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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랑선생 Feb 09. 2021

세상에서 가장 쿨하지 못한 관계

가족의 기대를 채워주지 못한다는 마음

‘기대’와 ‘실망’ 사이     


  

학교에 근무할 때 아이들 상담을 하다 의문을 가진 적이 있다. 성적이 떨어질 경우, 다른 것보다 부모님을 실망시킬까 걱정하는 아이들이 많았다. 처음에는 언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나는 학창시절 부모님의 기대치를 그다지 신경 쓰지 않고 지내는 아이였다. 오히려 내 자신이 스스로에게 거는 기대치가 높아 허우적대는 스타일이었다. 때문에 아이들이 품고 있는 걱정을 당시에는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지인 K를 보면서도 비슷한 생각을 했다. 종종 K를 보면 타고난 효녀라는 생각을 했다. 그는 직장생활을 시작 한 뒤 월급의 상당 부분을 부모님께 드렸다. 부모님 집의 오래된 가전을 바꿔드리거나 가족여행을 하는데 자신의 시간과 돈을 아낌없이 바치기도 했다. 평소에는 자식으로서 당연한 도리를 한다 이야기했지만 때때로 부모님에 대한 불만도 내비쳤다. 주로 K가 제공해드린 것에 대해 부모님의 칭찬이 돌아오지 않을 때였다. “왜 오빠는 하지 않는 걸 나만 하고 있을까?” “부모님께는 나만 만만한 존재인 걸까?”  대화를 해보며 K에 대한 몇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다. K는 오빠와 여러모로 비교당하며 자랐다. 오빠는 부모님께 비교적 받고 자란 것이 많은데도 부모님을 살뜰하게 챙기지 않는 반면, 본인은 늘 ‘착한 딸’로서의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그의 노력은 어느 새 '당연한 것'이 되어 있었고, 충분한 인정을 받은 적은 없었다. 가끔 K가 결승점 없는 달리기를 하며 지치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학생들이나 K의 마음에 대해 생각해보다 문득 깨달았다. 나는 조금 다른 상황에 놓여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 부모님은 둘째인 나에게 특별한 기대나 간섭을 하지 않았다. 네가 무엇을 이루기를 기대한다는 이야기를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었다. 특히 엄마는 딸에게 아무런 이야기를 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학창시절 조용히 나를 돌보아주기는 했지만 엄마의 기대를 투영하거나 언니와 비교하지 않았다. -첫째인 언니는 장녀로서 나와는 사뭇 다른 기대 속에서 자랐을 것이라 생각 한다- 다만 엄마가 이미 여러 가지 상황으로 충분히 힘든 상태였기에 엄마의 힘듦을 가중시키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은 했다. 나만큼은 엄마의 속을 썩이지 않고 조용하고 성실하게 지내야 한다는 다짐을 속으로 하고는 했다. 때로는 엄마에게 늘 ‘야무진 둘째딸’이 되고 싶은데 항상 어설픈 막내로 보인다는 생각에 서운한 감정을 품은 적도 있었다. 생각해보니 맥락은 다르지만 나 역시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부모에 대한 복잡한 감정을 지닌 채로 살고 있었다.     



벗어나고 싶지만 두려운 존재, <갈라와 밀레의 만종>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i. 1904~1989)는 스페인의 초현실주의를 대표하는 화가다. 그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 영향 받아 꿈이나 환상, 무의식의 세계를 화폭에 담아낸 예술가였다.  달리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한 것은 <기억의 지속>(1933)일 것이다. 흐물흐물 녹아내리는 시계의 이미지가 강렬하게 각인되는 작품이다. 평범하게 보이는 사물을 비합리적인 방식으로 배열하거나 표현하며 환상의 세계를 그려내는 것이 그의 특기였다. 

<기억의 지속> (살바도르 달리, 1931)


 달리는 여러 가지 기행을 벌인 화가로도 유명하다. 특이하게 세운 콧수염을 내보이며 다녔고, 틈만 나면 똥 이야기를 했다. 학창시절에는 반정부 활동에 참여하다 유치장에 갇히고 퇴학당하기에 이르렀다. 런던에서 잠수복을 입고 강연을 하다 숨이 막혀 죽을 뻔한 적도 있었다. 특이한 방식으로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재주를 가진 예술가였다. 


달리의 생전 모습. 관종의 끼가 다분했다


 타고난 관종이었던 그에게도 복잡한 가족사는 존재했다. 달리의 아버지는 지역의 유지이자 부유한 공증인이었다. 음악과 그림을 사랑한 문화 애호가이기도 했다. 달리에게는 그가 태어나기 3년 전 어린 나이로 사망한 형이 있었다. ‘살바도르 달리’라는 이름은 이 형의 이름을 물려받은 것이었다. 부모는 달리에게 아낌없는 사랑을 쏟아 부었지만, 그를 사망한 형의 환생이라 여기며 부담을 안겨 주기도 했다. 달리는 한 인터뷰에서 “나는 결코 죽은 형이 아니며, 살아 있는 동생이라는 것을 항상 증명하고 싶었다”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달리가 17세 때 어머니가 죽은 후 아버지와의 관계는 좀 더 복잡한 단계로 나아간다. 달리는 낭비를 일삼고 기행을 벌이며 아버지의 속을 썩였다. 반면 아버지의 초상화를 많이 남긴 화가이기도 했다. 그가 그린 초상화 속 아버지는 화면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묵직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심경을 파악하기 힘든 옆모습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아버지에게 반항하면서도 그 거대한 존재를 두려워하는 달리의 심정을 담아냈다는 해석이 존재한다. 


달리가 그린 아버지의 초상(1925,1921)

 

 달리와 아버지의 관계가 파국으로 치닫게 된 사건이 일어난다. 달리가 친구이자 초현실주의 시인이었던 폴 엘뤼아르의 부인 갈라와 사랑에 빠지게 된 것이다. 더불어 달리는 한 전시회에서 석판화 위에 친필로 “나는 가끔 어머니 초상화 위에 재미로 침을 뱉는다”는 글을 적으며 아버지를 분노하게 만들었다. 두 가지 사건으로 아들을 괘씸하게 여긴 아버지는 아들에게 절연장을 보낸다. 달리 역시 정신적 족쇄였던 아버지와 절연을 하겠다고 선언한다.  


 아래 작품은 그가 갈라와 만난 이후 그린 <갈라와 밀레의 만종>(1933)이라는 그림이다.

 

<갈라와 밀레의 만종>(살바도르 달리, 1933)


 작품 속에는 세 명의 등장인물이 존재한다. 방 안, 가장 원거리에 화려한 색깔의 옷을 입고 앉아 있는 여인이 달리가 사랑했던 여인 갈라다. 갈라는 경직되고 위축되어 보이지만 한편으로 분노를 숨기고 있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대머리의 사내는 사회주의자 레닌의 상징으로 해석된다. 달리는 다른 작품에서 아버지를 레닌으로 해석해 그린 적이 있기 때문에, 그림 속 대머리 사내를 달리의 아버지로 보는 해석이 많다. 문을 조심스럽게 잡고 실내에 있는 둘을 바라보고 있는 인물은 갑각류를 머리에 얹고 있다. 사내는 달리 자신을 상징한다. 갑각류를 얹은 사내는 조마조마한 심경으로 실내를 훔쳐보고 있는 중이다. 문 위에는 밀레의 <만종>이 걸려 있다. 달리는 일찍이 밀레의 만종을 보고 평온함이 아닌 죽음과 비극의 냄새를 맡고 이 작품에 집착하였다. 만종을 여러 가지 형태로 변형한 그림들을 남겼으며 <갈라와 밀레의 만종>은 그러한 작품 중 하나다.    


이 복잡하고 기묘한 그림이 상징하는 것은 무엇일까. 프로이트 식의 해석에 따르면 그림 속 달리는 자신의 사랑을 인정하지 않던 아버지에게 분노하는 한편, 그가 갈라를 만나주었으면 하는 기대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아버지의 심리적 지배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도 가지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아버지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양가감정이 작품에 나타난다는 것이다. 



쿨하지 않은 마음을 인정해야 할 때


    

<갈라와 밀레의 만종>은 달리의 복잡한 심경을 전한다. 아버지의 눈 밖에 나는 기행을 일삼은 달리는, 한편으로 문 밖에 서서 들어오지 못할 정도로 아버지의 존재를 두려워하는 중이다.  


달리만큼은 아니더라도 우리 역시 부모를 대하는 복잡다단한 감정에 마주친다. 그들이 준 행복과 기쁨, 분노와 슬픔은 동시에 존재한다.  특히 부모에 대한 기대를 채우지 못했다는 마음, 채워지지 않는 인정 욕구는 분노나 슬픔으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대개 죄책감을 동반한다. 나를 세상에 존재하게 해준 이들이고, 그들과 쌓은 시간이 분노와 결핍으로만 채워진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가족에게 부정적 감정을 가졌다는 사실만으로 스스로가 부끄러워질 때가 있다. 결국 모든 것을 ‘내 탓’으로 돌리기 쉽다. 부모의 기대치를 채우지 못한 스스로를 못난 존재로 인식하기도 한다.


 누군가의 기대치를 채우지 못했다는 마음 때문에 괴로울 때 나는 ‘공놀이’를 상상한다.  나의 노력이 인정받길, 내 고통을 이해해주길 원하며 상대에게 신호를 보낼 때가 있다. 감정의 공을 상대에게 보내는 것이다. 일단 공이 넘어간 후에는 조마조마한 심경으로 상대의 반응을  살펴보게 된다. 그러나 상대에게 넘어간 공이 나에게 온전하게 돌아오지 않을 때가 있다. 오히려 상대가 내 노력이나 고통을  무시하는 경우도 있다. 나의 바람을 채워주지 않는 상대를 원망하는 마음, 그의 기대치를 제대로 채우지 못하는 나 자신을 자책하는 마음이 우리를 사로잡는다.   

 

 씁쓸한 사실이지만 그 공을 나에게 다시 제대로 돌려보내줄 것인지 가지고 있을 것인지는 상대의 마음에 달려있다. 내가 간절히 공을 다시 달라고 요청하거나 빼앗으려 해도 상대의 마음이 닫혀 있다면 큰 소용이 없다. 그것은 상대가 가진 감정일 뿐이고, 이는 그 자신의 마음 속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상대의 감정까지 내가 책임질 수는 없다. 내 노력과 능력에 비례하여 상대가 만족하는 것도 아니며, 누군가의 기대치를 내가 채워줄 수 있을 거라는 생각도 일종의 착각이다. 

  가족의 경우라 해도 마찬가지다. 부모의 기대치를 채우는 것 모두를 자녀가 책임지기는 어렵다. 반대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씁쓸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우리에게 약간의 자유를 선사하는 진실이기도 하다.      


 아무리 가족이라 해도 부모와 나는 동일한 감정을 가지고 사는 존재가 아니다. “가족은 하나”라는 명제는 아름다우나, 모든 가족이 동일한 의지와 감정을 가져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가족의 기대치를 고스란히 채워주어야 한다는 의미도 아니다. 우리는 부모에게 특정한 감정을 강요할 수는 없고, 부모도 자녀에게 특정한 감정을 요구할 수 없다. 가족은 우리 인생에 중요한 존재인 것은 분명하며, 관계를 위해 어느 정도 노력해야 하는 것도 맞다. 한 마디로 형용하기 힘든 관계라는 것 역시 진실이다. 그럼에도 가족의 감정과 내 감정을 동일시하지 않는, 최소한의 선긋기는 필요하다.  


 상반되는 이야기일 수 있지만 쿨하지 못한 내 감정을 어느 정도 인정하는 태도도 필요하다. 최근에는 수많은 미디어와 SNS에서 산뜻하고 단호한 인간관계를 선호하고 권장하지만, 대다수 현실은 그렇지 않다. 부모와 자식 관계라면 더더욱 그렇다. 가령 나는 아이를 낳기 전에는 스스로가 쿨한 엄마가 될 것이라 예상했으나 실제 아이를 낳고 보니 세상에서 가장 쿨하지 못한 엄마였다. 자식의 입장이 되어서도 마찬가지다. 부모로부터 감정이 독립되지 못한, 단호하지 못하고 쿨하지 못한 나를 탓한다면 오히려 마음이 힘들어진다. 생각보다 많은 이들이 복잡하고 질척대는 감정 속에서 살아간다.  부모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나를 탓하지 않고, 그저 내 속에 여러 가지 감정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편이 낫다. 가족과의 관계 속에서 복잡한 감정을 마주하고 있다면 그런 나를 못나다며 미워하지 않아도 된다. 가족이라는 이름은 행복을 안기기도 하지만, 때로는 우리를 한없이 약하게 만드는 이름이기도 하니까. 


 가족에 대한 감정은 어차피 ‘좋다, 나쁘다’의 한 가지 단어로 함축할 수 없다. 수많은 단어와 그보다 많은 마음이 떠다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복잡한 감정을 그대로 인정하는 일, 그것이 어쩌면 모든 해답의 시작일지 모른다.      



글감이 약간 떨어져서 다음 주 화요일에는 <그림으로 나를 위로하는 밤> 매거진은 한 주 쉬고자 합니다.

대신 다음주 화요일(2월 16일)에는 <글쓰기에 대한 글쓰기> 매거진에 글쓰기에 대한 이야기를 하나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다다음주 (2월 23일) 화요일에는 다시 이 매거진에 글을 발행하겠습니다. (2주 후면 글감이 충분히 구해질 것 같습니다 ^^;). 죄송하다는 말씀 드립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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