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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랑선생 Mar 09. 2021

인생은 멘탈 경연대회가 아니다

힘든 마음을티 내지못하는 이유

힘들지만 힘들다고 이야기하지 못했다

    

 어릴 때부터 키가 작고 몸집도 작았다. 아픈 일도 잦았고, 무엇보다 예민하고 잘 우는 아이였다. 초등학교 때 짝이 조금 괴롭히면 앞에서 아무 말 못 하고 울다가 집에 왔다. 어릴 때부터 자주 맞닥뜨린 시선 중 하나는 '딱해 보인다는 눈빛'이었다. 키도 작고 몸도 그렇게 말라서 어째. 많이 먹어야지. 마음이 그리 약해서 험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 나가겠어. 자주 듣던 말이다. -아이들을 가르친 이후에도 ‘그렇게 작고 약해 보여서 애들이 친구인 줄 알겠다’라는 이야기를 가장 많이 듣고는 했다– 가장 자존심 상하는 이야기는 ‘마음이 약하다’는 말이었다. 키가 작거나 몸집이 작은 것은 바꾸기 어려운 문제였지만, 마음이 약한 것은 의지의 문제라 생각했다. 노력으로 약한 마음을 이겨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힘든 마음을 그대로 인정하면 못난 내가 드러날까 겁났다.  


 사춘기가 지나면서부터 힘든 감정은 덮어두고 예민한 나를 숨기기 시작했다. 어떤 문제든 정신력으로 헤쳐 나갈 수 있다 여겼다. 노력해서 안 될 것은 없다는 일종의 자신만만함이었다. 취업 후 일을 할 때는 무미건조한 태도를 유지하려 애썼다. 어릴 때부터 들었던 심약해 보인다는 말을 더 이상 듣지 않기 위한 노력이었다. 가르치던 아이들에게도 ‘의지’와 ‘노력’을 강조했다. 앞으로 험한 세상 살아나가려면 네 의지가 중요하다는 충고를 날리고는 했다.  


 최근 1년간 스스로 자부하던  ‘강한 의지와 정신력'이라는 것이 여러 번 무너졌다. 아이의 가정보육은 1년 전부터 지금까지 현재 진행형이다. 외출은 여전히 쉽지 않다. 시간은 부족했고 할 일은 해야 했다.

 체력적으로 힘들었지만 나를 더 미치게 만드는 것은 따로 있었다. 이게 힘들어할 상황이 맞는지 눈치를 보고 있는 나 자신이었다. 마음은 힘들다고 외치는 상황임에도 스스로 ‘힘들만한 자격’이 있는지 객관적인 기준과 내 상황을 재어보며 고민하는 나를 발견했다. 견디기 어렵다는 신호를 마음이 보내면 머릿속의 누군가가 말했다. ‘이게 힘들만한 상황이라서 힘든 것일까, 내가 나약해서 이 정도 일에 징징대는 것일까?’ ‘멘탈이 무너진 탓 아닐까. 내가 이렇게 약하고 못난 존재였다니. 정신 차리자.’ 급기야 ‘넌 마음이 너무 약해. 나약한 인간이야. 형편없어’라는 결론에도 여러 번 이르렀다. 일할 때 아이들에게 했던 조언, 의지를 가지고 버티라며 내뱉었던 말들이 떠올랐다. 그 말이 부메랑처럼 돌아와 내 뒤통수를 후려치는 것 같았다. 스스로를 나약한 인간으로 규정하며 마음이 더 가라앉았다.      



거울 속 내 모습은 어디에서 왔을까, <거울 앞의 장토 부인>    

  

 

<거울 앞의 장토 부인>(1875, 에드가 드가)    @wikiart


한 여인이 뒷모습을 보인 채 거울 앞에 앉아 있다. 외출 직전인지 화려한 모자와 옷차림이 눈에 띈다. 흰 피부와 단정하고 우아해 보이는 목선. 우리가 볼 수 있는 현실 속 그녀의 모습 전부다. 반면 거울 속 여성의 앞모습은 어떠한가. 빛을 받지 못했는지 피곤한 것인지 얼굴이 그늘져 보인다. 표정마저 침울해 보인다. 우울함을 담은 거울 속 여성의 시선은 관람자를 향해 있다. 거울 바깥의 우아해 보이는 여성의 뒷모습과 거울 속 그늘진 앞모습을 번갈아 쳐다보게 되는 그림이다. 뒷모습일 뿐이지만 그녀의 실제 모습과 거울 속 얼굴이 현저하게 달라 보이기 때문이다.


 에드가 드가(Edgar degas, 1834~1917)의 <거울 앞의 장토 부인>(1875)이라는 작품이다. 그림 속 주인공은 드가의 친구였던 장-밥티스트 장토의 아내 베르트 장토다. 젊은 시절 만난 드가와 장토는 오랫동안 우정을 지속했다. 드가는 우정의 표시로 친구의 아내를 그려 선물했다. 장토 부인 역시 남편이 죽은 후에도 이 그림을 오랫동안 가지고 있다 1929년 프랑스 정부에 작품을 기증했다.      


 

에드가 드가의 초상화  @wikiart


 장토 부인이 이 그림을 마음에 들어했을까. 작품을 볼 때마다 머릿속에 궁금증이 떠돈다. 드가는 냉소적인 성격의 인물이었다. 초상화 속 인물도, 현실의 풍경도 좀처럼 미화하는 법이 없었다. 또 다른 친구였던 에두아르 마네 부부의 초상화를 그려주었을 때의 일화도 유명하다. 마네는 아름답기보다 추하게 그려진 아내의 모습을 칼로 잘라내 버렸다. <거울 앞의 장토 부인> 속 인물의 모습 역시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먼 모습이다. 거울 속 장토 부인의 그늘진 모습이 인상적이다. 초상화지만 인물의 얼굴을 직접적으로 그린 것이 아니라 거울 속 모습을 그려낸 점, 장토 부인의 얼굴을 미화하지 않고 어두운 분위기를 강조했다는 점에서 인상적인 그림이다.    


 거울 속 장토 부인의 모습은 자신의 모습에 만족하지 못하는 그녀의 마음을 비춘 것일지도 모른다. 나 역시 거울을 보다 마음에 들지 않는 내 모습 때문에 눈을 돌려버릴 때가 있다. 만족하지 못하는 마음으로 거울을 끊임없이 들여다보는 경우도 있다. 만족스럽지 못한 거울 속 내 모습은 때때로 피하고 싶은 존재가 된다.     

    


멘탈 경연대회에서 승리할 필요는 없다.

     


우리의 마음속에도 거울이 있다. 나 자신을 들여다보는 스스로의 시선. 자아상(自我想)이다. 미국의 사회학자 찰스 쿨리(Charles H. Cooley)가 이야기한 거울 자아 이론이라는 것이 있다. 이론에 의하면 인간의 자아는 나 혼자 형성하는 것이 아니다. 거울 속 스스로를 바라볼 때처럼 타인이 바라보는 내 모습, 다른 이들이 내게 기대한다고 생각되는 모습을 바라보며 자아상을 만들어 간다. 내 행동이나 특성이 타인에게 긍정적으로 평가되면 스스로를 긍정적으로 느끼고, 부정적으로 평가하면 부정적인 자아상이 형성된다. 결국 자아는 타인과의 상호작용으로 형성되는 사회적 관계의 부산물이라는 이야기다. 장토 부인 역시 타인의 기준을 내면화해 이에 미치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 그늘진 스스로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

      

 내 ‘거울 자아’를 생각해본다. 주변에서 ‘심약해 보인다.’ ‘생각이 지나치게 많아 보인다’는 말을 들으면 나 자신이 못나 보였다. 거울을 들여다보지 않기 위해 억지로 강한 척 해보기도 했고, 약해 보이는 나를 구박하기도 했다. 주변 사람들과 세상이 생각하는 평균치를 채우지 못했다는 마음 때문에 힘들어했다.   

   

 그러나 '거울 자아 이론'을 뒤집어 생각해 보면 또 다른 깨달음이 온다. 장토 부인의 실제 모습과 거울 속 모습은 사뭇 달라 보인다. 내 모습이 실제로 못난 것이 아니라 거울이 왜곡되었거나 거울을 바라보는 시선이 잘못된 것일 수 있다. 내 자아를 비추던 거울이 제대로 된 거울이었을까. 거울도 왜곡될 수 있다. 어릴 때에는 주변인들의 반응을 통해 내 기질이나 특성을 부정적으로 보아 왔다. 부정적인 자아상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거울도 항상 객관적이고 옳은 것이 아니었다. 가령 내가 나약하다 여겼던 특징은 뒤집어보면 섬세한 것이었다. 주변의 반응이나 시선, 사회의 기준치 자체가 왜곡된 것일 수 있었다. 어릴 때에는 거울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몰랐지만 이제는 안다. 내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거울이 왜곡되었을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허약하고 못나다며 스스로를 규정하던 자아상 안에는 복잡다단한 배경이 숨어 있다. 무엇이든 정신력으로 돌파하라고 이야기하는 잘못된 세상의 기준도 배경이 될 수 있다. 섬세한 것을 허약하고 열등한 것으로 규정하며 나를 딱하다고 쳐다보았던 주변의 시선이 옳지 못한 것일 수 있다. 멘탈이 강한 사람만 잘 살아남을 수 있는 것처럼 압박하는 사회적인 압력과 분위기가 나를 괴롭히는 것일 수 있다. 거울이 왜곡된 것이라는 사실만 알아도 내가 못나고 바보 같은 것은 아니라는 생각에 마음이 편안해졌다. 더 이상 거울을 탓할 필요도 없었다. 거울에 비친 나를 왜 이리 못났냐며 탓할 필요도 없었다. 왜곡된 거울을 내 의지로 서서히 바꾸어 가면 충분했다.


우리 사회에는 '강한 정신력'의 기준이 존재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 기준을 채워야만 정상적인 생활이 가능한 것처럼 여기는 분위기 역시 존재한다. 그 정도 일로 힘들어하냐는 주변의 비난과 질책도 난무한다. 당신이 힘들어도 힘들다고 티를 못 내는 분위기에는 여러 가지 뒷배경이 얽혀 있다. 힘든 일이 생길 때마다 어디에도 이야기하지 못하고 스스로를 못나고 허약하다고 여기는 이유에도 비슷한 맥락에 있다.      


“멘탈이 나갔다” “멘탈이 약하다”. 쉽게 하는 말이다. '모든 걸 이겨낼 수 있는 강철 멘탈'이 정말 존재할까. 의문이 든다. 역경이 다가왔을 때 셀 수 없이 마음이 무너질 수 있다. 그것이 세상을 제대로 살지 못할 조건은 아니다. 충분히 무너진 다음 흩어진 마음을 주워 담는 일도 가능하니까.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멘탈도 능력치라 생각하고, 멘탈에도 턱걸이 기준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 턱걸이를 넘지 못하면 인생이 실패한 것처럼 여긴다.      


 나처럼 스스로의 허약한 정신력을 탓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시험에 실패하거나 노력한 일의 성과가 나타나지 않을 때, 이 정도 힘듦을 못 견디는 네가 문제라며 스스로에게 되뇌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인생은 멘탈 경연대회가 아니다. 우리가 그 대회에서 우승을 거머쥘 필요도 없다. 왜곡된 거울에 자신을 비추어보며 스스로를 괴롭힐 필요도 없다. 멘탈이 강하다고 칭송받는 사람들, 탁월한 업적을 이룬 사람들이 존재하지만 꼭 그들처럼 될 필요는 없다. 모든 사람이 대단한 정신력을 갖추고, 그런 업적을 이루면서 살아야 될 이유가 존재하지 않는다.  


누구나 적당히 엎어지며 헤매며, 마음이 무너지는 경험을 하며 살아간다. 삶에 넘어져 본 경험이 있어야 힘든 상황에 놓인 타인을 이해할 공감능력도 생긴다. 나만 특별히 못난 것이 아니다. 자신의 정신력을 채근하며 스스로를 나약하다 여기는 일에 마음을 너무 쓰지 말자. 차라리 쉬면서 스스로의 기본적인 욕구를 챙기면서 사는 것이 낫다. 몸과 마음을 챙기다 보면 다시 일어설 용기도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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