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랑선생 Jan 26. 2021

너를 360도쯤 알 수 있을까

2차원이 아닌 3차원의 존재로 누군가를 이해하는 용기

우리는 서로를 오해했다     


  

 해맑고 구김살 없어 보이는 이들에게 위화감을 느낀 적이 있다. 무해하고 맑은 얼굴, 긍정적 태도를 지닌 사람들을 보면 넉넉한 가정에서 걱정 없이 여유롭게 자랐을 것이라 생각했다. 나와는 다른 환경에서 자랐겠군. 풍요롭고 넉넉하게, 불행이라는 것은 도통 모르고 컸을 거야. 어린 시절 다정한 누군가가 하루 종일 저 사람을 돌봐주었겠지. 어릴 때 혼자 있던 시간이 많았던 것에 불만이 없던 나였지만, 그런 이들을 보면 마음속에서 알 수 없는 화가 불쑥 튀어나왔다. 겉으로 드러난 감정은 위화감이었지만, 마음 깊은 곳에는 질투심이 자리잡고 있었다.

 

 지인 L도 내심 질투하던 이들 중 하나였다. 늘 환하고 밝게 웃었고, 그 웃음만큼 세상을 환하게 바라보는 사람으로 보였다. L과 내가 절친한 사이는 아니어서 그에 대해 많이 알지는 못했지만 속으로 생각했다. 세상의 어두운 면을 경험해본 적이 없어 저렇게 밝은 거야. 틀림없어.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L과 긴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처음부터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우연히 서로의 고민을 털어놓게 되었다. 고민은 과거 이야기로 조금씩 흘러갔다. L의 가정환경과 속사정을 알게 되었다. 내 예상은 정확히 틀렸다. L은 풍요롭고 넉넉한 집에서 자란 사람이 아니었고, 오히려 정반대의 환경에서 자란 이였다. 내 과거 이야기도 조금씩 털어놓았다. L이 내 이야기를 듣더니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네가 아무 걱정 없이 자란 사람인 줄 알았어. 너는 지금 '다 가진 사람'이라서. 안정된 직장도 있고 행복한 가정도 있고. 네가 어릴 때부터 아무 걱정 없이 자란 사람이라고 생각했어.   


 내가 가졌던 속마음을 L의 입을 통해 듣고 있으니 신기했다. – 물론 L이 나와 조금 더 친했다면 내 비뚤어진 면을 알아챘을 거라 생각한다. 나는 지인들에게 시니컬한 말을 꽤 많이 늘어놓는 스타일이니 말이다 – 우리는 서로를 조금씩 오해하고 있었다. 오랫동안 나는 사람에 대해 많이 아는 편이라 믿었다. 누군가를 만났을 때 상대를 빠르게 파악하는 능력이 있다고 자부하며 살아왔다.  그러한 자부심 역시 일종의 오해였음을, L과 대화를 나누면서 깨닫게 되었다.              



3차원의 대상을 2차원의 캔버스 위에 나타내다. 파블로 피카소의 <거울 앞 소녀>


     

 피카소(Pablo Ruiz Picasso. 1881~1973)의 모습. 스트라이프 티셔츠를 좋아했다 


파블로 피카소(Pablo Ruiz Picasso. 1881~1973). 스페인 말라가에서 미술교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말을 배울 무렵부터 그림을 그릴 줄 알았던 천재였다. 예전에는 피카소의 작품들을 보며 '난해하다', '어린아이가 그린 그림 같다'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명백한 오해였다. 그는 이미 어린 시절에 웬만한 어른보다 그림을 잘 그렸다- “나는 라파엘로처럼 그리는 데 4년 걸렸지만, 어린아이처럼 그리기까지는 평생이 걸렸다”는 피카소의 말이 유명하다-. 불과 15살의 피카소가 그린 작품, <과학과 자비>(1897)에서 사실적이며 묵직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과학과 자비> (1897) 피카소가 불과 15살에 그린 그림으로, 사실적인 묘사와 고전적인 분위기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wikiart

 

피카소는 19세 때 예술의 본고장이었던 파리로 옮겨간다. 경제적으로 빈곤하고 어려운 시기를 거치기도 했지만 다양한 예술가들과 조우하며 점차 자신만의 스타일을 확보해 나간다. 2차원의 캔버스 위에 3차원의 세상을 담아내기 위한 예술적 시도를 시작하며 그의 새로운 시대가 열린다. 평면인 그림 속에 입체를 표현하고자 시도한 20세기의 예술적 경향, 입체주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영어로는 정육면체를 뜻하는 큐브(cube)로부터 비롯된 말, 큐비즘(cubism)이라 부른다. 


<아비뇽의 처녀들>(1907). 큐비즘의 시작이라 일컬어지는 작품으로, 특히 오른쪽 두 여인의 모습에서 입체주의의 징후가 드러난다.  @wikiart


 피카소는 대상의 다양한 측면을 기하학적인 단면으로 나누어 분할한 다음, 평면에 새롭게 배치하는 스타일을 보여주었다. 3차원의 모델이나 대상이 가진  2차원의 캔버스에 나타내는 그만의 방식이었다. 아래의 그림을 보면 그 특징을 쉽게 알 수 있다. 인물의 정면과 측면 등 다양한 차원에서 바라본 대상의 모습이 한 화면 안에 자리하고 있다.     


<인형을 든 마야 >(1938)  딸 마야의 얼굴의 정면과 측면을 한 화면 안에 표현했다. @wikiart

 


다음 그림은 피카소가 1936년에 그린  <거울 앞 소녀>라는 작품이다


<거울 앞 소녀> (1936, 파블로 피카소)  @wikiart


 한 소녀가 타원형 거울 앞에 서 있다. 피카소는 소녀의 얼굴과 몸, 실제 공간 및 거울 속 공간을 다양한 측면으로 분할한 다음, 캔버스라는 평면에 표현해 놓았다. 작품의 왼쪽을 보자. 관람자들은 그림 속에 들어가 360도 소녀의 주변을 돌아보지 않아도 된다. 다양한 각도에서 비춘 그녀의 모습을 그림으로 살펴볼 수 있기 때문이다. 우수에 찬 듯 하얀 옆얼굴과 묘한 표정의 또 다른 각도의 얼굴이 나란히 표현되어 있다. 거울 속에는 또 다른 소녀의 얼굴도 존재한다. 어두워 보이는 표정의 거울 속 얼굴은 소녀의 속사정을 드러내는 듯 보인다. 이 작품이 큐비즘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면 우리는 캔버스에서 소녀의 모습 중 앞면, 측면, 뒷면 중 하나만을 보았을 것이다. 피카소의 개성 넘치는 표현 속에서 관람자들은 360도로 펼쳐진 소녀의 다양한 얼굴과 만나게 된다.      


 입체파 화가들은 어째서 2차원의 캔버스 위에 3차원의 대상을 나타내려 노력했을까. 그들은 이러한 시도를 통해 대상의 본질에 더욱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고 믿었다. 사물이나 인물이 가지고 있는 본질을 한 가지 측면이 아니라 여러 방향에서 바라본 다음, 하나의 그림에 동시에 조합해 볼 수 있다고 본 것이다. 한 가지 대상 안에는 다양한 측면이 있고, 이를 살펴봄으로써 대상의 본질에 가까이 갈 수 있다고 믿음. 우리는 피카소의 작품 속에서 그러한 믿음을 읽어낼 수 있다.   

           


입체감을 가진 상대방을 이해하기  


       

 피카소의 <거울 앞의 소녀>를 보며 누군가의 앞모습과 옆모습, 뒷모습에 대해 생각해본다. 입체파 화가들이 그려내는 대상을 인간이라는 존재에 비유한다면 어떨까. 인간의 특성을 도형으로 나타낸다면 2차원의 납작한 존재가 아니라 3차원의 다차원적인 존재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한 인간 안에도 실로 다양한 얼굴이 존재함을, 그를 통해 누군가의 본질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음을 작품은 말해준다.      


우리는 누군가를 대할 때, 몇 가지 장면과 순간의 단편적인 모습만으로 상대를 쉽게 판단하기 쉽다. 앞모습만을 보고 모든 것을 단정 짓는 경우다. 당장 앞모습만이 보이는 데다 상대방의 모든 면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너무 많은 정보를 탐색해야 하니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재빠른 판단 과정은 가끔 판단 오류로 이어진다. 이 사람은 해맑은 것을 보니 걱정 없이 살았겠군. 이 사람은 내 말을 잘 받아주니 분명 착한 사람이야. 외모로 보아하니 성격이 강해 보이는 사람이네.      


 간단하고 빠른 판단은 뇌를 덜 피곤하게 해 주지만, 때때로 우리를 외롭게 만든다. 과거의 나처럼 누군가의 앞모습만을 보고 '나와 다른 부류'로 구분한 다음, 상대에게 심리적 거리감을 두는 일도 있다. 누군가를 제대로 알아갈 기회를 스스로 박탈하는 것이다. 


반대로 상대가 노력 없이 나를 제멋대로 판단하며 내뱉는 말에 불편한 감정을 느끼기도 한다. 마음에 상처를 입거나 이해받지 못한다는 느낌에 사로잡히는 경우도 있다. 나 역시 '너무 착하고 여려 보인다', '교사라 그런지 고지식해 보인다(!)'는 식의 단정적인 말을 들어본 적이 있다. 유명인과 관련된 인터넷 댓글 중에서도 ‘평평한 단정 짓기’를 쉽게 발견하게 된다. 한 순간의 모습, 겉으로 드러난 모습으로 그의 모든 것을 파악할 수 있다는 자신감은 상대를 씁쓸하고 외롭게 만든다.    


 누군가를 진정으로 이해하고 그와 가까워지려면 인내심 용기가 필요하다. 그의 앞모습으로 모든 것을 단정 짓지 않고 더 많은 모습을 바라볼 인내심. 그의 옆얼굴과 뒷모습을 알기 위해 나의 옆얼굴과 뒷모습도 조금씩 드러낼 줄 아는 용기. 누군가는 인상이 세고 강해 보였는데 의외로 여린 면을 간직하고 있고, 누군가는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도 긍정의 마음을 굳건히 지켜왔음을 알게 된다. 걱정 없어 보이던 누군가에게 말 못 할 슬픔이 숨어 있음을 파악하는 경우도 있다. 

 우리를 둘러싼 주변인의 전부를 이해하고 파악할 필요는 없다. 그렇지만 적어도 누군가와 한 발짝 더 가까워지고 싶다면 나의 옆모습과 뒷모습 역시 조금씩 열어 보일 줄 아는 용기가 필요하다. 상대가 지닌 다양한 차원의 모습을 이해하려는 노력도 필요하다. 서로의 옆모습과 뒷모습을 두루 살펴 보았을 때 우리는 상대방에게 입체감 있는 존재가 된다. 누군가는 동그라미에서 구(球)가 되고, 또 다른 누군가는 네모에서 정육면체가 된다. 조금씩 외로움이 가신다. 모든 것은 누군가를 앞모습만으로 함부로 단정 짓지 않는 신중함에서 시작한다.       


  때때로 타인이 아니라 스스로를 파악할 때 비슷한 실수를 저지르는 경우도 있다. 나는 자존감이 낮아. 나는 용기가 없어. 나는 의지박약에다 나약해. 단편적인 모습으로 자신을 단정 짓고 부정적인 말을 스스로에게 날리지만, 사실이 아닌 경우가 많다. 모든 상황에서 자존감이 낮거나 용기가 없고 나약한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가령 나는 심리적 불안도가 높아 운전 공포증으로 벌벌 떨고, 전화 공포증도 심각한 편이다. 그렇다고 나를 '용기 없는 인간'이라는 한 마디 말로 단정 지을 수 있을까. 놀라울 정도로 과감한 용기를 발휘하는 내 모습도 존재한다. 혼자만의 여행도 꿋꿋이 시도해보았고, 내가 원하는 분야에 새롭게 도전하는 것에는 그다지 주저하지 않는다. 나를 평평하게 단정 짓는경우, 특히 부정적인 표현 속에 가둘 경우 나조차 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기에 외롭고 쓸쓸해진다. 사람마다 용기를 내는 지점과 그렇지 못한 지점, 강해지는 순간과 나약해지는 순간은 다르다.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나를 입체적으로 파악하다 보면, 어떤 순간에 내가 자존감이 높고 용기가 많으며 타인에게 친절한 사람인지 알게 된다. '썩 괜찮은 나'를 파악하게 되는 것이다.


 세상 속 누구도 평평하고 납작한 사람이 아니다. 우리는 2차원이 아니라 3차원의 세상 속에 살아간다. 나와 타인을 2차원의 평평한 세상 속에 한없이 가둬두면 쉽고 간단하게 누군가를 파악하게 된다. 쉽고 간단하게 파악한 세계는 결코 흥미롭지 않다. 오해도 쌓인다. 가끔은 상대를 입체감 있게 파악할 필요가 있다. 누군가의 앞모습과 옆모습, 뒷모습에 대해 생각해보는 마음속 여유도 필요하다. 평평하고 납작한 세계에서 벗어나 누군가의 입체감 있는 세계로 들어서는 것. 외로움을 덜어가는 하나의 방법일지도 모른다.   



매거진의 이전글 뭣이 중헌지 묻는다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