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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랑선생 Feb 02. 2021

나만 비정상일까 고민될 때  

우리의 고민은 특수하지만 보편적이다 

‘비정상’이라는 감옥에 스스로를 가둘 때

      

  예능 프로그램을 보는데 우울해지던 시기가 있었다. 해외 생활을 시작할 때라 아는 사람도 없었고 아이가 어려 외출도 쉽지 않을 때였다. 무기력으로 손 하나 까딱하기 싫었고, 사회적으로 고립된다는 것이 이런 느낌인가 생각하던 나날이었다. 못난 내 모습과 달리 예능 프로그램에는 행복하고 화기애애한 사람들의 모습이 가득했다. <나 혼자 산다>와 같은 프로그램에서는 연예인들의 혼자 사는 모습과 함께 여러 명이 모임을 하며 즐겁게 어울리는 모습도 보여주었다. 해외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당시의 나는 모여서 대화할 사람이 주변에 한 명도 없었다. 육아 프로그램에 나오는 부모들은 혼자서 여러명의 아이를 능숙하게 돌보는데 비해 아이 한명에도 쩔쩔 매고 버거워하는 내 모습도 싫었다. tv에 나오는 그들의 행복이 정상인 것 같았고, 내 상황은 비정상으로 느껴졌다. 못나고 초라한 상태가 씁쓸하게 느껴져 점차 방송을 보지 않게 되었다.  


 결국 tv 시청 대신할 수 있는 것을 찾기 시작했다. 적극적으로 취미를 즐기거나 무언가를 새롭게 배울 여유는 없었다. 가능한 것은 아이가 낮잠을 자는 1~2시간마다 핸드폰을 손에 들고 인터넷을 하는 것뿐이었다. 주로 두 개의 인터넷 커뮤니티에 들어가 글을 읽었다. 한쪽은 구성원 연령대가 나와 비슷한 30대부터 50대까지의 사람들이 대부분인 곳이었고, 다른 쪽은 연예인을 좋아하는 젊은 층들이 모인 곳이었다. 주로 자신의 관심사에 대해 이야기하는 글이 대부분이었고, 고민인 척 자랑을 늘어놓는 이들도 있었다. 그렇지만 온라인 속 익명을 빌려 자신의 솔직한 고민을 털어놓는 이들이 있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 많았다. 

“친구가 하나도 없는데 비정상일까요?, “가까운 사람에게 열등감이 느껴져요.”, “일상이 너무 무기력하고 우울해요”,  “속마음을 털어놓을 사람이 없네요”,  “가족이 원망스러운데 어떻게 해야 할까요?” 


 두 인터넷 커뮤니티는 연령대가 확연히 달랐지만 놀랍게도 올라오는 고민은 비슷했다. 나도 품고 있는 고민이었다. 글을 읽은 이들이 공감하며 솔직하게 남겨주는 댓글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사람에 대한 기대치를 내려놓으라거나, 누구나 비슷한 상황에 놓이게 마련이니 마음 편안히 생각하라는 이야기가 많았다. 가까운 사람에 대한 미움이나 원망, 열등감이 이상한 감정이 아니며, 나도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다며 토닥여주는 댓글도 있었다. 가끔 글쓴이가 문제라며 노력하라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대체로 따뜻한 위로의 댓글이 많았다. 


 커뮤니티에 직접 글을 올리지 않았지만 나와 비슷한 고민을 품은 이들이 올린 글을 읽으며 위로받았다. 나만 스스로를 비정상이 아닐까 불안해하며 끙끙 앓는 것이 아니었구나, 다른 사람들도 나와 크게 다르지 않은 생각을 하며 살고 있구나. 단순한 깨달음이었지만 위안이 되었다. 고민 글을 올린 이들의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그들도 나처럼 마음 한편 외롭고 헛헛한 마음을 품은 채로 지내고 있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불행하거나 외롭다는 사실이 기쁜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나와 비슷한 고민을 품은 누군가가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에 묘한 위로가 찾아왔다.      



인생의 길, <우리는 누구이며,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폴 고갱의 자화상 

 

폴 고갱(Paul Gauguin. 1848~1903)은 파리에서 저널리스트인 아버지 밑에서 태어났다. 그가 불과 18개월 때 아버지 클로비스가 심장병으로 사망해 집안이 기울었다. 어머니는 삯바느질로 생계를 이어갔다. 고갱 역시 일찍부터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어머니의 죽음 이후에는 파리에서 증권 거래소의 점원이 되어 일을 했다. 이후 경제적으로 비교적 여유롭던 덴마크 여성 메테 소피 가트와 결혼하였고 그에게도 윤택한 시절이 찾아왔다. 고갱은 이 시기부터 그림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인상파의 작품을 수집하며 본인의 창작 활동 역시 시작했다. 회화연구소에 다니며 그림을 그렸고, 살롱에도 자신의 작품을 출품하며 인상파 화가들과 어울린다. 


  30대가 된 후 프랑스의 주식시장이 무너지면서 실업자가 발생했다. 고갱은 증권 거래소를 관두고 전업화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처음에는 화가로 성공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으나 생활의 어려움은 끊이지 않았다. 아내와의 불화도 이어졌다. 이후 남미로의 짧은 여행, 고흐와의 동거, 파리 만국박람회에의 출품 등 다사다난한 나날을 보낸다. 문명 생활에 싫증을 느끼고 원시적이고 순수한 문화에 오랫동안 관심을 가지고 있던 고갱은 마침내 1891년 남태평양의 타히티로 향한다. 


 타히티의 마타에이아 섬에 정착한 그는 원주민들의 밝고 건강한 모습, 열대의 순수하고 정열적인 색채를 화폭에 담는다. 

<언제 결혼하니>(1892)와 <타히티의 여인들>(1891), 고갱이 타히티에서 그린 작품들이다.


 그러나 궁핍한 생활과 타지에서의 고독은 그를 떠나가지 않았다. 2년 후 그는 그리운 파리로 돌아가 개인전을 열었지만 상업적으로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자신의 작품 세계를 사람들에게 이해시키기 위해 여러모로 노력했으나 이러한 시도 역시 실패로 돌아간다. 가족들의 냉담한 반응 역시 그에게 절망을 안겨주었다. 


 프랑스에서 괴로운 시절을 보낸 후 그는 타히티로 돌아간다. 한 달여간 집에 틀어박혀 한 편의 그림을 그려낸다. <우리는 누구이며,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원제: Where Do We Come From? What Are We? Where Are We Going?. 1897~1898)라는 작품이었다. 습작의 과정 없이 바로 캔버스 위에 그려낸 그림이다.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폴 고갱, 1897~1898)


 작품은 인간의 생로병사의 과정을 은유적으로 담고 있다. 그림의 오른쪽에는 누워있는 아이가 있다. 아이의 모습은 인간의 일생 중 시작을 담고 있다. 그림의 가운데에는 과일을 따고 있는 청년이 눈길을 끈다. 그가 따고 있는 과일은 그리스도의 선악과, 인간의 욕망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사람들은 인생을 살아가며 그림 속 청년처럼 무엇인가를 갈구하며 부지런히 움직이다. 그에 비해 인생의 끝은 허망하게 느껴진다. 작품의 가장 왼쪽, 얼굴을 감싸고 외롭게 앉아 있는 노인의 모습에서 허탈한 결말을 짐작할 수 있다. 죽음이 얼마 남지 않은 노인은 어둡고 고독한 모습으로 덩그러니 앉아 있다. 관람자는 그림의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시선을 움직이며 인간의 탄생에서부터 삶, 죽음에 이르는 여정을 엿볼 수 있다. 아이와 청년, 노인 사이사이에는 인생을 논하는 듯 이야기하며 걸어가는 여인들, 관람자를 쳐다보는 여인들, 다양한 동물들이 보인다 (특히 가장 오른편에 위치한 검은 개는 그림의 왼쪽을 쳐다보고 있는데 죽음을 바라보는 고갱 자신을 의미한다는 이야기도 있다). 


 작품을 그릴 당시 고갱은 갖가지 시련에 처해 있었다. 파리에서의 실패와 더불어 아끼던 딸의 죽음까지 맞게 된다 - 그림의 왼쪽 타히티 섬의 여신이 그려져 있는데 그 옆에 서있는 것이 죽은 딸 알린의 모습이라는 해석이 있다-. 건강까지 망가진 상태였다. 절망에 빠진 그는 이 그림을 그린 후 자살 시도를 한다. 자살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기는 했으나, 죽음을 각오한 고갱이 유언처럼 남긴 작품이다.       



우리의 고민은 특수하지만 보편적이다   

     

 <우리는 누구이며,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는 관람자에게 묵직한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지만, 그림이 던지는 질문에 선뜻 대답하기는 어렵다. 현재 우리가 서 있는 곳은 삶의 중간이기 때문이다. 인생의 목적지가 어디인지 삶이 정확히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알지 못하는 채 하루하루 걷는다. 그럼에도 확실한 사실은 하나 있다. 세상 누구도 ‘탄생 –삶- 죽음’-이라는 외로운 여정에서 예외인 이는 없다는 사실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예외 없이 생로병사의 과정을 겪는다. 우리는 작품에 나타난 인생 행로를 그대로 걷고 있는 중이다. 

 그 안에서 사람들이 겪는 괴로움은 모두 개별적이고 각각 달리 보이지만, 한편으로 놀라울 정도로 보편적이고 비슷하다. 혼자라는 외로움, 가까운 사람과의 이별, 미움이나 질투심, 열등감이라는 마음, 채워지지 않는 욕심으로 오는 괴로움, 무기력하게 지치는 순간. 다른 듯 보이지만 놀라울 정도로 비슷한 카테고리로 엮이는 고민들이다. 큰 틀에서 보면 우리는 인생이라는 동일한 길을 걷고 있다. 그 과정에서 품게 되는 고민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우리가 느끼는 괴로움 중 하나는 스스로를 ‘별나고 이해받지 못할, 평균 이하의 인간’이라고 생각하는데서 온다. 다른 사람들은 멀쩡하게 사람들과 어울리고 인정받으며 행복하게 살아가는데 나만 그렇지 못하다는 느낌, 내 삶만 유독 초라하고 쓸쓸하다는 생각, 내 마음 그릇이 작고 못나서 이 모든 화(禍)를 불렀다는 판단. 누구의 이해도 받지 못하며 평생 고민을 안은 채 살아갈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한없이 외로워진다. 


 씁쓸한 판단의 기준점이 되는 것은 ‘정상의 삶’이다. 정상의 삶은 대개 나의 외부, 바깥에 존재한다. 방송이나 유튜브, SNS에 올라오는 화려하고 산뜻한 사람들의 모습을 ‘정상’으로 착각할 때가 있다. 그에 미치지 못하는 못난 내가 비정상이라는 생각에 마음 졸이기도 한다. 내 고민은 항상 개별적이고 특수한 것처럼 보여 누구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의 특수해 보이는 고민이나 괴로움은 놀라울 만큼 보편적인 것 안에 묶인다. 완벽한 타인처럼 느껴지는 사람도 나와 비슷한 고민을 품고 살아갈 가능성이 높다. 

 

 나 역시 비슷하다. 며칠 전 쓸쓸하고 우울한 마음에 유튜브에  “외로울 때”라는 말을 검색해보았다. “외로울 때 듣는 음악” “외로울 때 대처법”이라는 자동 검색어가 떴다. 문득 똑같은 단어를 유튜브에 검색해보는 사람이 어딘가에 있을 것이라는 상상을 했다. 나와 비슷한 마음으로 자판을 두드릴 누군가의 모습을 떠올리니 위안이 되었다. 내 고민이 보편적이라는 것을 알게 된 순간 외로움이 덜어진 것이다. 

 

 우리는 몇 가지 잣대로 정상과 비정상을 쉽게 구분하고, 자신을 비정상의 상태가 아닌지 궁금하고 불안해 한다. 그러나 인생이라는 큰 틀에서 내려다 보면, 살아가고 있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정상이다. 일단 하루하루 남에게 피해 주지 않고, 삶의 괴로움을 버텨내며 고군분투하며 지내고 있는 한 비정상은 아니다.  

 남들과 똑같기 때문에 당신의 고민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은 아니다. 내가 하는 고민을 남도 품고 있을 수 있으며 비정상이라는 단어로 스스로를 괴롭힐 필요는 없다는 이야기다. 당신을 불안하고 외롭고 초라하게 만드는 그 문제, 혼자만 지고 있는 짐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그 짐이 당신의 것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불안함과 고립감은 조금씩 덜어진다. 위로가 찾아온다. 비정상이라는 감옥, 내가 별나고 이상한 존재라는 판단은 당신 스스로 만들었을 가능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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