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을 꼴등으로 만들지 않는 방법
몇 년 전 어느 날, 지인 S가 나에게 물었다. 우리는 전화로 긴 대화를 이어가고 있었다.
선뜻 대답을 못하는 나에게 그는 거듭 물었다.
“너는 남편도 있고, 아이도 있는 데다, 남편 덕분에 해외에서 생활 중이야. 게다가 휴직으로 직업도 유지하고 있어. 네 인생에 더 바랄 게 있겠니?”
한 순간에 '다 가진 여자'가 되니 내 삶에 대한 이야기는 도무지 털어놓을 수 없었다. 별다른 말을 이어가지 않는 나에게 그는 한 마디를 덧붙였다.
“네 인생 부럽다, 정말”
S는 분명 선량한 사람이었다. 다만 항상 타인을 향해 있는 시선이 S 스스로를 힘들게 만들고 있었다. 타인의 삶을 평가할 때 늘 비슷한 맥락의 이야기를 했다.
“그 A말이지, 직업도 최고인 데다 집안도 잘 살고, 정말 삶이 편할 것 같아.”
“그 직업은 퇴근 시간이 좀 늦는다 해도 연봉이 높잖아. 진짜 부러워.”
“그 사람은 재테크에 성공했잖아. 부자 되니까 얼마나 좋을까. 그런 인생은 사는 게 얼마나 편할까.”
그 누군가의 삶을 늘 엿보며 부러워했듯, 그는 내 삶을 부러워했다. 나는 말할 수 없었다. 당시 나는 오랫동안 우울 상태에 빠져 해외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외로움으로 몸 한구석이 정말 아파와 진통제를 한 움큼 집어먹은 날도 있었다. (어디선가 외로울 때 진통제를 먹으면 심리적 고통이 완화된다는 이야기를 읽었던 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이야기가 그의 귀에 들어가면 투정 어린 꽃노래로 들릴 거라는 생각에 입을 다물었다.
올해 내 이야기로 책을 내자 그는 다시 나에게 말했다. 너는 완벽한 인생에 심지어 책까지 냈네. 남편 덕분에 해외에 가서 여유롭게 글을 쓰고. 자기 계발에까지 성공하다니! 너 같은 인생이 또 어디에 있겠니. 책 속에는 내 우울한 이야기들이 곳곳에 널려 있었고, 나는 1년 반 동안 가정보육을 하며 글을 쓰느라 5시간 이상 잠든 적이 거의 없었다. 내 인생에 부러움을 표해준 그에게 고마움도 느꼈지만, 한편으로 기분이 묘했다. S는 타인의 삶을 부러운 눈으로 엿보며 자연스레 자신의 삶을 꼴등으로 만들고 있었다.
디에고 리베라(Diego Rivera, 1886 ~ 1957)는 1886년 멕시코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그림에 재능을 보였던 그는 열 살에 멕시코 시티에 있는 미술학교에 들어가 그림 공부를 시작한다. 그림 공부를 이어가던 중 민중 예술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특히 멕시코의 전통적인 아름다움을 통해 민중의 삶을 표현하는 방법에 눈을 뜬다. 스무 살 이후 장학금을 받아 유럽을 여행하던 중 입체파와 교류하며 새로운 작품 세계를 접하기도 했다.
리베라가 유럽에 있는 동안 조국 멕시코는 혁명을 겪었고, 이후 그는 멕시코의 정치적 상황에 관심을 가졌다. 당시 멕시코는 오랫동안 미국과 유럽의 정치적·경제적 지배로 인해 민중이 고통을 겪고 있었다. 그는 조국으로 돌아가 멕시코 민중의 고통을 그린 거대한 벽화 작품을 남기기 시작한다.
많은 이들이 리베라를 그 유명한 프리다 칼로( Frida Kahlo de Rivera)를 속 썩인 바람둥이 남편으로 기억한다. 그가 아내의 삶에 크나큰 고통을 안겨준 남편이긴 하나, 사실 리베라는 지금까지도 멕시코 민중들에게 큰 사랑을 받는 위대한 화가이기도 하다.
다음 작품은 리베라의 1942년작 <꽃을 파는 여자>다.
작품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것은 꽃이다. 순수와 환희를 상징하는 꽃, 카라의 환한 아름다움이 눈부시게 빛난다. 그러나 그림 감상자의 시선은 이내 아래로 향한다. 한 여성이 이 거대한 꽃바구니의 무게를 책임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이 꽃을 든 여성이 지탱하고 있는 꽃의 위압감과 무게가 감상자의 머릿속에 스친다. 여인은 꽃의 무게를 감당하기 위해 무릎을 꿇고 있다. 아래로 한껏 숙인 고개와 거대한 바구니에 묶인 몸에서 위태로움이 느껴진다.
리베라는 가난한 민중의 힘겨운 삶을 화폭에 담아내던 화가였다. 이 작품 역시 생계유지를 위해 꽃을 팔아야 했던 여성의 모습을 그려낸다. 누군가에게 꽃은 아름다움의 상징이나, 가난한 이들에게는 꽃도 삶의 어려움, 착취의 상징이 될 수 있음을 작품은 보여준다.
한편으로 꽃은 평범한 이들이 짊어지고 가는 삶의 고통을 떠올리게 한다. 겉보기에 멀쩡하고 평범한 모습,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고통을 참아내는 사람들의 모습을 생각해 보게 만든다. 세상 모든 것이 그러하듯 삶의 화려함과 아름다움을 지탱하기 위해 일정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 아무런 삶의 고통도 짊어지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드물다. 모든 사람은 각자 자신만의 짐을 이고 인생을 걸어간다.
모두가 고통의 짐을 이고 살아간다는 사실은 위안도 되나, 한편으로 인생의 무거움을 느끼게 된다. 무겁고 어두운 고통의 삶에 도움이 될 만한 이야기는 없을까. 디에고는 그림 속에 한 조각의 희망을 던진다. 꽃바구니의 뒤에 여성의 짐을 함께 나누려는 누군가의 두 발이 보인다. 화려한 카라꽃 뒤로 그의 머리도 살짝 보인다. 꽃의 무게를 알아주는 이가 있다면, 여인의 무거운 삶에 크나큰 위안이 되지 않을까.
디에고의 <꽃을 파는 여자>는 인간이 지니는 삶의 고통에 대해 생각해보게 해 준다. 그 무게를 타인이 쉽게 판단할 도리는 없다. 우리가 부러움을 표하는 타인의 삶은 멀리서 드문드문 보는 풍경이다. 누군가의 인생을 원거리에서 함부로 평가하는 건 위험할 수 있다. 타인의 인생이 꽃노래라 생각하는 만큼 내 삶을 비루한 것이 되기 쉽기 때문이다.
학교의 현실을 다루었던 드라마 <블랙독>에서 인상 깊은 대사를 들었다. 한 등장인물이 부러움과 질투의 시선으로 바라보던 어떤 교사에게 전하는 말이었다.
“ 저는 사는 게 꼭 1000m 오래 달리기 하는 것 같은데, 선생님은 사는 게 놀이터구나. 그런 생각했었거든요. 근데 여기 다시 와보니까 그건 아니었겠구나. 사는 게 놀이터인 사람은 없는 거지. 그런 생각이 드네요.”
사는 게 놀이터인 사람은 없다는 사실. 한편으로는 씁쓸하지만, 약간의 위안을 안겨주기도 한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짐을 짊어진 채 오래 달리기를 한다는 사실을 깨달으면, '나 아닌 누군가의 삶'에 대한 부러움이 줄어든다. 타인의 삶을 부러워하며 낭비하는 내 시간도 조금은 줄어든다. 타인이 이고 가는 인생의 짐과 내 인생의 고통, 그 무게를 함부로 평가하거나 저울에 달지 않아야 내 삶이 꼴찌로 밀리지 않는다. 더불어 우리 삶의 무게를 덜어주는 공감의 길도 열린다.
어제랑 오늘까지 원고랑 책 관련한 약간의 일정이 있어서 오늘은 비교적 짧은 글을 남깁니다. 퇴고도 많이 하지 못했고, 이웃분들 글도 아직 읽지 못했어요. ㅠㅠ. 브런치에서 이웃 작가님들 글을 읽으면서 소통하는 게 제 나름의 즐거움인데, 최근에는 시간이 이래저래 부족해서 못했습니다. 죄송하네요ㅠㅠ.
그래도 이제 집필하던 원고도 나름대로 마감을 했고 내일부터는 다른 작가님들 글도 충분히 읽을 수 있을 것 같아요. 다음 주에는 글도 좀 더 신경 써서 발행할게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