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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랑선생 Jan 19. 2021

뭣이 중헌지 묻는다면

그건 바로 나요 

5, 000원짜리 쌍화탕을 들이켰던 그때


      

대학시절 고속버스를 타고 과 전체 MT를 가는 길이었다. 추위가 시작되는 11월이었다. 몸살 기운이 슬슬 밀려오고 있었다. 버스가 휴게소를 들르자마자 따뜻한 차를 파는 가게로 달려가 5000원짜리 쌍화탕을 샀다(일반적으로 약국에서 병에 담아 파는 쌍화탕보다 비싼 종류의 음료였다). 재빨리 쌍화탕을 입에 털어 넣는 나를 바라보며 친구들은 웃었다. 얘는 스무 살인데 벌써 건강 염려증이 있어. 친구들의 놀림에 나도 따라 웃었던 기억이 난다.

      

 대학시절 기숙사에서 아침을 꼭 챙겨 먹었던 기억도 있다. 술을 많이 먹은 다음날이면 친구들은 더 자기 위해 아침을 굶는 경우가 많았다. 반면 나는 숙취의 기운이 남아 있어도 기숙사 식당에 아침을 먹으러 갔다. 밥을 꼭 챙겨먹는다는 것이 대학시절 내 철칙이었다. 집에서 떨어진 타지에서 살았기 때문에 나 자신이 스스로의 '보호자'여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타지에서 아프고 서러운 상황을 맞는 것이 싫었다. 스스로를 잘 돌봐야 한다는 다짐이 머릿속에 있었다. 


  완벽주의 성향 때문에 마음속으로 늘 자신을 구박하고 몰아세우던 나였지만, 행동에 있어서만큼은 스스로를 챙기는 것을 주저한 적이 없다. 힘든 일이 닥쳐오면 밥을 한 그릇 퍼서 꼭꼭 씹어 먹는 버릇이 있었다. 그 사소한 행위에 신기하게도 힘이 났다. 스스로 먹을 것을 챙겨주면서 '그래, 이제 밥 먹고 힘내자 ' 스스로에게 말해주고는 했다. 나만을 위한 시간도 반드시 챙겼다. 직장생활을 할 때에도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혼자 외출을 해서 영화를 보거나 미술관 관람을 했다. 오로지 내 취향에 맞추어 혼자 식사를 하고 문화생활을 하면 스스로를 대접해주는 느낌이 났다.      


 꾸준히 스스로를 챙기던 나에게도 위기는 찾아왔다. 출산과 육아는 만만치 않은 장벽이었다. 아이를 낳은 직후에는 앉아서 밥을 먹는 것은 고사하고, 서서 먹기도 힘들었다. 내 생일에 아이를 안은 채 서서 탕수육을 먹는데 이건 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는 자식을 낳으면 인격적으로 성숙해진다고 이야기했다. 완전히 틀린 이야기는 아니었다. 나 아닌 타인의 욕구를 먼저 챙기며 배려와 희생이라는 미덕을 배웠으니까. 반면 줄어드는 능력치도 있었다. 스스로를 챙기는 능력이 급격히 퇴화되었다.       


 아이를 낳은 후에는 나 자신의 욕구를 먼저 챙기려 행동할 때마다 죄책감이 치솟았다. 부모라면 아이를 위해 늘 헌신해야 한다 생각하는 남편을 보며 더욱 그런 느낌이 들었다. 가령 입이 짧은 아이가 맛있는 음식을 계속 거부하면, 남편은 엄청나게 안타까워했다. 끝까지 아이를 따라다니며 음식을 입에 넣어주려 했다. 반면 나는 그 음식을 내 입에 슬쩍 집어넣으며 흐뭇하게 웃는 엄마였다.  


 시간을 활용할 때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다. 원래의 습관대로 나는 스스로를 위한 시간을 먼저 챙기려고 안간힘을 썼다. 한국 휴가 때에도 그리운 지인들과의 만남을 위한 시간, 혼자만의 미술관 관람과 영화 관람 시간은 반드시 가져야 했다. 스스로 나를 위한 시간을 챙겨야 한다는 생각에 한 행동이었지만-솔직히 주변에서 날 위한 시간을 알아서 챙겨줄 것 같지 않았다- 종종 '아이는 뒷전이고 자신 먼저 챙기는 별난 엄마'라는 주변의 시선도 받았다. 가족과의 시간이 아닌 혼자만의 시간을 나서서 챙기니 자기중심적이라는 이야기도 때때로 들었다. 엄마로서, 부모로서 나는 부적격자가 아닐까. 가끔 고민했다.  

  

       

행위는 이토록 중요하다안니발레 카라치의 <콩 먹는 사람>     


 

 

안니발레 카라치의 자화상  @wikiart


안니발레 카라치(Annibale Carracci.1560~1609)는 16세기 초기 바로크 시대의 거장이다. 화가의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는 일을 도우며 성장했다. 그의 형인 아고스티노 카라치, 사촌 형인 루도비코 카라치 형제와 화실을 열어 교회의 그림을 주문받아 여러 가지 작업을 했다. 

 

카라치의 <이젤 위의 자화상>(1604)은 독특한 방식으로 인물을 표현하는 방식을 ,  <정육점>(1583)은 일상 생활의 소재를 사실감 있게 연출하는 방식을 보여준다.  


 카라치 형제들은 일상생활에서 얻는 소재에 관심이 많았다. 인물을 세밀하게 묘사하기 위해 거친 선을 반복하면서 인물의 형태를 표현하기도 했다. 이렇게 인물을 그린 그림을 카라치 형제는 ‘카리카듀라’라고 이름 지었다. 오늘날 인물을 희화화해 묘사하는 그림을 뜻하는 ‘캐리커쳐(Caricuture)’의 어원이 된 말이다.      



안니발레 카라치의 대표작  <콩 먹는 사람>(1585)은 마치 방송이나 영화에 등장하는 ‘먹방’ 속 한 장면을 정지시킨 듯 보이는 그림이다. 

<콩 먹는 사람>(1585, 안니발레 카라치)   @wikiart


 한 남자가 삶은 콩을 한 숟갈 집어 먹으려는 참이다. 식탁에는 삶은 콩 한 그릇과 함께 삶은 채소, 세 쪽의 파, 물 주전자, 네 조각으로 나뉘어 있는 빵, 와인 잔이 함께 놓여 있다. 손톱에 끼어 있는 검은 때, 낡은 모자를 보면 남자가 서민 계층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의 매서운 시선은 관람자들을 향해 있다. ‘내 식사시간을 방해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듯 보인다. 


<콩 먹는 사람>은 음식을 먹는 수많은 그림들 중에서 차별화된 특징을 지니고 있다. 서양 명화에는 ‘식사시간’을 주제로 그려진 작품이 많다. 그러나 ‘먹는 행위’ 자체에 초점을 맞추어 제작된 그림은 찾아보기 어렵다. 보통 예술작품 속 식사 장면은 종교적 의미로 쓰이는 경우가 많았다. 식사 시간에 이루어지는 사람들의 대화나 친교 행위 등 다른 메시지에 주목하는 작품도 많았다. 이 경우 대부분 음식을 집어먹는 사람들은 눈에 띄지 않는다. 지체 높은 인물이 음식을 먹는 모습을 그리는 것은 금기에 가까웠다.      

  

<최후의 만찬>(1495~1498, 레오나르도 다빈치)을 살펴보면 어느 누구도 음식을 집어먹는 이가 없음을 알 수 있다. @wikiart


 반면 <콩 먹는 사람>은 말 그대로 ‘음식을 먹는 행위’ 그 자체에 주목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식사 중인 그림 속 남자는 그 누구와도 대화를 나누지 않는다. 남자의 모습이 다른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는 그저 열심히 먹는 것에 집중하려 할 뿐이다.   

     

지금 이 남자의 식사를 방해해서는 안 된다. 지금 그 앞에 놓인 음식은 남자의 고단한 하루를 위로해줄 중요한 한 끼이기 때문이다. 나를 위해 무엇인가를 먹는 행위, 그것이 예술의 소재로 쓰일 만큼 의미 있음을 그림은 보여주고 있다. 관람자들은 작품을 보며 먹는다는 ‘행위’가 가진 의미를 생각해보게 된다. 

     


자존감은 어디에서 나올까    



 수년간 자존감 열풍이 불었다. 나 역시 자존감에 관련된 책을 여러 권 읽으며 이 단어를 곱씹었다. 자존감이라는 말속에는 ‘감정’을 뜻하는 ‘感’ 자가 들어있으므로 늘 마음의 관점에서 이 단어를 생각해 왔다. 나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보자. 나를 존중하는 마음이 중요해. 마음속으로 수백 번 생각했다. 엄청난 성취를 이루어내어, 나를 세상에 제대로 증명하면 자존감이 절로 생길 것이라 생각한 적도 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자존감이라는 말의 포커스를 넓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나를 존중하고 사랑하는 마음은 중요했다. 그러나 되짚어 보면 이를 뒷받침할 '행위'도 못지않게 중요했다. 스스로를 하찮게 대하지 않고 귀하게 대접해야, 괜찮은 사람이 되는 거였다. ‘나’를 챙기는 행동이 이기적이거나 나쁜 것도 아니었다. 매일매일을 살아내기 위한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연인관계를 생각해보자. 상대방을 사랑하는 ‘마음’만으로 지속되는 관계는 없다.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상대방을 위하는 행동 없이 ‘표현 안 하더라도 내 마음 네가 알아야지’식으로 연인을 대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이 경우 상대방은 무뚝뚝한 연인에게 지쳐 나가떨어지기 쉽다. 자존감도 마찬가지다. 나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자고 수백 번 결심해봤자 표현과 행동이 따라주지 않는다면 ‘나’ 역시 지쳐 나가떨어진다. 나를 사랑할 원동력이 사라진다.


 그 원동력이 간절히 필요한 순간이 때때로 찾아온다. 스스로가 초라하고 하찮게 느껴져 견딜 수 없는 날, 나를 귀하게 대해주면 힘이 생긴다. 오로지 나를 위한 맛있는 한 끼를 만들어 예쁜 그릇에 담아 대접해주는 행위, 내가 좋아하는 취미 생활을 적극적으로 즐기는 행위, 혼자만의 평화로운 티타임을 가지는 행위 등 나를 위해 주는 사소한 행동은 살아갈 힘을 준다. 나를 제대로 챙겨줄 시간이 없다면 하다못해 밥이라도 꼭꼭 씹어 먹는 것이 좋다. 그런 행동은 구차한 것도, 이기적인 것도 아니다. 당연한 행위다. 혹시 나를 만족시킬 수 있는 행위,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면 이를 찾아보는 연습도 필요하다. 홀로 외출하거나 여행하면서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물어봐주는 것이 좋다. 오늘은 무엇을 먹고 하기를 원하는지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물어보며 취향 탐구를 해본다. 자연스럽게 내가 원하는 것들, 좋아하는 것들을 깨달아 가게 된다.       


 가족이나 친구 등 타인을 위해 희생한다고 해서 상대방이 그만큼 나를 알아서 챙겨줄 것이라는 생각은 오산이다. 나만큼 내 욕구를 정확히 알고 챙겨줄 사람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나보다 타인을 챙기는데 에너지를 너무 쓰다 보면 가끔 은근한 바람이나 억울함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기도 한다. ‘내가 아무개를 그렇게 챙겨주었는데 걔는 이토록 무심하네.’ ‘내가 그렇게 신경 써줬는데 아무도 날 챙기지 않아.’식의 생각이 머릿속을 떠돈다. 물론 순수하게 이타적인 마음으로 타인을 보살피고 챙기는 경우도 존재한다. 그럼에도 나보다 남이 우선순위가 되면 가끔 인간관계의 대차대조표가 머릿속에 펄럭거린다. 나는 누군가를 ‘위해’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남들도 나를 ‘위해’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다. 근본적으로 우리는 스스로를 위해 살아가야 함을 기억해야 한다 (역설적이게도 이 사실을 먼저 깨달아야, 대가를 바라지 않고 타인을 도울 수 있다). 


 내 욕구와 취향을 알아채고 맞춤형 챙기기를 해줄 사람은 결국 나다. 나한테 박하게 굴지 말자. 자존감은 내 욕구를 챙기고 보살피는 ‘행동’에서 솟아나기도 하는 법이다. 스스로를 열렬히 사랑하고 싶다면, 먼저 행동으로 그 사랑을 증명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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