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답게 살아간다는 것', 뭘 말할까
넌 좀 우울끼가 있잖아.
15년 전쯤, 누군가 나에게 이 말을 던졌다. 가까운 지인이었다. 당황스러우면서 뜨끔했다. 우울에도 끼가 있나. 연예인이 충만한 끼를 가진 것처럼? 상대는 우울증이나 우울감을 언급하는 게 아니었다. 우울끼, 그러니까 ‘우울한 기질' 정도를 의미하는 게 아니었을까 싶다.
어린 시절부터 평범한 나였다. 다만 한없이 밝은 어린이도 아니었다. 산타클로스가 없다는 사실은 4살 정도에 이미 깨달았다. 5살 때에는 죽음에 대해 골똘히 고민하며 시간을 보냈다. 9살 무렵에는 초기 폐렴에 걸렸는데, ‘폐렴에 걸리면 죽는다’는 이상한 공식을 머릿속에 담고 있었다. 죽는 게 두려워 그날 하루 종일 울었다. 책을 좋아하고 글을 쓰는 것도 좋아했지만, 꼼꼼하고 차분한 성격은 아니었다. 머릿속에는 항상 생각이 촘촘하게 차 있었는데, 그에 비해 행동은 얼기설기 덜렁댔고 느린 편이었다. 신나고 즐거운 상상보다 어둡고 현실적인 생각을 하는데 시간을 많이 보냈다.
물론 나에게도 ‘명랑한 자아’가 존재한다. 사람들과 웃고 떠드는 걸 좋아했다. 그럼에도 내 속의 ‘우울한 자아’와 ‘명랑한 자아’의 비율을 비교해본다면 60:40 정도였다. 머릿속에서 우울한 자아가 압승을 거두는 날이 많았다.
어린 시절부터 주변의 반응을 살펴보니, 우울한 자아는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로 느껴졌다. 엄마의 걱정을 끼치지 않고 더 많은 친구를 사귀려면 우울한 나를 적당히 숨겨놓을 필요가 있었다. 우울한 마음이나 괴상한 상상은 입 밖으로 꺼내놓지 않았다. 어른이 된 후 어두운 분위기의 영화나 깊은 생긱이 필요한 영화를 보고 싶을 때에는 혼자 시내의 작은 극장으로 향했다. 우울함을 자극하는 음악도 나 혼자만 있을 때 들었다.
배우가 메소드 연기에 빠져 원래 자아를 잊듯, 나도 원래의 자아를 어느 정도 잊었다. 사람들과 무난하게 어울리며 지내는 무덤덤한 인간형이라 스스로를 규정하며 살아왔다. 그러나 가까운 이들을 대할 때는 별 수 없이 우울하고 예민한 구석이 슬금슬금 삐져나왔나 보다. 완벽히 숨겼다는 예상과 달리 주변인들은 대부분 내 우울한 자아를 간파하고 있었다. 뜨끔했다.
따져보면 나는 세상의 기준대로 ‘우울하고 예민한 성격’을 좋지 않은 특성으로 결론 낸 셈이었다. 우울한 나보다는 ‘명랑하고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나’를 더 우월한 자아로 여겼다. ‘생각이 너무 많아 보인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기분이 찜찜했다. 결혼 이후 내 본모습을 보고 당황한 남편(남편의 이상형은 밝고 명랑한 여성이다)이 ‘모든 걸 좀 밝게 보고 생각하라’고 이야기하면 발끈했다.
주변을 살펴보니 나만 타고난 기질을 싫어하는 건 아니었다. 지인 A는 부끄러움이 많고 내성적인 자신의 모습을 좋아하지 않았다. 더 활달한 이미지로 보이고 싶어 했다. B는 부당한 일을 따지고 들며 자기도 모르게 쌈닭이 되는 스스로를 싫어했다. C는 스스로의 천성적인 게으름을 자주 한탄했다. 나도 그들도, 태어날 때부터 우리가 가진 모습을 미워하고 있었다.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ürer, 1471∼1528)는 독일의 뉘른베르크에서 금세공업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의 일을 도우며 지내다, 그림에 흥미를 느껴 예술의 길에 접어든다. 1494년 경, 이탈리아 베네치아로 여행을 간 것이 그의 인생에 전환점이 되었다. 장기 여행 덕분에 이제 막 피어나던 르네상스 예술의 정취를 접할 수 있었다.
고향인 뉘른베르크에 돌아온 그는 자화상과 초상화를 그리며 뛰어난 실력을 보여준다. 판화에 탁월하다는 평가도 받았다. 수많은 작품 중에서도 16점으로 구성된 요한계시록 연작이 유명하다. 상업적 성공과 예술적 인정을 함께 거머쥔 뒤러는 시 위원회가 임명한 화가로서 업무를 수행하기도 했다.
다음은 그의 동판화 대표작 중 하나인 <멜랑콜리아Ⅰ>다. 수수께끼 같은 상징으로 가득 찬 작품이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그림의 오른편에 위치한 인물이다. 날개를 달고 바닥에 멍하니 앉아 있는 여성.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는 중이다. 여성의 주변에는 각종 공구가 나뒹굴고 있고, 뒤쪽에는 건물과 사다리가 보인다. 그림의 배경은 공사현장으로 보이기도 한다. 주변에 널브러진 물건은 여성의 어지러운 머릿속을 상징하는 걸까. 그림 속에서 늘어져 자고 있는 개, 시무룩하게 앉아 있는 날개 달린 아이 역시 무기력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작품의 제목 ‘멜랑콜리아’는 '우울'이라는 뜻의 단어다. 서양에는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인간의 성격을 네 가지로 해석하는 사성론(四性論)이 존재했다. 사성론에 의하면 인간은 몸속의 액체 중 무엇이 많은가에 따라 네 가지 부류로 나뉜다. 밝고 활달하다는 다혈질, 급한 성격의 담즙질, 다소 음침한 특성을 가졌다는 점액질, 내향적이고 생각이 많은 우울질 - 흑담즙(melainacole)이 많은 체질이라 믿었기에 멜랑콜리아로 불렸다- 네 가지다. 중세 시대에 사람들이 선호하지 않은 특성이 멜랑콜리아, 우울질이었다. 머릿속으로 공상을 많이 하는데 비해 몸은 게으르다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르네상스 시기 이후 인간다운 이성과 사고의 힘이 중시되면서 우울질에 대한 인식이 바뀌기 시작한다. 우울질의 성격을 지닌 이들은 생각을 많이 하는 인물이었으니, 예술이나 학문 등 창조적 활동에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뒤러의 작품 속 대패, 톱, 자, 저울, 모래시계 등은 건축이나 수학을 연구하는 이에게 필요한 것들이다. 여성은 지금 펜으로 무언가를 쓰는 중이다. 우울하고 무기력한 얼굴로 보이기도 하지만, 눈빛만큼은 날카롭게 빛나고 있다. 그가 가진 창조적 능력을 대변하는 눈빛이다. 혹자는 그림 속 여성의 모습이 뒤러의 예술가적 자아를 상징한다고 해석한다.
뒤러의 그림은 무엇을 말할까. 예민하고 우울한 여성은 무기력하고 신경질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기질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우울이라는 기질이 선사하는 재능이나 장점도 존재한다. 우리는 가끔 내가 타고난 기질 중 나쁜 것만 되새기며 괴로워한다. 그러나 우리가 가진 특성에는 좋은 것과 좋지 않은 것이 혼재되어 있다.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았다. 내 인생을 통틀어 가장 오랜 시간 창피해하고 미워한 사람은 누구였을까. 생각해보니 주요 대상은 나였다. 날 미워하거나 부끄러워하는데 그동안 시간을 얼마나 썼을까. 궁금해져서 뜬금없는 계산을 해보았다. 철이 든 10살 때쯤부터 하루에 5분 정도씩 꾸준히 날 싫어하는데 시간을 썼다고 가정해보면, 내 인생 통틀어 총 10,9500분, 총 1825시간을 자기혐오에 쓴 셈이었다. 생각보다 어마어마한 시간이었다.
내가 주로 싫어한 스스로의 기질은 '생각이 과잉인 특성'과 ‘우울한 성격’이었다. 그러나 그 우울한 기질에조차 좋은 점과 나쁜 점이 있었다. 끊임없는 생각은 나름대로 인생의 재미를 선사했고, 날이 선 감각은 주변을 관찰하게 만들었다. 예술가나 학문을 연구하는 이들처럼 대단한 창조적 능력이나 지적 능력을 가진 게 아닐지라도 살아가는데 일정한 도움은 얻었다. 타인의 기분을 금방 파악할 수 있었고, 주변의 우울해하는 사람들을 보면 왜 그런지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사회생활을 해나갈 때에도 글을 쓰는 데에도 어느 정도 성격의 혜택을 받았다.
누구나 태어날 때부터 자신에게 부여된 기질을 지닌 채 살아간다. 어린아이들을 대하거나 길러보면 기질의 중요성을 알게 된다. 똑같은 환경에서 자라도 기질에 따라 선택이나 행동 양식은 달라지기 때문이다. 세상은 개인이 가진 ‘기질’이나 ‘특성’을 좋은 것과 나쁜 것, 우월한 것과 열등한 것으로 나누는데 익숙하다. 가령 우울보다는 명랑함이, 여유로움보다는 근면함이, 예민함보다는 무난함이 사회 적응에 적합한 특성으로 여겨진다. 어른들은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생각되는 아이의 기질을 고쳐주려 노력한다. 쭈뼛대지 말고 씩씩하게 좀 말해. 예민하게 굴지 말고 그런 건 숨겨. 왜 그렇게 여유롭니. 빠릿빠릿하게 움직여야지. 흔히 하는 조언이다.
어른들의 가르침과 세상의 시선은 아이의 인생에 도움을 주기도 한다. 적당한 사회화는 나쁜 것이 아니다. 문제는 그런 가르침을 받고 자란 아이가 성인이 되고 나서도 24시간 내내 자신의 기질을 숨기며 살아갈 때 생긴다. 성인이 된 아이는 타고난 기질을 부끄러워하거나 미워하며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나는 왜 이렇게 생겨먹었지. 좀 달라질 수 없을까. 다른 나로 태어나고 싶어. 의외로 많은 이들이 내 기질을 탓하며 살아간다.
타고난 걸 ‘나쁜 특성’으로 규정짓고 그 뒤로 숨으면 어떤 일이 생길까. 내 기질을 미워하는데 시간과 에너지를 쓰니, 하고 싶은 일에 쓸 수 있는 에너지는 줄어든다. 부정적이라 생각하는 기질을 핑계 삼아 새로운 일에 도전하지 못하기도 한다. 마음과 행동이 자연스럽지 않으니 쉽게 피곤해질 때도 있다. 나답지 않은 모습으로 살아가지 못하니 나다운 행복도 느끼기 어렵다.
한 번쯤은 '이렇게 생겨먹은 나'의 장점을 따져보는 게 좋다. 타고난 기질을 좋은 쪽으로 해석하는 연습이 필요하다. 앞서 말한 지인 A는 조용하고 내성적인 자신을 창피해했지만, 내가 보기에 그는 온화하고 믿음 가는 이미지를 지니고 있었다. B는 쌈닭인 자신을 싫어했지만, 비판정신이 넘치기에 야무지고 똑 부러져 보였다. C는 여유로운 성격으로 주변을 두루 살피고 관찰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때때로 내향적인 특성, 비판정신, 여유로운 성격은 그들을 힘들게 했다. 스스로의 평가대로 그 특성이 과한 측면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자신의 기질을 모조리 나쁜 것으로 탓할 필요는 없었다.
나다운 걸 미워하는데 에너지를 쓰는 대신 타고난 기질이 부여한 선물을 찾아보는 게 낫다. 세상이 말하는 기질의 우월함과 열등함, 평균치는 잠시 내려놓아도 좋다. 숨길 수 없이 드러나는 특성, 뾰족하고 울퉁불퉁하게 느껴지는 기질이 있다면, 그건 의외의 장점이나 재능일 수 있다. 내 기질이 원래 그러함을 받아들이고 유리한 쪽으로 해석하며, 조금씩 자연스러운 모습을 꺼내놓으면 ‘나다운 삶’을 꾸려갈 자신감이 생긴다. 숨긴 지 오래되어 나다운 기질이 도대체 뭔지 모르겠다면 내가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부터 명확하게 구분해보자. 내가 어떤 상황에서 편안하고, 어떤 상황에서 불편한지 구체적으로 따져보는 것도 방법이다. 스스로에 대한 진지한 경험과 탐구가 있어야, 나다운 삶의 방식을 찾아갈 수 있다.
요즘에도 우울한 샛길로 빠지는 내 사고 회로가 싫은 날이 있다. 남들과 나를 비교해가며 기분이 가라앉는 날도 있다. 그래도 타고난 기질을 숨기거나 미워하는데 너무 많은 시간을 낭비하지는 않겠다고 다짐해본다. 더 이상 나를 미워하거나 부끄러워하는데 천 시간 이상을 쓰고 싶지 않다. 인생은 유한하기 때문이다. 우울끼가 있다는 말을 다시 듣는다면, (또다시 당황하겠지만) 어느 정도는 받아들이고 싶다. 우울끼도 타고난 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