다른 말을 듣게 되었다.
형수는 건강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경계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 선을 몰랐다고 했다.
그런데 나는 정말 몰랐을까.
아니면 알고도 끝까지 가보려고 했던 걸까.
나를 지키는 일이 아이들을 지키는 것과 분리되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떠나면 아이들이 어떻게 자랄지 알고 있었다.
나는 그 자리에 남아서 막아야 했다.
그것을 책임이라고 믿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상담사에게 설명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