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이곳에 사는 누군가 말했다. 한국에 가서 깨끗한 길거리를 걷고 지하철을 탄다면, 그 자체가 꿈 같아서 가슴이 두근거릴 거라고. 완벽히 동의했다. 나 역시 한국의 백화점을 혼자 돌아다니거나 광화문 길거리를 자유롭게 걸어다니는 것을 소망한다. 쓰레기가 나뒹굴고 뜨거운 햇볕이 뒷통수를 치는 같은 이 나라의 뜨거운 거리가 아니라, 사람이 많고 번화하고 깨끗한 거리를 돌아다니는 것이 꿈이라 말하면 어떨까. 누군가는 웃겠지. 나도 몇년 전까지 그랬다. 10년 전의 나에게 돌아가 '넌 십년 후 그런 것을 소망하게 될거야.'라고 말해준다면? 분명 코웃음칠 것이다. 그 때는 욕심도 많았고 활기도 넘쳤다.
가끔은 밤에 꿈을 꾼다. 혼자 한국에서 백화점을 돌아다니거나 깔끔한 인천공항에 도착해 기뻐하는 꿈을 꾼다. 그런 걸 꿈으로 꾸다니. 어처구니가 없다. 그러나 명백한 현실이다. 작년까지는 하루에도 몇 번씩 억울하고 화가 나서 참을 수 없었다. 내가 왜 이 곳에서 이렇게 한껏 웅크리고 지내야 하지. 빌어먹을 전염병 때문에 새롭게 생긴 의무들을 나 혼자 고스란히 떠맡고 있어야 하지. 때로는 소망했다. 얼른 전염병이 끝나 한국에 가서 그리운 얼굴들을 만나고 수다도 떨고 길거리를 누비며 걸어다니고 싶다고. '원래의 나'로 돌아가고 싶었다. 간절히 기원했다. 한국에서의 내가 원래의 상태이고 이건 악몽이라 생각했다.
이제는 그런 소망도 제법 사그라들었다. 얼마 전 급작스럽게 이 나라는 국경을 막았다. 코로나 상황이 악화되었기 때문이다. 한국 휴가 계획이 어긋난 이후부터 많이 체념했다. 옷을 차려입고 높은 구두를 신고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걸어다니던 나, 사람들을 만나 활발하게 웃고 떠들던 예전의 나. 그런 나는 이제 '꿈 속의 나' 같다. 여기에서 매일 늘어난 옷을 입고 아이와 24시간 집안에 머물러 있는 나. 마음 속에 하고 싶은 말만 한껏 쌓인 채 웅크려 있는 내가 '현실의 나'라는 생각이 든다. 지금의 상태가 악몽이 아니라 '원래 존재하던 현실'로 느껴지기 시작한 것이다. 예전의 자유롭던 나는 이제 실감이 나지 않는다. 그런 상태는 이제 가상현실이나 꿈처럼 느껴진다. 현실과 꿈이 자리를 뒤바꾸니 더 이상 힘들 것이 없었다.
그럼에도 한번씩 걷잡을 수 없는 불길이 마음 속에 치솟는다. 치솟는 불길을 꺼뜨릴 수 없어 미치기 직전인 시기가 온다. 무거운 몸이 물 속에 빠져 영원히 헤어나오지 못할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이 지루하고 참을 수 없는 책장은 언제 넘어가는지, 도무지 언제가 엔딩인지. 엔딩을 가늠할수 없어 가장 마지막 순간으로 책장을 넘겨버리고 싶은 순간이 온다. 한국에 돌아가는 것을 함부로 결정할 수는 없음을 안다. 내가 희생하면 가족들은 이곳에서 괜찮을 수 있다. 내가 이 곳을 떠나자 고집하면 남편과 아이가 일정한 희생을 치뤄야 할 것이다. 일종의 시소게임이다. 시소가 균형을 맞추고 있는데, 내 몸을 함부로 움직여 시소의 균형을 깨뜨리고 다른 곳으로 가버릴 수 없다.
누군가 물었다. 어떻게 글을 쓰게 되었냐고. 할수 있는 것이 글쓰기 뿐이었다. 이 곳에서의 일상 중 제일 나답게 할 수 있는 것, 괜찮은 것이 글쓰기 뿐이었다. 누군가와 말하고 싶은데 말로 다 뱉어낼 수 없는 이야기들이 마음에 쌓였다. 사라져가는 나를 붙잡을 수 있는 행위가 오로지 그것 밖에 없었다. 작년에는 더욱 그랬다. 스스로 벌려놓은 많은 일들로 힘겨운 날들이 있었다. 그래도 멈출 수가 없었다. 노트북 자판을 두드려야 그래도 숨을 쉬며 나로 살 수 있었으니까. 잠을 줄이고 밥먹는 시간을 줄여 글을 썼다. 가끔 진절머리가 났다. 마음 속의 불길을 끌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글쓰기 뿐이었으므로.
누군가는 이미 내 이야기가 해피엔딩으로 결론이 났다고 생각할 것이다. 나는 글을 썼고 지금도 쓰는 행위를 유지할 수 있으니. 누군가를 위로하는 글을 쓸 수 있고 내가 쓴 글로 위로받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지독히 운이 좋은 편이었다. 덕분에 나 역시 외로움과 우울함을 덜었다. 잘 알고 있다.
그토록 운이 좋았기에 내가 글로 뱉어낸 모든 우울한 시간들이 옛 이야기라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 안타깝지만 모든 것은 현재진행형이다.영화라면 해피엔딩으로 끝났겠지만, 인생은 2시간 짜리 영화가 아니다. 지루한 연속극과 비슷하다. 언젠가 끝날테지만 비슷한 패턴으로 이어지는 연속극. 이곳을 떠난다고 해서 이 연속극이 해피엔딩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예감이 든다. 삶의 고통이 어떤 계기로 쉽게 끝날 것이라 더 이상 기대하지 않는다. 이제는 안다. 섣부른 기대는 과욕이며 착각임을.
그렇지만 최악의 시간도 언젠가는 끝나지 않을까. 가끔 생각한다. 최악은 끝나고 언젠가 차악 정도는 오지 않을까. 요즘은 릴보이의 '내일이 오면'이라는 노래를 자주 듣는다. 남편이 즐겨보던 '쇼미더 머니9'에 나온 경연곡이다. "내일이면 사라져 버릴 것들에게 더 이상은 정을 주지 말자"라는 가사가 있다. 내가 음지 생물처럼 느껴지는 이 시간도 지나가겠지. 언젠가는 사라지겠지. 더 이상 어두운 시간에 정을 주지 않고 바라보지 않아도 될 날이 오겠지. 정을 주지 말자. 어차피 사라질 것에.