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름이 무기력으로 변할 때
학창 시절 나는 벼락치기의 달인이었다. 시험 이틀 전까지 한껏 쉬다가 전날 울면서 밤을 새우는 스타일이었다. 억지로 공부하며 밤을 지새는 당일도 행복하지 않았지만, 할 일을 미루면서 쉬고 있는 날에도 마음은 편하지 않았다. 적극적으로 무언가를 즐기며 시험 준비 기간에 게으름을 피운 게 아니라 주로 TV나 만화책을 보며 불안해했다. 시험 2주 전부터는 ‘아직 시험공부할 시간이 14일이나 남았어. 시간은 충분해... '식으로 날짜를 셌다. 남은 날짜가 3일 이내로 적어지는 순간이 오면, 이 시점부터는 시험까지 남은 시간을 계산했다. ‘시험공부할 시간 72시간 남았다, 밤에 잠자는 시간 빼면 50시간 정도는 남은 거야. 많이 남았네.’식의 계산을 반복했다. 시간이 갈수록 불안감은 고조되었다. 불안감이 지나치게 커져 엄마 뱃속에 있을 때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다. 운명의 시험 전날이 다가와 밤을 새울 때에는 며칠 전까지 게을렀던 나를 한껏 저주했다. ‘일주일 전의 네가 공부를 하지 않아서 지금 내가 이 고생이다!’ 다음번 시험에는 벼락치기를 하지 않고 미리 공부해야겠다 결심했지만 다음 시험에도 똑같은 패턴을 여지 없이 반복했다.
학교에 다닐 때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시험 공부라는 의무적인 일만 해내면 되었으니까. 오히려 성인이 되고 나서는 벼락치기 습관이 문제가 되었다. 장기간 해야 할 일이 있어도 벼락치기를 믿고 마감날까지 버티다 포기하는 경우가 생겼다. 아예 시도조차 하지 않는 일도 늘어갔다. 게으름이 계속되다 무기력하다는 느낌에 빠지기도 했다. 빨리 무엇인가 해보아야 하는데 나도 남들만큼 해낼 수 있을 것 같은데 게으름이 문제라고 생각하다 막판에는 ‘난 아무것도 못해낼 것 같다’는 생각의 구렁텅이에 빠졌다. 생각이 이 정도까지 미치면 이미 헤어 나오기 쉽지 않았다. 애초에 내가 뭘 하고 싶었는지 잊어버리는 일도 생겼다.
지금은 벼락치기 습관과 게으름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시험을 잘 보고 싶다거나 맡은 일을 잘하고 싶다는 마음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 마음이 지나치게 컸던 것이 오히려 문제였다. 무엇인가 잘하고 싶었고 실패하기 싫었다. 열심히 달리고 노력하다 실패라는 벽에 깨지고 부딪히기 싫었다. 스스로에 대한 실망감에 흠뻑 빠진 내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노력을 덜 하면 실패하더라도 덜 억울하지 않을까 생각하다 애초에 시작도 하지 않는 일이 잦아졌다. 깊은 좌절에 빠지느니 노력이 부족하다는 핑계를 대고 싶었던 때도 있다. 전력 질주하다 실패하고 싶지 않았다. 실패하고 싶지 않은 마음, 완벽하게 해내고 싶은 마음이 무기력에 이른 것이다.
요하네스 베르메르(Johannes Vermeer. 1632~1675)는 네덜란드 출신의 화가다. 네덜란드가 정치, 경제, 문화의 다방면에서 황금시대를 지나고 있던 시기, 베르메르는 델프트 시에 살면서 작품 활동을 했다. 현재 남아 있는 작품이 30여 점에 지나지 않아 그의 작품은 엄청난 희소성을 지닌다.
베르메르 작품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1665) 일 것이다. 모델이 누구인지 정확히 알 수 없는 이 작품은 '네덜란드의 모나리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크게 뜬 눈, 살짝 돌린 고개, 앳되어 보이는 소녀의 모습은 보는 이를 매혹시킨다. 모델의 윤곽선이 부드럽게 표현되어 작품의 신비감을 더한다. 이 작품을 소재로 미국의 역사작가 트레이시 슈발리에는 역사 소설 <진주 귀고리 소녀>를 썼다. 2003년에는 동명 영화도 만들어졌다.
베르메르의 작품은 일상적인 장면을 신비하고 경건한 분위기로 화폭에 담아내 보여주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러한 특징을 잘 느낄 수 있는 작품 중 하나가 <레이스 뜨는 여인>(1669~1670)이다. 노란색 숄을 걸친 한 여인이 레이스를 뜨고 있다. 그녀는 지금 왼손에 있는 두 짝의 실타래로 조심스레 바늘을 꽂는 중이다. 섬세한 눈길로 레이스를 들여다보고 모습에서 여인의 온 신경이 한곳에 집중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앞쪽에는 재봉실이 삐져나온 쿠션이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작품의 전반부, 한 쪽에 위치하기 때문에 관람자의 시선은 주로 여인에게 집중하게 된다. 이 그림의 크기는 24 ×21cm에 불과하다. 작은 크기의 캔버스에 여인의 모습을 표현해낸 화가의 섬세함에 또 한번 놀라게 된다.
베르메르는 이처럼 일상적 행위에 집중하는 여인들의 모습을 다양한 작품 속에 그려냈다. <우유 따르는 여인>(1660), <저울을 다는 여인>(1662~1663) 등이 그 예다. 우유를 따르는 행위나 저울을 다는 행동이 특별한 것은 아니다. - 물론 저울을 다는 행위 속에는 임신한 여인이 태아의 성별을 가늠하고 있다거나 영혼의 무게를 재고 있다는 등 수많은 해석이 존재하지만, 어쨌든 그림에서 볼 수 있는 표면적인 행동은 '저울을 바라보는 것'이다- 일상에서 이루어지는 행위를 정적으로 담아내면서도 신비로움을 자아낸 것이 베르메르 작품의 특징이다. 특유의 신비로운 분위기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그림 속 여성들은 전적으로 자신이 하는 행위에 집중해 있다. 경건해 보이기까지 한다. 레이스를 유심히 들여다보며 작은 것을 놓치지 않으려는 순간, 우유를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그릇에 담으려는 모습, 신중하게 저울을 바라보는 여인의 모습에서 소박하고 절제된 행위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이전까지 유럽의 회화는 역사 속 큰 줄기가 되는 사건을 담아내거나 신화, 종교 속의 극적인 이야기를 주제로 그려진 경우가 많았다. 반면 17세기의 네덜란드 풍속화는 일상을 주제로 한 새로운 경향을 보여주었다. 베르메르가 살던 당시 네덜란드는 스페인의 오랜 지배를 끝내고 정치적 안정과 국제 무역에서 비롯된 경제적 번영까지 일구며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가톨릭 국가였던 스페인으로부터 벗어나 칼뱅주의에 따른 프로테스탄트 종파를 따르며 신앙의 자유도 얻었다. 칼뱅주의는 현실 생활에서의 성실함, 검박함, 절제를 강조하였다. 황금시대의 네덜란드에서 베르메르는 평범한 사람들이 매일 수행하는 작은 일과를 특유의 분위기로 작품에 담아냈다. 이러한 면에서 그의 풍속화는 종교적인 의미를 담은 작품들로 해석되기도 한다. 왕족이나 귀족이 아닌 평범한 이들이 그림의 주인공이 되었다는 점에서 시민 사회의 발전도 엿볼 수 있다.
<레이스 뜨는 여인>은 웅장한 분위기의 작품도, 거창한 역사의 한 장면을 보여주는 작품도 아니다. 그럼에도 관람객은 작품 속 여인의 모습에서 눈을 떼기 어렵다. 자신이 하는 일에 고요히 집중하는 그림 속 인물의 모습에서 작은 일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경건한 마음으로 작은 과업에 집중하는 순간, 그 순간의 신비감과 고요함을 모두 느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내가 게으름과 무기력에 빠진 순간은 대부분 그 중요성을 잊은 때였다.
되돌아보면 무기력증은 무언가를 전혀 하고 싶지 않은 상태라고 보기 어려웠다. 크나큰 성과를 이루고 싶은데 두려워서, 또는 실패하는 것이 싫어 발생하는 경우가 많았다. 내가 기대한 성과를 이루기 어렵기 때문에 혼란이 오고, 인생의 방향키를 잃은 듯한 느낌에 빠질 때 무기력한 기운도 다가왔다. 인생의 방향키를 나에게 가져오는 데 핵심이 있었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몰라 혼란스러울 때에는 거창한 곳에 목표를 둔 행위를 작은 단위로 쪼갰다. 먼 미래나 거창한 목표를 염두에 두지 않는 것이 포인트다. 가령 시험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하고 싶지 않을 때 목표를 잘게 쪼개어 오늘의 목표만을 정한다. 며칠 후, 몇 달 후의 일은 걱정하지 않는다. 공부를 완벽하게 끝내 시험을 잘 보겠다는 거창한 목표를 버리고 오늘 할 일만을 목표로 잡고, 이를 다하면 오늘의 나에게 먹을 것이나 쉬는 시간으로 보상을 주었다.
하는 일에 성과가 나타나지 않아 힘든 날도 온다. 이때에는 아주 간단한 노력으로 성과가 나타나는 행위에 집중해보기도 한다. 퍼즐을 맞춘다거나 책을 몇 페이지만 보는 등, 쉽게 성취감을 느낄 수 있는 일에 집중해본다. 글을 쓸 경우 단 반 장만 써보기로 다짐한다. 글을 죽어도 쓰기가 싫을 때에는 글에 필요한 그림파일을 찾거나 자료조사만 하고 끝낸다. 작은 집중이 반복되면 성취감이 따라온다. 점차 큰 집중도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실패’ ‘성공’이라는 극단적인 단어를 스스로에게 사용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가령 나는 어떤 일을 하던 완벽하게 해내지 못하면 이를 모두 ‘실패’로 규정해왔다. 어떤 일의 결과를 0(실패)과 1(성공)만 존재하는 이진법의 세계로 다루어 왔던 것이다. 완벽하게 성공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안 한 것보다 못한 것이라 생각해왔다. 그래서 아예 시도조차 하지 않은 일이 많았다. 생각의 범위를 십진법의 세계로 늘려보았다. 가령 10(완벽한 성공)만큼의 성공을 거두지 못하더라도 아무것도 안 한 것(0)이 아니라 5나 6만큼은 성공을 거두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높은 기대치를 채우려 하면 두려움이 쫓아오기 쉽고, 이로 인해 아무것도 못하는 상태를 가져오기 때문에 차라리 기대치를 낮추는 방안을 택한 것이다. 몇 년간 노력해야 이룰 수 있는 것을 단시간에 이루려고 하는 것은 과욕임을 깨달았다.
글쓰기의 경우 단번에 만족할만한 글을 쓰려하면 오히려 아무것도 쓰기 싫은 상태가 이어졌다. 차라리 엉망인 초고를 쓰고 스스로를 칭찬해준 다음,- 초고는 대다수가 엉망이기 때문에 못 쓴 글이라도 써내면 나에게 칭찬 샤워를 해주었다– 만족스러운 마음으로 그냥 잠든다. 며칠 후의 내가 저 글을 고쳐줄 것이라 믿고 만족스러운 상태로 자는 것이다. 그 후 며칠 동안 같은 글을 고치고 고치는 일을 반복했다. 바깥으로 내놓은 글이 만족스럽지 않아도 그것을 실패로 규정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무엇이라도 쓴 나를 칭찬해주는 방향을 택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무기력한 생각과 마음 때문에 힘들어질 때가 있다. 이런 때에는 거창한 성공을 이루어내고 말겠다는 생각을 조금 내려놓고, 이루고 싶은 일의 단위를 잘게 쪼개거나 작은 성취감을 주는 소박한 행위에 집중해보는 것이 좋다. 소박한 행위와 작은 성취가 쌓이다 보면 마음이 단단해진다. 의외의 결과가 나타날 때도 있다. 작은 것에 정성을 쏟는 아름다움을 기억하다 보면 무기력의 순간도 사라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