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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랑선생 Apr 06. 2021

어느 날 갑자기
헬리콥터 맘이 되었다

내 마음의 밑바닥을 보는 순간

숨기고 싶은 모습이 내 모습이 튀어나올 때  


    

 2020년 10월. 아이의 온라인 수업이 시작되었다. 아들은 이 곳 중동에서 미국계 학교 유치부에 재학 중이다. 이 나라는 여전히 확진자 숫자가 많아 오프라인 수업을 하루도 하지 못했다.-지금도 1년 넘게 현재 진행형이다- 대신 온라인 개학이 이루어진 것인데, 6살짜리 아이가 3시간 이상의 컴퓨터 화면으로 수업을 듣는 게 어려울 거라는 예상은 했다. 역시 첫날은 예상을 뛰어넘는 당황의 연속이었다. 아이는 가만히 앉아 있는 것조차 어려워 보였다. 영어를 정확히 알아듣지 못하기에 20분쯤 지나자 몸을 비비 꼬기 시작했다. 학급에서 영어로 제대로 의사소통이 이루어지지 않는 학생은 우리 아이밖에 없을 거라는 느낌 들었다. 좌로 우로 눕고 구르는 아이를 진정시키는데 진이 절로 빠졌다.   


 며칠 동안 수업이 진행되면서 나는 자연스럽게 두 가지 역할을 맡게 되었다. 아이에게 선생님 말을 통역해 알려주며 수업에 따라가도록 도와주고, 선생님이 질문하면 아이가 할 말을 보드에 적어 알려주는 역할이었다(아이는 영어로 간단한 단어는 말할 줄 알았지만 완전한 문장을 구사하지 못했다 ). 온라인 수업 초기에는 3시간 내내 붙어 도와주지 않으면 수업 진행이 거의 불가능할 정도였다. 영어에 서툰 내가 동시통역사에 예능작가가 되다니. 유머 소재가 될 법한 상황인데 웃음이 나지 않았다. 선생님이 보내주는 학습 사이트 링크를 따라가거나 온라인 과제도 소화해야 했기에 도움이 필수였다. 태어나서 한 번도 상상해보지 못한 역할을 맡게 되었다. 헬리콥터 맘. 별 수 없이 아이 옆에 앉아 일일이 모든 수업 장면을 지켜보는 입장이 되었다.


 몇 달 동안 수업의 흐름을 따라가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아이에게 화를 내지 않고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틈틈이 부엌으로 달려가 킷캣 초콜릿을 하루에 5개씩 집어먹었다.( 만약 이 나라에 소주가 있었다면 소주를 하루에 한 병씩 먹었을 것이다). 같은 또래 아이를 둔 대다수 엄마들이 온라인 수업으로 지쳐 있었다. 그들과 가끔 하소연을 나누는 게 그나마 낙이었다.   


 상황도 답답했고 아이에게도 울컥했으나 견디기 어려웠던 점은 따로 있었다. 마주하기 싫은 내 모습을 수시로 보는 게 고역이었다. 이전까지 나는 스스로에 대한 어느 정도의 믿음이 있었다. 아이의 학습에 집착하지 않고 정답을 강요하지 않는 엄마로 지낼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 이전까지는 어느 정도 들어 맞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온라인 수업을 하는 동안 단단한 착각이었음을 여러 번 깨달았다. 아이가 오답을 큰 소리로 외치거나 수업의 흐름을 끊는 말을 할 때마다, 나도 모르게 굳은 얼굴과 딱딱한 말투가 나왔다. 내 아이가 수업 흐름을 끊는 것을 견딜 수 없어 사소한 행동을 제지하는 일도 잦아졌다. 아이와의 크고 작은 실갱이가 이어졌다. 나름대로 스스로를 열린 사고의 소유자라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나는 정답 지향 주의자였다. 영어가 서투른 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으니, 조금만 부주의하게 들으면 수업 흐름이나 지시사항을 놓치는 순간도 있었다.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다른 외국인 엄마들에 대한 열등감도 튀어나왔다.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육아를 하면서 힘든 일이야 한두 가지가 아니었으나 가장 힘들었던 순간은 내 마음 밑바닥을 볼 때였다. 아이를 키우면서 부모는 자신의 밑바닥을 수차례 본다는 데 과연 맞는 말이었다. 서툰 모습만 보여주는 나, 별 일 아닌데 울컥하며 우는 나, 다른 이들에게 열등감을 느끼는 나, 치밀어 오르는 화를 제어하지 못하는 나. 마음 가장 밑바닥에 숨어 있던 내가 불쑥불쑥 튀어나오면 당황을 넘어 좌절에 이르렀다. 때로는 내 마음속 감정이나 열등감, 슬픔을 아이에게 오버랩해 마음이 힘들어지기도 했다. 이 나라에서 아이가 학교에서 외로울까 울던 나날들이 있었다. 아이가 마주한 상황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내 외로운 모습을 아이에게 투영해 감정 이입했기 때문이었다.


 되돌아보면 육아 이전에도 가장 숨기고 싶은 내 모습이 갑작스럽게 튀어나오는 순간이 종종 있었다. 누군가를 이유 없이 미워하거나 질투하는 나를 발견할 때가 그랬다. 졸렬하고 비겁한 내 모습을 굳이 알고 싶지 않았다. 그런 마음을 솟구치게 하는 이를 일부러 피하기도 했다. 내가 더 못나 보일까봐 애초부터 도망간 것이었다. 마음의 밑바닥, 가장 보기 싫은 거울을 마주하는게 두려웠다.      



나는 내 모습을 왜 못마땅해할까, <거울 앞의 소녀>      



 노먼 록웰(Norman Perceval Rockwell, 1894년 – 1978년)은 20세기 미국을 대표하는 일러스트레이터이자 화가다. 사실주의의 경향을 보여주었으며, 뛰어난 실력으로 10대부터 일러스트를 그리며 돈을 벌었다. 그의 활동 중 가장 길게 이어진 것은 잡지의 표지를 그리는 활동이었다. 미국의 잡지 ’ 새터데이 이브닝 포스트‘에 47년간 총 300개가 넘는 표지 그림을 남겼다. 그림의 주제가 된 것은 주로 미국 중산층의 모습이었다. 잡지 표지라는 특성상 단란한 가족의 다정한 모습과 미국적 가치를 상징하는 일러스트가 많았다.


<달을 바라보는 소년과 소녀>(1926)와 <추수감사절에 감자껍질을 깎는 어머니와 아들>(1945). 록웰이 잡지 표지로 그린 일러스트들이다.  



1943년에는 프랭클린 대통령이 유엔에서 네 가지 자유를 언급한 연설을 듣고 그 모습을 일상의 풍경으로 옮기는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새터데이 이브닝 포스트와의 작업을 끝낸 후에는 인종문제, 시민의 권리, 우주탐험 등 평소 자신이 그리고 싶어 했던 주제를 택해 새로운 잡지에 일러스트를 싣기도 했다.


록웰이 그린 네 가지 자유 그림 중  <언론과 의사표현의 자유>(1943)와 <공포로부터의 자유>(1943)




 다음은 록웰의 대표작 중 하나인 <거울 앞의 소녀>다.

<거울 앞의 소녀> (Girl at mirror. Norman Rocwell, 1954)  @wikiart


 거울 앞에 앉아 자신의 모습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소녀가 있다. 어딘지 불만스러운 표정이다. 거울 옆에는 버려진 인형이 있다. 소녀는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관찰하는데 푹 빠져 유년기에 가지고 놀던 인형을 내팽개친 것으로 보인다. 그녀가 새롭게 관심을 보이는 사물은 립스틱과 빗, 분첩이다. 소녀의 무릎 위에는 잡지가 엊혀져 있다. 잡지 안에는 1940~1950년대의 유명 배우인 제인 러셀(Jane Lussell)의 모습이 보인다. 소녀는 지금 여배우의 모습을 자신의 이상향으로 삼아 흉내 내지만,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이 그에 미치지 않아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다.


 우리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자주 본다. 스스로가 생각하는 이상적 자아상을 염두에 두고 거울을 바라보는 순간도 많다. 이상적인 자신의 모습과 현실 속 스스로의 모습을 비교해보며 괴리감에 못마땅해하는 경우도 있다. 스스로의 모습 중 숨기고 싶은 어두운 부분을 일부러 피하며 보지 않기도 한다. 소녀 역시 자신의 모습에 딱히 만족하고 있는 듯 보이지 않는다. 이상향으로 생각하는 스스로의 모습(여배우의 모습)을 마음속 잣대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마 그녀가 먼 훗날 스스로에 대해  더욱 잘 알기 위해서는 잡지와 분첩, 립스틱과 빗 모든 것을 버려야 할지도 모른다. 언젠가는 자신의 모습 그대로를 맞닥뜨려야 하는 순간이 찾아오기 때문이다.      



마음 밑바닥을 휘젓지 않고 바라볼 때 생기는 일       



 자신의 모습에 만족하지 못하는 소녀의 모습에 나를 비춰본다. 그림자 영역이라는 개념을 도입한 정신의학자 칼 융(Carl Gustav Jung)의 이야기를 떠올려보기도 한다. 그에 따르면 그림자 영역이란 인간의 공포심, 불안 등의 부정적 생각과 마음 한 켠에 숨겨진 비인격적인 부분을 말한다. 그는 그림자 영역을 깨닫는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불행하게도 인간은 자신이 생각하거나 원하는 모습보다 전반적으로 덜 좋은 사람이라는 사실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모든 사람은 그림자를 가지고 있고, 개인의 의식적인 일상 속에서 그것이 덜 드러날수록 그 그림자는 더욱 어둡고 진하다. 만약 열등감을 의식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언제든 그것을 고칠 수 있다... 하지만 그림자가 의식적으로 억압 또는 고립되어 있다면 절대로 고쳐질 수 없다.

 

 아이를 키우면서, 누군가를 미워하거나 질투하며 나 역시 보고 싶지 않은 그림자와 수차례 마주쳤다. 내 마음 밑바닥을 보는 일은 괴로운 일이었으나 한편으로는 새로운 깨달음이 오기도 했다. 마음 가장 깊숙한 곳을 들여다보는 기회는 쉽게 오지 않으니까.  


온라인 수업을 참관할 때도 몇 가지 마음 밑바닥, 그림자와 마주쳤다. 몇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가 영어를 못한다는데 열등감이 있었구나.”

“정답만 이야기해야 부끄럽지 않을 거라는 생각, 전체적인 흐름을 거스르면 절대 안 된다는 사고방식이 머릿속에 있었던 거네."

“아이가 외로울까 봐 걱정되는 것도 있었지만 실은 내 외로움을 아이에게 투영시킨 거였구나.”


 일단 그 지점까지만 생각했다. 예전이라면 그 뒤에 수많은 생각이 이어졌을 것이다. “나는 해외에 와서 몇  년 동안 영어도 제대로 못하는 못난이야.‘ ”내가 아이에게 정답을 강요하는 형편없는 엄마였다니. “ 등등 몇 가지 더 나를 괴로움에 빠뜨릴 생각 주머니가 그득했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나를 구박하지 않고 그저 가만히 들여다보기로 했다.  초조함과 불안이 약간 덜어졌고, 수업을 옆에서 지켜보는 게 나아졌다.


 숨기고 싶던 나의 못난 모습을 마주해 괴로운 순간이 있다. 미움, 질투, 걱정, 불안, 비인격적인 욕망. 눈을 돌리고 싶은 순간. 내 그릇이 이 정도밖에 안 된다는 사실에 마음이 답답해지기도 한다. 그러나 성인군자가 아닌 이상 미움과 질투를 품거나 마음 그릇이 작아지는 순간은 누구에게나 온다. 그런 순간 없이 내가 결백한 인간이기를 바라는 것은 어찌 보면 무리수다. 스스로에 대한 기대치가 지나치게 높은 것일 수도 있다. 어떤 일에도 초연하고 멋진 이상형을 기준으로 두고, 현실이 그에 못 미치니 오히려 마음이 괴로워지기 쉽다. 스스로를 미워하는 걸 넘어 혐오하는 경우도 있다. 남을 직접적으로 괴롭히거나 힘들게 만들지 않았다면 그 마음을 탓하지 않고 가만히 바라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알 수 있다. 내 못난 마음의 포장지 뒤에는 숨겨진 욕구가 있다. 누군가를 미워하거나 질투하고 있다면 그를 통해 깊숙이 숨어 있던 스스로의 욕구를 깨달을 수 있다. 예전에 교육 심리학 강의를 들었을 때 강사가 말한 일화가 기억에 남는다. 강사는 옷을 잘 입고 한껏 꾸미고 오는 직장 동료를 보고 늘 못마땅해했다. 허영끼가 넘치고 사치스러운 여자라 여기며 싫어했는데, 가만히 살펴보니 자신도 그 동료처럼 옷을 잘 차려입고 꾸미고 다니고픈 욕구가 숨어 있었다는 것이다. 실은 내 안의 피하고 싶은 모습이 다른 대상에게 투영된 현상이었다. 


 아이를 향한 복잡한 마음을 가만히 들여다보니 몇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열등감이 있다는 것은 나에게는 영어를 잘하고 싶은 욕구가 있다는 이야기였다 – 아직도 시간문제로 여전히 영어 공부를 못하고 있지만-. 수업을 지켜보면서 스트레스받고 초조한 것은 좀 더 헐렁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지내고 싶은 욕구가 있다는 거였다. 마음 깊숙한 곳을 보자 몇 가지 사실을 새롭게 알게 되었고, 마음도 약간 편안해졌다. 지금도 아이의 영어가 비약적으로 향상된 것도 아니고, 여전히 나는 수업 참관을 하며 중간중간 초콜릿을 한 움큼씩 삼켜먹는다. 그러나 견디기 힘든 내 모습이 무엇인지 살펴보고 그 안을 들여다보자, 전보다 괴로움이 덜어졌다.


 잔인한 거울이 우리를 비출 때가 있다. 참기 힘든 순간이다. 들키기 싫어 나도 모르게 숨겼던 생각했던 내가 숨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음 밑바닥을 괴로움으로 휘젓지 않고, 맑은 얼굴로 마음을 가만히 살펴보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다. 그동안 모르던 나를 발견할 기회가 될 수 있다.      

    


다음 주(4월 13일 화요일)에는 <그림으로 나를 위로하는 밤> 매거진은 한 주 쉬고 대신 <글쓰기에 대한 글쓰기>에 글쓰기 관련 이야기를 써서 발행하겠습니다. 글의 소재를 생각해볼 시간이 또 다시 필요해져서, 죄송하지만 한 주만 쉬어가겠습니다! 2주 뒤면 또 새로운 소재가 솟아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림으로 나를 위로하는 밤>에는 4월 20일 화요일에 글 다시 올리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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